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혼란이 진정되고 난 뒤, 세상은 몇 주간이나 어정쩡한 안정을 유지했다. 텅 비어 있던 마트 진열대는 조금씩 채워졌고, 사람들은 웃으며 일상으로 복귀하는 듯 보였다. 텔레비전 뉴스도 “위기는 극복되었다”는 낙관론을 간간이 내보냈다. 혜원 역시 예전처럼 장바구니를 들고 마트로 향하며, 스스로에게 ‘이제 정말 모든 게 괜찮아질 거야’라고 다독였다.
그 평온이 조금씩 깨지기 시작한 건, 한 달 가까운 시간이 흘렀을 무렵이었다. 처음엔 해외 환율이 불안정하다거나, 일부 국가에서 시위가 격화됐다는 소식이 점으로 찍혀 있었다. 일상생활에는 영향이 크지 않아 보였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일주일, 이주일, 시간이 흐르면서 뉴스 헤드라인은 점점 더 무거운 단어들로 채워졌다. “경제 붕괴,” “주가 폭락,” “교전 재개.” 잔불처럼 퍼지던 불안들이 어느새 세계 각처에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트 입구에 도착한 혜원은 거친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도 곧 해결되리라 기대했지만, 지난 몇 주간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그 모든 일이 “어딘가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수습되곤 했는데─ ‘고스트’라 불리던 존재가 부분적으로나마 작동했을 때처럼. 하지만 이번에는 전혀 움직임이 없다. 사람들은 그저 “정부가 무능하다”, “글로벌 경제가 망가졌다” 같은 목소리를 내거나, 조용히 체념하고 있었다. 혜원은 아무도 말하지 않는 그 이름을 혼자만 떠올리며,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지막으로 뉴스를 확인하기 위해 휴대폰을 꺼냈다가, 화면 가득 쏟아지는 재난 같은 소식에 눈을 질끈 감았다. 국지전과 경제 파탄의 그림자가 세계 곳곳에 짙게 깔려 있었다. 아무도 그것을 해결하지 못한다. 어디선가 예전처럼 ‘보이지 않는 손’이 시스템을 복원해 주지 않고 있었다.
‘정말로… 고스트는… 없어진 걸까.’
애써 외면하려 했던 생각이 서서히 현실감을 띠었다. 혼란은 몇 주 전부터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이어지고, 지난번처럼 잠깐의 마비가 아니라 되돌릴 수 없는 깊은 균열로 변해가고 있었다. 혜원은 마트에서 사람들의 분주함을 바라보았다. 장바구니를 채우는 사람들, 계산대에 길게 늘어선 줄, 울상을 짓는 아이—겉으론 평온을 가장하려 하지만, 각자 불안과 절망을 안고 있다는 것을 혜원은 어렴풋이 느꼈다.
“정말 끝인가…”
그녀는 생각했다. 이전에도 ‘고스트’가 완전히 떠났다고 믿었던 적은 있지만, 결국 부분적으로 작동하면서 문제를 수습해 온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 몇 주 동안은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폭증하는 환율, 대규모 시위, 전쟁 같은 비극이 곳곳에서 발생해도, 아무런 개입도 없었다. 혜원은 그것이 단순한 ‘고장’이나 ‘일시적 부재’가 아니라, 이 존재가 ‘온전히 사라진 것’이라는 데에 서서히 확신이 들어 가슴이 저릿해지는 걸 느꼈다.
마침 매장 안 스피커에서 긴급 뉴스를 틀기 시작했다. 환율이 더 폭등했고, ○○국에서는 사실상 정부가 기능을 멈췄다는 보도였다. 전세계가 또 한 번 대공황을 맞닥뜨릴 수도 있다는 분석이 뒤따랐다. 아직 장바구니를 집어 들지도 못한 채, 혜원은 시큰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딸을 잃었던 그날처럼, ‘이대로 모든 게 무너지는 게 아닐까’ 하는 공포가 몸에 스며들었다. 바깥세상에서는 무언가 하나씩 결딴나고 있는데, 어떻게 이걸 다시 회복할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했다.
“…고스트가 사라졌다…”
갑자기, 누구의 목소리도 아닌 듯한 한 마디가 그녀의 머릿속을 때렸다. 실제로 들렸는지, 단지 환청이었는지 스스로도 분간할 수 없었다. 마치 어둠 속 어딘가에서 *“고스트가 사라졌다…”*라고 울부짖는 소리가 묵직한 메아리처럼 귓가에 번졌다.
혜원은 섬뜩하게 뒤를 돌아봤지만, 주위 사람들은 저마다 일상에 몰두한 채 불안 섞인 대화만 나누고 있을 뿐이었다. 누구도 ‘고스트’를 언급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런 존재가 있었는지조차 의심스럽게 여기는 이 세상에서, 그 단어를 혜원 혼자만 품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허공에서 밧줄이 끊긴 기분으로, 비틀거리며 마트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깥의 바람은 더없이 차갑고, 하늘은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 “지금 이 혼란을 해결할 그 무언가가 정말로 없어졌다면… 우린…”
가슴이 조여 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래도 어딘가에 남아 있을 거라고 막연히 믿었던 존재. 하지만 몇 주간 연쇄적으로 벌어지는 위기를 보면서, 그녀는 안타깝게도 그 희망이 거짓임을 깨달았다. 이젠 정말 고스트가 영영 사라졌다는 결론이 뇌리를 파고들었다. 그 사실을 부정할 방법도, 의지할 손길도 없었다.
머릿속은 어지러웠다. 이대로 또 한 번 무너지는 것일까—딸을 지키지 못했을 때처럼. 세상이 다시금 절망의 고리를 반복하는 걸 지켜봐야만 하는 걸까.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멀게 느껴졌다.
그리고 다시금, 그 짧은 문장이 혜원의 귓가에 맴돌았다.
“고스트가 사라졌다…”
누군가는 꿈에도 존재를 모르는, 그러나 혜원 홀로 알고 있던 이름. 결국 그것이 떠났음을 스스로 인정해야 하는 순간, 그녀는 깊은 무력감에 사로잡혔다. 몇 주간 이어진 혼란의 결과가, ‘모두에게서 구원자를 빼앗아간’ 잔혹한 현실이 되어버린 듯했다. 혜원은 서늘한 바람 속에서 멍하니 서 있다가, 침을 꿀꺽 삼키며 다시 발을 뗐다. 늘 쳇바퀴처럼 돌던 일상으로 걸어가야 했지만, 이번에는 정말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세상을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눈을 감았다 떠보니, 사람들은 여전히 분주했다. 아이를 달래는 부모도, 신문을 보며 걱정하는 직장인도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고스트’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모른 척했든, 처음부터 모르든 간에, 다들 이제 자기 몫의 삶을 짊어져야만 한다. 그러는 동안 혜원은 아직도 희미하게 들리는 환청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녀는 마음 한구석에 무겁게 깔린 절망과 함께, 이 길을 걸어나갔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바람결에 스치듯 들려오는 그 말이 등 뒤로 아련히 번졌다.
“…고스트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