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거리의 사람들

01화. 그날, 도시는 우리를 버렸다

by SW

​[작가 노트]
​여러분들은 1992년 4월 29일, 미국 LA 폭동 사건을 기억하시나요? 단순한 흑백 갈등으로 기록된 역사의 이면에는, 시스템으로부터 철저히 고립되었던 한인들과 소수자들의 ‘생존 투쟁’이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폭도였고, 누군가는 피해자였지만, 결국 불타는 거리 위에서 그들은 모두 ‘버려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 지워진 거리에서 서로를 지키려 했던 사람들의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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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4월 2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계절에 맞지 않게 더운 날이었다. 캘리포니아의 태양은 늘 공평하게 내리쬐지만, 그날의 열기는 유독 코리아타운의 아스팔트 위에서 끈적하게 머물렀다.
​“여보, 에어컨 소리가 좀 이상한데.”
​지현의 목소리에 준호는 사다리에서 내려왔다. 천장에 달린 낡은 에어컨은 찬바람 대신 미지근한 먼지 냄새만 뱉어내고 있었다. 준호는 셔츠 소매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쓴웃음을 지었다.
​“필터 갈 때가 됐나 보네. 내일 사람 부를게.”
“내일, 내일. 당신은 그놈의 내일 타령이지.”
​지현은 투덜거렸지만, 그녀의 손은 쉴 새 없이 계산대 옆의 껌 통을 정리하고 있었다. 평범한 오후였다. 가게 밖에서는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가 들렸고, 라디오에서는 흘러간 팝송이 지직거리는 잡음과 섞여 나오고 있었다.
​모든 것이 평소와 같았다. 적어도 오후 3시까지는 그랬다.
​가게 구석에 놓인 작은 TV에서 긴급 뉴스 시그널이 울린 건, 준호가 재고 상자를 창고로 옮기던 중이었다.


​[Breaking News: Rodney King Verdict]

(로드니킹 사건 판결)


​화면 속 앵커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영어에 능숙하지 않은 준호였지만, 화면 하단에 뜬 굵은 자막만큼은 읽을 수 있었다.
​NOT GUILTY (무죄).
​“...무죄라고? 저게?”
​준호가 중얼거렸다. 지현도 하던 일을 멈추고 화면을 응시했다. 화면 속 자료화면에서는 건장한 경찰관들이 무방비 상태의 흑인 남성을 곤봉으로 내리치는 영상이 반복되고 있었다. 누가 봐도 명백한 폭력이었다. 하지만 법원은 경찰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구나.”
​지현이 짧게 혀를 찼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건 저 바깥, 미국 주류 사회나 흑인 동네의 일이지 코리아타운의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그저 성실하게 세금 내고, 가게 문을 열고, 아이들을 키우면 되는 이방인들이었으니까.
​딸랑-.
​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가게 문이 열렸다. 역광 때문에 들어오는 사람의 실루엣이 길게 바닥에 드리워졌다. 동네에 사는 흑인 청년, 말릭이었다.
​평소라면 “안녕하세요, 미스터 박”하고 어눌한 한국어로 인사를 건넸을 녀석이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푹 눌러쓴 후드 아래로 보이는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말릭은 우유 한 통을 계산대에 내려놓았다. 동전 몇 개를 꺼내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말릭, 괜찮니? 안색이 안 좋아.”
​준호가 거스름돈을 건네며 물었다. 말릭은 돈을 받아 쥐고는 잠시 주저하듯 입술을 달싹였다.
​“...아저씨.”
“응?”
“오늘 문 일찍 닫아요.”
​말릭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해가 지기 전에 들어가세요. 오늘은... 공기가 달라요.”
​말릭은 그 말을 남기고 도망치듯 가게를 빠져나갔다. 닫힌 문 너머로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준호는 알 수 없는 한기를 느꼈다. 에어컨은 여전히 미지근한 바람을 뱉고 있었는데도.
​균열은 소리 없이 시작되어, 굉음과 함께 터져 나왔다.
​오후 5시가 넘어가자 거리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멀리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오기 시작했다. 고함, 경적 소리, 그리고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
​쨍그랑-!
​건너편 주류 판매점의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신호탄이었다.
​“꺄악!”
​지현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준호는 반사적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거리 끝에서부터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분노한 군중들이 도로를 점거한 채 이쪽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팻말 대신 몽둥이와 화염병이 들려 있었다.
​“여보! 경찰! 경찰에 신고해!”
​준호가 소리쳤다. 지현은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곧 창백해졌다.
​“통화 중이야... 계속 통화 중이라고!”
​그때였다. 붉은색과 푸른색이 섞인 강렬한 불빛이 가게 안을 훑고 지나갔다. 경찰차였다.
​“왔어! 경찰이 왔다고!”
​준호는 안도하며 문 쪽으로 뛰어갔다. 유리창 너머로 LAPD의 순찰차 여러 대가 줄지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준호는 손을 흔들었다. 여기 사람이 있다고, 도와달라고.
​하지만 경찰차들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위이잉- 위이잉-
​사이렌 소리는 코리아타운을 비웃듯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경찰차들은 폭도들에게 둘러싸인 한인 상점들을 그대로 지나쳐, 저 멀리 부유한 백인 거주지인 ‘베벌리힐스’ 방향으로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준호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뇌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경찰이, 시민을 보호해야 할 공권력이, 우리를 보고도 그냥 지나갔다. 그들의 목적지는 우리가 아니었다.
​“...버렸어.”
​준호의 입에서 쉰 소리가 새어 나왔다.
​“우리를 버리고 갔어.”
​멀리서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건너편 세탁소 간판에 불길이 치솟았다. 붉은 화염이 1992년의 LA 하늘을 찢을 듯이 타올랐다. 매캐한 연기가 가게 문틈으로 스며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제야 준호는 말릭의 말을 이해했다. 오늘은 공기가 다르다던 그 말을.
이곳은 이제 법도, 질서도 없는 고립된 섬이었다.
​준호는 떨리는 손으로 셔터 손잡이를 잡았다.
​“지현아, 셔터 내려! 당장!!”
​녹슨 철제 셔터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셔터가 완전히 닫히기 직전, 틈새로 보인 것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가게를 노려보며 달려오는 누군가의 형상이었다.
​암흑이 찾아왔다.
가게 안에는 거친 숨소리만이 남았다.
​전쟁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다음 화에 계속)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한 소설 <불타는 거리의 사람들> 배경입니다.

​1. 시공간적 배경
​시기: 1992년 4월 29일(폭동 발발) ~ 1992년 6월 초(초기 복구 및 일상 복귀).
​장소: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코리아타운.
​특히 사우스 센트럴(흑인 거주지)과 베벌리힐스(백인 부촌) 사이에 끼어 있는 샌드위치 지역’으로서의 지리적 특징
​2. 사회적 상황 (The Context)
​트리거 (Trigger): 흑인 로드니 킹을 집단 구타한 백인 경관들에게 ‘무죄(Not Guilty)’ 판결이 내려짐.
​고립된 섬: 분노한 시위대가 거리로 쏟아져 나오자, LAPD(경찰)는 부유한 백인 거주지(베벌리힐스, 웨스트우드)로 향하는 길목을 차단함. 결과적으로 시위대의 분노가 한인타운으로 쏠리게 되는 ‘방치된 구조’ 형성.
​언론의 프레임: 주류 언론은 시스템의 문제(인종차별, 빈부격차)를 다루기보다, 자극적인 ‘흑인 vs 한인’의 갈등 구도만을 집중적으로 보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