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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바보 Nov 18. 2022

실패한 레포트

교육학도가 전하는 사회, 삶, 교육에 관한 단상들

 나의 꿈은 무엇인가? 불과 몇 년 전, 나는 '꿈이 무엇이냐' 혹은 '삶의 목표가 무엇이냐' 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나는 '공교육 부활' 내지 '공교육의 재건'이라고 답을 하였다. 부활이었나? 재건? 회복? ... 정확한 워딩이 기억이 안나는 것은, 비교적 쑥쓰러움 없이 사람들에게 내세울 정도로 한 때는 나의 삶의 원동력이었던 목표를 어느 순간 내가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엊그제 비가 많이 오던 저녁, 지도교수님의 방에서 같이 지도 받는 선배 선생님과 함께 공부를 하던 중 다른 선생님의 공부 시간을 틈타 문득 내 나이와 미래를 끄적여보게 되었다. 원래 나이를 좀처럼 계산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누가 나이를 물으면 빠른 88년생이라고 대답했다.) 최근 동네 친구가 "우리도 곧 40줄이다" 라고 한 말이 적잖은 충격이었던 것 같다. 네이버에서 나이 계산기를 켜서 생년을 입력하니 떠오른 숫자는 만 34세. 만으로 그렇지 보통 우리가 치는 나이로는 35살이고, 빠른 년생으로 학교를 입학해 내 친구들은 보통 나보다 한 두살 많았으니, 정말 30대의 후반부에 접어들었다는 말이 틀리지는 않은 것이었다. 

하고 싶은 건 많지만 하고 싶은 만큼만, 대강과 열심의 그 사이, 무엇이든 좋게 보는 대가리 꽃밭으로 살아가는 나이지만- 그래도 40살이라는 숫자가 눈 앞에 있다니. 나름 재미있게 한 단계씩 밟으며 살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크게 절박하거나 급박하지 않았는데. '40'이라는 숫자에 비추어 다시금 되돌아보니, 이대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2030 / 4050 우리가 세대를 분류할 때도 보통은 이 둘 사이를 가르지 않나. 요즈음에는 소외 '난 어른이지만 마음은 아이야' 하는 키덜트(?)들 또한 대세를 이루는 것 같지만, 난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40살이 되었 때 공자처럼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 세상 일에 흔들리지 않는 '불혹(不惑)'의 경지까지는 아니어도, 그 나이에 어울리는 어른이 되고 싶다.  

생각해보면 주위에 결혼을 하여 아이를 벌써 둘이나 키우고, 이미 초등학교에도 입학시킨 친구들이 있다. 그들이 평범하면서도 엄청난 유산을 세계에 남기고, 한 인간 존재를 온전히 책임지는 어른으로 나날이 성숙하고 있는 동안, 나는 무얼 하였나? 물론 나는 재미있게 공부했고, 의미있게 가르치고자 했고, 순간순간을 즐기고자 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살아온 길에 후회는 없다. 그러나- 아마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살아온다면, 나는 한 때 나의 꿈이나 목표로 삼았던 명제를 아예 잊어버리거나, 혹은 기억하기 때문에 평생 부족해하며, 아쉬워하며 살겠지. 그건 그거대로 싫었다. 

나는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고, 박사 졸업도 하지 못했고, 아이를 가지지도 않았다. 이 모든 것들이 꼭 40살 이전에 해야한다는 법은 없지만, 그래도 전보다 더 촉박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것들은 내 사적인 욕심에 해당하며 온전히 나에게 주어진 문제이니까 여차저차 서두르면 될 수도 있겠지. 그러나 이들을 해내가는 동시에 나는 다른 한 편에 자리잡은 나의 목표,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공교육의 부활'에 가까워질 수 있을까? 어쩌면 나의 이 양방향의 꿈들은 전혀 다른 방향일 수도, 아닐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분명히 어떻게 살든지 우리나라 공교육에 이로운 삶을 살려고 조금씩 노력하겠지만, 그 노력이 그래도 어느정도의 결실을 이루었으면 좋겠다. 이 점을 어떠한 방향으로 풀어갈 수 있을까. 어렵다. 나는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 대가리 꽃밭에 살더라도, 사회의 전반적 흐름이 한 개인의 성공에 의해 바뀔 수 있다고 믿는 낙관주의자는 아니니까. 



 다시 나이 얘기로 돌아오자면, 공자님의 30살이 이립, 모든 기초를 세우는 나이라고 하셨으나 나에게 30살은 겨우 세상일이라는 것에 눈을 뜬 시기에 불과하였다. 오히려 박사과정을 공부하는 지금에서야 내가 무언가 기초를 닦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전에도 물론 지식덩어리들이나 생각거리들, 고민거리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건 나란 한 사람의 기반이 될 만큼 탄탄히 쌓여있지는 못했던 것 같다. 30살까지 내가 계속 갈구했던 지식욕은 세상 모든 것에 대한 그럴듯한 정보에 의해서는 채워질 수 없었다는 것을(일명 지대넓얕 같은 것 말이다.), 그보다 나는 나의 말과 행동에 확실한 기반이 될 수 있는 무언가- 겉으로는 아주 소소하고 보잘것 없어 보이더라도 그 뿌리부터 나 자신인 무언가에 대한 것임을 박사공부를 하면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말하자면 지식욕에서의 지식은 단순히 세상에 대한 잡다한 정보가 아닌, 내가 확실한 앎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공자님의 나이 계산을 딱 그 시기가 아닌, 20대, 30대라고 치면- 나 또한 삼십대가 이립의 시기가 될 것이라 할 수도 있겠다. (나는 방년이 20대 후반이었던 것 같으니까.)

 기초를 세운 이후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 박사를 따고 나서는 뭘 하고 싶냐는 질문에, 나는 그냥 공부를 하고 싶어서 박사를 했기 때문에 우선 따고 봐야 알 것 같다는 대답을 많이 했었다. 지금도 그런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몇 가지 생각들은 종종 해본다. 박사과정 중 교육개발원에서 근무하시는 분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개발원의 보고서들의 퀄리티가 매우 높아 놀랐던 경험이 있다. 그래서 교육개발원에 들어가 연구를 하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었다. 물론 계속 연구하고 공부해서 대학 쪽 연구원으로 가는 생각도 해봤고, 해외 유학 생각도 막연히 하고 싶다- 할 때도 있다. 이런 목표들이 의미없다고는 할 수 는 없겠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그러한 소목표는 큰 목표의 '절차'일 때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내가 나의 목표가 분명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엘리트들만 모여있다는 기관에 들어가서도 나의 역할은 도구적이거나 소모적일 것이며 혹은 해외의 좋은 대학원을 다녔다 오더라도 어떤 큰 변화가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바쁘게 사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닐테고, 거기서도 나는 지금처럼 의미를 찾고 나 자신을 드러내며 재밌게 일할지도 모르지만- 그 삶들이 현재의 교사로서 사는 삶을 포기하고 갈 정도로 좋은 삶일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한 기관에 소속되어 그 직분 자체에 충실하며 사는 삶에 있어서 매년 새로운 아이들을 만나는 교사보다 만족스럽고 보람 찰 수 있는 삶이 어디있겠는가? 오히려 내가 뜻이 있어 그와 같은 연구원으로서의 나의 직무를 모종의 도구로서 삼거나 해외 유학을 새로운 지평으로 나아갈 기회로 삼지 않는다면, 그 길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것저것 돌아봤을 때 나는 연구원에 들어가든, 대학에 들어가든, 유학을 가든, 교사를 계속하든 간에 나 스스로 닦은 터를 바탕으로- 혹은 그 터를 닦는 와중에 배운 것을 정리해 보고 잠시 돌아볼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2018년에 썼던 브런치 글이 아무리 미숙하더라도 그 시기의 매력이 있는 것처럼- 30대만이 쓸 수 있는 글이 있지 않겠는가? 미숙함을 너무 부끄러워하지 말고 한 편씩 써나갈 필요가 있다. (그 전에 게으름을 먼저 극복해야겠지만-) 얼마전 '공부의 위로'의 저자가 해준 말처럼 말이다.


 이 글의 제목인 '실패한 레포트'는 대학원 박사과정 3년 동안, (그 중에 2년은 휴직을 통해 학업에 전념했었다.) 실패한 수 많은 레포트들에게 바치는 것이다. 나는 그 레포트들이 실패했지만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실패한 이유는, 글을 전개하는 논리가 부족하고 현장에 대한 경험이 짧고 생각이 단편적이기 때문이다. 실패하지 않은 이유는, 그 글을 쓰게 만든 나 자신의 질문, 질문에 담긴 나의 열정이나 세상에 대한 호기심, 애정이 매우 소중하기 때문이다. 내 지도교수님은 글을 매우 날카롭게 읽으시는 분이고, 또 한 줄이라도 저자의 생각이라고 할 수 없으면 바로 내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나는 (그 전까지는 전혀 하지 못했던 경험인데) 박사과정을 시작하고 1년 반 정도는 교수님께 피드백을 받고자 글을 가져가면 어떤 주제의 글도 한 문단 이상 넘어가지 못했다. 교수님은 첫 문장부터 걸고 넘어지셔서, 세 번째 문장이 넘어가기 이 전에 그 안에 담긴 나의 얄팍한 생각을 끄집어 내어 아주 짓밟아버리셨다. 초반 나의 박사 시절은 그래서 상처와 좌절로만 가득했던 기억이 난다. 2학년 중반인가 말 쯤이었나, 그 때서야 글쓰기에 겨우 걸음마를 뗏다는 얘기를 듣고 속으로 엄청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아직도 교수님의 기대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박사 논문은 자전거 정도는 혼자 타야 한단다.) 물론 학술적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쓰기의 정도가 곧 '스스로 생각한' 정도를 그대로 반영할 수 있다는 것을 겨우 알게 되었다. 

 그럼 약 2-3년 간, 한 문단만 읽히고 버려진 레포트들은 다 쓰레기들인가?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살짝 공부에 지친 지금, 옛날 레포트들을 보면 논리가 서툴고 말이 과대하게 포장되어 남의 생각 내 생각이 뒤엉켜 있어서 그렇지- 나 자신은 알고 있던 내가 하고 싶던 말, 그 때의 나이기에 할 수 있던 질문과 답들이 어설프게 꾸져져 담겨져 있는게 보인다. 정말 공부와 세상에 대한 순수한 열정으로 쓰여진 글들이었기에 형편없음에도 나에게만큼은 작게 반짝인다. 그 글들을 보면 불과 몇 년 사이에 시간이 지나면서 잊고 있던 것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나는 종종 이 브런치에 나의 '실패한 레포트'들을, 다른 사람의 말과 생각이 혼합되어 엉망진창인 레포트들을 나만의 말과 생각으로 정리하여 다시 써보고자 한다. 물론 아직도 나에게는 답이 없고, 아직도 나의 글 솜씨는 엉망이고 생각과 경험은 일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작업들이 전혀 의미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이립에서 불혹으로 나아가는 이 시기에 나의 실패한 레포트들이 나만의 방향성을 또 찾아줄 수 있지 않을까? 


 나이가 들수록 너무 바쁘고, 시간은 빨리 지나간다. 해야 할 것, 책임져야 할 것은 늘어만 가고- 어떤 측면에서는 전문성이나 지위 같은 것들이 높아져서 여유가 생기는 것 같다가도, 다른 측면에서는 새로운 것은 시작하기 두렵다는 생각도 든다. 해야 할 것 때문에 정말 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된다는 것이 실감나기도 한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하고싶은 것들을 꼭 해야겠다는 생각도 드는 것 같다. 

 정말 바쁘고 요즘은 또 빨리 지쳐서- 아마 이 브런치에는 내년 이 맘때에 들어올 수도 있을 것 같지만... 그래도 1년에 한 편이 어디냐 싶다. ^^ 요즘처럼 글 읽고 쓰기 어려운 이 시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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