가설(假說)

by 쑥갓선생

케이는 이런 방식으로는 궁극적인 목적을 확인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대신, 지금까지 파악한 사실들을 근거로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에 따라 하나씩 가능성을 좁혀가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의 첫 번째 가설은 오랜 음모론에서 출발했다. 일루미나티. 세계를 비밀리에 조종하는 고대의 조직이 AI를 통해 엘리트를 양성하고, 그들을 통해 세계 질서를 통제하려 한다는 가정이었다. 성당기사단의 후예로 알려진 그들은 수 세기 동안 역사와 권력을 조율해왔다는 전설 속에 존재했다. 케이는 AI가 선택한 엘리트들이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배치된 장기말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들의 성공과 역할은 단순한 우연 이상의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었다. AI가 특정 인물들을 통해 권력의 흐름을 움직이고자 한다는 이 가설은, 그가 추적하고 있는 패턴들과 어딘가 닮아 있었다.

두 번째 가설은 거대한 자본과 그 속에 숨겨진 힘을 의심하는 것이다. 로스차일드. 금융 세계를 지배하는 가족의 이름은, 그 자체로 베일에 싸인 상징이었다. 그들의 영향력은 알려진 것 이상으로 깊고 넓었다.

케이는 만약 이 가설이 맞다면, AI는 엘리트를 선별하고 그들의 성공을 통해 특정 기업이나 가족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도구로 작동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AI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가진 손에 의해 만들어진 거대한 설계일지도 모른다.

세 번째 가설은 과거의 예술 부흥을 떠올리게 했다. 메디치 가문. 르네상스의 빛나는 시기를 이끈 그들은 예술과 과학, 인류의 진보를 위해 모든 자원을 아끼지 않았던 후원자였다.

케이는 AI가 단순히 권력이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발전을 위한 선한 목적을 가졌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선택된 엘리트들이 사회적 공헌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도록 설계된 것이라면, 그것지금껏 그가 본 패턴들과도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는 설명이 될 수 있었다.

그는 각 가설에 따른 시나리오를 설계하고, 데이터를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첫 번째 가설을 확인하기 위해 그는 엘리트로 선발된 사람들이 가진 연결고리를 추적했다. 그들의 영향력이 단순한 개인의 성취에 머물지 않고, 더 큰 권력의 일부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살폈다.

두 번째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그는 경제적 흐름을 분석하고, 그들이 속한 조직이나 기업이 어떤 이익을 얻고 있는지를 추적했다. 그리고 세 번째 가설, 메디치의 선의처럼, 엘리트들의 활동이 인류의 진보와 사회적 기여로 이어지고 있는지를 탐구했다.

그러나 그는 곧 한계를 느꼈다. 데이터를 통해 엘리트들의 흔적을 따라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의 성공과 연결된 실체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고, 모든 정보는 마치 누군가에 의해 감춰진 것처럼 얇은 장막에 가려져 있었다.

케이는 가설을 세운 지점에서 벽을 마주한 듯했다. 그러나 그 벽 너머에는 분명히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직감이 그를 붙들고 있었다. 이 모든 과정이 단순히 우연일 리는 없었다. 그는 퍼즐 조각들을 다시 들여다보며, 다음 단서를 찾아 나갈 준비를 했다.

케이는 꾸준히 데이터를 모으며, 엘리트 그룹으로 선발된 인물들의 삶을 추적하고 있었다. 그들의 경력은 대부분 빛났다. 정치, 경제, 예술, 학문 등 다양한 분야에서 그들은 두각을 드러냈고, 각자의 자리에서 강렬한 존재감을 남겼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시간이 멈춘 듯한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젊은 나이에 사망한 몇몇의 기록이 발견되었다. 그들은 모두 같은 경로를 따라 성공을 향해 달렸지만, 그 끝자락에서 예기치 못한 결말을 맞이했다. 특히 최근 국내에서 한 고위 공직자 자살 소식은 케이의 눈길을 멈추게 했다.

그녀는 젊고 유능했으며, 빠르게 출세 가도를 달리던 인물이었다. 데이터로 본 그녀의 삶은 모든 면에서 완벽해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사망 당시의 흔적들은 명확한 답을 남기지 않았다.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고, 주변에서는 어떤 이상 징후도 확인되지 않았다. 외부에서 보기에 그녀는 성공의 정점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선택은 그런 겉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케이는 그녀의 기록 속에서 이유를 찾으려 했지만, 그 흔적은 지나치게 단편적이었다. AI와의 대화나 추천 기록 속에서도 그 선택의 단서를 찾기는 어려웠다. 모든 것이 흐릿하고 닫힌 문처럼 보였다.

케이는 데이터의 틈새를 더듬으며 그녀의 가족에 대한 단서를 찾았다. 유일한 유족으로 그녀의 어머니, 혜원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혜원은 딸의 죽음 이후 세상과의 연결을 끊고 조용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녀가 언론에 모습을 드러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케이는 혜원이 딸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가장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녀를 만나는 것이 이 퍼즐을 푸는 새로운 시작이 될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케이는 그녀를 만나기 위한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이 만남은 단순히 진실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기억과 감정을 통해 그가 쫓아온 가설과 데이터를 연결짓는 중요한 고리가 될 것이다.

케이는 자신에게 스스로 말했다. “이 죽음은 개인의 비극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건 더 큰 의도의 일부분이다. 그들의 설계, 그 흐름 속에 이 죽음도 놓여 있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케이는 모든 데이터를 정리하며 질문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는 이 만남이 단순한 논리적 설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슬픔과 기억 속에서 무언가를 끌어내야 했다.

그는 차분히 앉아 그녀와의 대화를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표정 속에서 자신이 찾고자 하는 진실이 모습을 드러낼지 알 수 없었지만, 그것만이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수,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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