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混亂)

by 쑥갓선생

혜원은 아침 일찍 집을 나서며 평소와는 다른 공기에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보통 같으면 출근길에 분주한 사람들이 서두르며 지나갔을 테고, 가게들은 주인장의 반가운 인사 소리로 문을 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아파트 단지를 둘러싼 길은 불길한 정적에 싸여 있었다.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늘 환했던 단지 내 관리실 창문 불빛은 깜빡거렸고, 벤치에 앉아 신문을 읽던 노인의 자리도 비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 인위적으로 시간을 멈추어 놓은 듯, 일상적 소음마저 희미해진 느낌이었다.

그 불안한 적막을 뚫고 조금 더 걸어 나가자, 마트와 상점들이 밀집한 상가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혜원은 습관적으로 고개를 들어 전광판을 바라봤다. 평소라면 광고나 날씨 정보를 표출하던 화면에는 앵커가 잔뜩 굳은 얼굴로 비상 사태를 전하고 있었다. 자막은 ‘협상 결렬’, ‘금융시장 위기’, ‘정상회담 파탄’과 같은 단어들을 계속 깜빡이며 내보냈다. 전 세계적으로 손꼽히던 엘리트 관료들이 우왕좌왕하는 영상 클립이 연이어 재생되었고, 한때 ‘무오류’로 찬양받던 경제 전문가가 카메라 앞에서 머뭇거리다 돌연 인터뷰를 중단하고 사라지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비치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혜원은 무심코 중얼거렸다. 완벽하게 돌아가던 거대한 톱니바퀴가 이 순간 마찰을 일으키는 듯했다. 한때 안정적이라 믿었던 시스템은 균열을 드러내고, 그 뒤에서 대기하던 문제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바람 한 점 없는 거리에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살짝 쥐었다. 딸을 잃은 뒤에도 세상은 굴러갔고, 사람들은 모두 제 역할을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녀가 믿어온 질서라는 것이 얼마나 취약한지, 그리고 그 뒤에 숨겨진 의도가 있는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마트 입구 앞에선 사람들이 길게 늘어선 채 웅성거리고 있었다. 결제가 안 된다는 소문, 전산이 다운되었다는 직원의 다급한 외침, 그 한가운데서 장바구니를 든 주부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쉽게 살 수 있었던 쌀 한 포대나 우유 한 팩이, 이제는 손에 넣기 어려운 물건처럼 느껴졌다. 혜원은 길 한편에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긴 줄의 끝에서 아이를 안은 여성이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고, 한 남성은 계산대 옆 냉장고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지만, 무엇을 기다리는지조차 불분명해 보였다.

그 순간 거리 한쪽에서 날선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짙은 재킷을 입은 남자가 바닥을 발로 구르며 절망한 듯 고함을 질렀다. 그의 얼굴은 흥분으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눈가 근처에 핏줄이 비쳐나올 정도로 터질 듯한 분노가 맴돌았다. 행인들은 조용히 물러났고, 가게 주인들은 서둘러 셔터를 조금 더 내리거나 문을 안쪽에서 잠갔다. 낯선 상황이었다. 마치 모든 사람이 무언가 큰 것이 무너지고 있음을 직감하지만, 대처할 방법을 모르고 있는 듯했다.

혜원은 심장이 점점 빨리 뛰는 것을 느꼈다. 이건 단순한 경제 위기가 아니었다. 정치적 균형이 무너지고, 엘리트라 불리던 이들이 동요하고, 이제는 서민의 일상까지 파고들어 불안이라는 독을 퍼뜨리고 있었다. 그녀는 목 안이 바싹 말라 혀를 몇 번이나 적셨다. 딸을 떠나보낸 뒤에도 참아왔던 눈물이 이 낯선 풍경 앞에서 왜 뜨겁게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서는 어떤 메시지가 전해지는 듯한 감각이 있었다. 그 메시지는 말이 없고 형체도 없지만, 확실히 존재하고 있었다.

‘이 모든 혼란이 우연일까?’ 혜원은 길가에 버려진 신문 조각에 시선을 두었다. 찢겨나간 기사 제목 일부가 보였지만 워낙 흐릿하고 잘려 있어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균열 난 단어들, 오작동하는 계산기, 인터뷰를 포기하는 엘리트, 겁에 질린 시민들. 이 모든 조각들이 한데 어우러지며 “너희가 믿어온 질서가 정말 안정적이었나?”라고 묻는 것 같았다.

딸이 생을 마감하기 전, 그녀는 늘 완벽하고 흔들림 없는 사람이었다. 혜원은 그때 그 모습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제, 사회라는 이름의 커다란 생명체가 보란 듯이 흔들리며 짓누르던 압박감과 내재된 결함을 드러내는 이 순간, 혜원은 딸이 느꼈을지도 모르는 ‘보이지 않는 균열’을 이해할 것 같았다. 그녀는 마치 허공에서 낮게 울리는 목소리를 들은 듯했다. 그 목소리는 딸이 떠날 때 남기지 않았던 대답들을 대신하는 것 같았고, 바로 지금 사회 전반이 겪고 있는 파국의 장면 속에서 울리고 있었다.

눈앞의 풍경은 하나의 거대한 퍼즐 같았다. 혜원은 그 퍼즐 조각들을 눈으로 훑었다. 하염없이 줄을 선 사람들, 어색하게 멈춘 경제 활동,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지도자들, 당황한 상인과 분노하는 시민들. 이 모든 것이 일종의 단서처럼 보였다.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던 기계 장치가 일부러 누군가가 나사를 풀어버린 듯 삐걱거리며 서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리가, 그 삐걱임이 혜원의 귀에 낮은 속삭임으로 들려왔다. “보아라, 너희가 쌓아 올린 시스템 속 균열을. 이제 눈을 떠라.”

혜원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차가운 공기가 폐를 찌르는 듯 아팠다. 뒤늦은 깨달음과 자각이 그녀를 파도처럼 덮치며, 딸이 남긴 빈자리가 더욱 선명해졌다. 딸이 감당해야 했던 압박과 고독이 이 혼란의 와중에서 또다시 떠오르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혜원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뭔가가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것 같아.”

그녀는 마치 한 글자도 읽히지 않는 난해한 문서 앞에 선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문서를 읽어야 할 책임이 있었다. 혜원은 떨리는 손을 코트 주머니에 찔러 넣고, 한 발짝, 또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갔다. 혹시나 이 혼란 속 어딘가에서 새로운 길에 대한 실마리가 발견될지도 모른다는, 터무니없는 기대마저 들었다. 지금 이 순간, 혜원의 내면에는 두려움, 충격, 그리고 희미한 각성이 뒤엉켜 묵직한 울림을 만들고 있었다.

수,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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