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마음이 되었는가?
14화.
자아 _ 마음이 나를 부르는 방식
자아는 실체가 아니다.
자아는 호출이다.
마음이 자기 자신을 지칭할 수밖에 없을 때, 말 없는 언어로 부르는 이름이 바로 ‘나’다. 마음은 흐르고, 감정은 출렁이며, 기억은 흩어지지만, 그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중심을 세워야 할 때, 우리는 그것을 자아라 부른다.
자아는 본질이 아니라 구심이다.
흩어진 감정과 산란한 기억의 조각들, 쏟아지는 사고의 무늬들이 마음의 장 안에서 응축되어 “이것이 나다”라고 지칭하는 순간, 하나의 중심점이 생겨난다.
그러나 그 중심은 단단하지 않다. 오히려 불안정하고, 평형 위에 아슬하게 선 환영일 수도 있다.
우리는 자아를 곧 ‘나 자신’이라 믿지만, 그 자아는 타인의 언어와 사회의 요구로부터 형성된다.
“너는 이런 아이야.”
“너답지 않아.”
그 말들은 내가 나를 이해하는 방식의 가장 깊은 층으로 스며든다. 누군가가 규정한 나를 내가 스스로 받아들이는 순간, 자아는 생성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자아는 내 안에 머물지만, 동시에 타인의 시선으로 살아간다.
자아는 나를 지키는 방어막이자, 내가 벗어나기 힘든 틀이다. 그것은 감정의 격랑을 버티기 위해 마음이 쌓아 올린 둑이기도 하고, 고통의 파동으로부터 나를 가두는 철창이기도 하다.
한때 나는 나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고 믿었다. 모든 선택의 기준이 나였고, 모든 판단이 내 중심에서 비롯된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감당할 수 없는 상실이 찾아왔을 때, 그 믿음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내가 믿어온 나, 내가 사랑해 온 나의 방식이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깨닫는 순간, ‘나’라는 이름은 그 어떤 언어보다 공허하게 울렸다.
자아는 그렇게 쉽게 깨어진다. 오랫동안 붙잡아온 정체성이라는 허상이 무너지는 그 순간, 우리는 비로소 자아의 실체가 아닌 자아의 ‘구조’를 바라보게 된다. 자아는 완결된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되고 다시 쓰이는 의식의 틀이다.
자아는 작품 위에 남긴 서명과도 같다.
감정의 붓질이 지나가고, 기억이 배경의 질감을 이루며, 사고가 구조를 세워 마음이라는 캔버스 위에 삶의 그림이 완성될 때, 우리는 마지막으로 그 끝자락에 이름을 새긴다. 그것이 ‘나’다. 그러나 그 서명은 언제든 흐려질 수 있고, 덧칠되거나,
내가 스스로 지우고 다시 쓸 수도 있다. 자아는 고정된 인장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마음이 나를 바라보는 방식, 그날의 필체이다. 어떤 날은 또박또박, 어떤 날은 떨리는 손끝으로, 또 어떤 날은 아예 비워둔 채로. 자아는 그렇게 날마다 새로이 기록되고, 그 다름이 곧 내가 살아 있음을 증명한다.
많은 이들이 자아를 하나의 이상적 완성, 즉 자아실현의 목표로 여긴다. 그러나 나는 그 길이 우리를 오히려 더 부족한 존재로 남기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완벽한 자아를 좇는 동안 우리는 위로받지 못한 내면의 아이를 외면하고, 사회 속에서 만들어진 가면적 자아를 스스로 부정한다. 그러나 상처 입은 내면의 아이, 시행착오 속에서 흔들린 서툰 자아, 관계 때문에 선택한 가면적 자아까지도 지금의 나를 이루는 밑거름이다.
자아는 단일한 이상이 아니라, 수많은 얼굴과 경험이 겹겹이 쌓인 누적의 무늬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다양한 자아를 내치기보다, 모두 품어야 한다. 부족한 자아조차 사랑으로 껴안을 때, 자아는 비로소 단단해진다. 너무 먼 이상을 좇기보다, 매일의 삶 속에서 자아가 그려내는 다양한 선과 그림자를 바라보는 일.
그 속의 지문과 상처의 결들이야말로 살아 있는 자아의 가장 진실한 형식이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반 아이들 앞에서 발표하다 말을 더듬고 얼굴이 붉어진 기억이 있다. 그때의 비웃음과 초라함은 오랫동안 내 안에 각인되었다. 그 후로 나는 발표 전마다 불안했고, ‘나는 말을 잘 못하는 사람’이라는 믿음이 내 자아를 규정했다.
우리는 그렇게 사소한 한 장면으로도 자신을 가두곤 한다. 자아는 사건이 아니라, 사건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굴절 방식이다.
그 기억은 시간이 지나며 뜻밖의 방식으로 다시 쓰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강의를 하던 어느 날, 나는 또렷한 발음과 단단한 목소리로 청중을 이끌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어린 시절의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믿기지 않았지만, 그 낯섦은 곧 하나의 자각으로 이어졌다.
자아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선택과 경험에 따라 재구성되는 구조라는 사실. 나는 과거의 나에 머물지 않았고, 새로운 서명을 내 마음 위에 써 내려가고 있었다.
자아는 감정의 거울이다.
슬픔 속에서 나는 나를 더 깊이 자각하고, 분노 속에서 나는 내 존재를 밀어붙인다. 감정은 자아의 뿌리를 흔들고, 동시에 단단하게 만든다. 사고는 자아를 설명하려 하지만, 자아는 사고보다 더 불완전하고 모순적이다.
자아는 내가 되고자 했던 나, 될 수 없었던 나, 결코 되고 싶지 않았던 나까지 모두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아는 단 하나의 얼굴이 아니라, 다중의 표정을 가진 거울이다.
그 거울 속에서 나는 날마다 새로운 나를 바라본다. 같은 표정이지만 다른 결로, 같은 이름이지만 다른 무게로. 자아는 고정되지 않는다. 바뀌고, 흔들리고, 성장한다.
누군가의 따뜻한 말 한 줄,
뜻밖의 경험 하나,
혹은 내면의 조용한 통찰 하나가 자아의 틀을 다시 짓는다.
자아는 그렇게 부서지고, 다시 태어나며, 결국 내가 나에게 걸어온 말들로 구성된 존재의 서사다.
자아란 무엇인가?
그것은 마음이 나를 부르는 수많은 방식들 중, 내가 오늘 선택한 한 줄기의 언어다.
단 하나의 이름이 아니라,
오늘의 마음이 나를 부르는 그 부름.
그리고 나는 매 순간,
그 부름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지를 바라보며
나 자신을 증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