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가 춤을 춘다

by 여록

다혈질인 언니는 나보다 4살이 많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다르다.

성격, 외모, 취미, 밥먹는 속도까지.

언니의 말을 빌면

나는 자꾸만 밖으로 나가서 변화를 꾀하려고 세계여행을 하고

언니는 집 안을 새단장하며 변화를 추구한다고 한다.

내가 수 십 번의 세계여행을 하는 동안

언니는 열 번도 넘는 이사를 했다,

어쩌다 내 아파트에 와도 가구의 배치를 바꿔봐라, 커튼 색깔을 이것으로 하라, 화분을 들여 놓지 그러느냐.. 뭐 쉼없는 인테리어 코치를 한다.

나는 집에서는 편히 쉬거나 잠만 자면 되기 때문에 거추장스럽게 짐이 늘어나는 걸 원치 않으며 청소도 생각날 때만 가끔 할 뿐이다. 나처럼 더럽게 사는 사람은 보기 드물다며 잔소리를 해대는 언니.


그런 언니지만 나의 성장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기도 하다

어쩌면 사춘기에는 부모님보다도 더 큰 감흥을 주었을 수도 있다.

지지리도 가난하여 교과서조차 언니, 오빠가 보던 걸 물려 받아야 했다.

참고서조차 사 볼 수 없었던 나에게 언니는 몇 년 동안의 용돈을 모아 고전소설 5권을 사왔다.

부활, 인형의 집, 폭풍의 언덕,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테스.

그때가 내 나이 14살이었을 것이다. 언니가 사 온 책이 신기하여 밤을 새서 책을 읽었고, 그 중 폭풍의 언덕은 사춘기 가슴에 뜨거운 회오리 바람을 일으킬 정도로 격렬하게 다가왔다.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미친 사랑을 이해 할 수 없었으나 가슴으로는 요동이 쳤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직장을 얻어 나가던 언니는

언니의 고등학교 졸업식과 나의 중학교 졸업식이 함께 있던 날,

영화 사관과 신사를 보여 주었다,

미성년자 관람불가였지만 언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훌륭한 예술을 감상함에 있어 나이는 고려할 사항이 아닌 듯 했다.

아니 어쩌면 사춘기이기때문에 더 많은 작품들을 감상하길 원했는지도 모른다.

언니는 자신이 결핍으로 느꼈던 문화적 감성들을 내가 다 누리길 바랬던 것 같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언니는 용산의 한 건설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언니를 만나러 서울까지 3시간 30분 동안 직행버스를 타고 올라가는 게 방학 때마다의 즐거움이었다. 언니는 용산터미널까지 마중을 나와 주었고,

촌닭인 나를 데리고 신세계 백화점, 미도파 백화점, 명동 등 도심 번화가 구경시켜 주곤 했다.

언니가 서울에 와서 처음 먹어 본 맛있는 것들을 먹이고 싶어 했고,

백화점의 브랜드들을 줄줄 외며 내가 소위 명품이라 불리는 것들에 대한 지식도 갖길 원했다.


나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가서 여러 직장을 전전했다.

사투리도 고치지 못한 내가 서울에서 정착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언니는 다시 자신의 거래처에 나를 소개했고 나도 중소기업 규모의 건설회사에서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언니는 게으르고 청결하지 못한 나를 데리고 살면서 고생을 많이 했다.

밖으로 돌길 좋아하는 나는 밤 늦게까지 술집과 나이트클럽을 전전했고 거의 밤을 새다시피한 시간에 귀가를 하면 몸에 멍이 들 정도로 두들겨 패기도 했다.

언니의 20대는 방황이 없었기 때문에 도대체 이유도 없이 방황을 해대는 나를 보는 게 한심스럽기만 했을 것이다.


언니는 28살에 결혼을 했고, 예쁜 딸도 낳았다.

결혼을 하고도 몇 년 동안 나를 데리고 살았다.

부천의 11평 아파트에서 언니부부와 조카, 그리고 나까지 부대끼며 살고 있었으니 가족들에게 내가 얼마나 눈의 가시였겠는가. 그럼에도 언니는 불평없이 나를 챙겼다. 집을 뛰쳐 나간 건 이번에도 나였다.

언니가 소개해 준 안정적인 직장을 무료하다는 이유로 때려 치우고 공장, 보험회사, 식당 등을 전전하며 다시 불안정한 생활을 했다. 스물 다섯이나 되었지만 스무살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내가 20대에 방황을 했다면

언니의 방황은 30대에 시작을 했다.

나는 오히려 30대에 공부를 시작해 공부에 올인한 상태라서 언니에 대한 기억의 공백이 있다.

언니는 조카가 유치원에 다닐 때 이혼을 했다.

남편의 무능함을 견딜 수 없었던 것 같다.

언니의 이혼 조건은 딱 하나였다.

딸의 양육권을 달라는 것.

남편으로부터 1원의 위자료도 받지 않고

산업 전선에 뛰어든 언니는 그 어느 때보다도 투사와 같았다.


딸을 시골의 부모님댁에 맡겨 놓고

직장에서 승승장구를 했다.

어떤 경로에서인지 부동산에도 눈을 떠 서울과 경기도의 남부와 북부를 오가는 이사를 하며 아파트를 두 채까지 만들기도 했다.

딸이 서울의 대학교에 합격할 때까지가 언니의 전성기였던 듯 하다.

언니는 갑상선암과 임파선암으로 두 번의 암수술을 했고,

이후로는 자신을 비하하는 말을 자주 했다.


과거 어떤 날의 전화가 기억난다.

언니는 전화를 하면 다혈질의 성격답게 내가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인지는 고려하지 않은 채 다짜고짜 황당한 말부터 쏟아내곤 했다.

-여록아, 나 지금 7층에서 뛰어 내리려고 해. 어떤 나쁜 새끼와 같이 있는데 내가 연락이 안되거든 신고해 줘.

-뭐라구? 도대체 무슨 소리야?

답변도 듣기 전에 전화는 툭 끊겼다. 몇 시간 거리에서 살고 있던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계속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수 십번을 걸어도 신호만 갈 뿐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정말 뛰어 내린 걸까?'

몇 시간이 흐른 후에야 전화를 받은 언니는 너무나도 태연했다.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리고 이후로는 그 사건에 대해 입도 뻥긋 말라며 성질부터 냈다.


언니의 성격은 갈수록 괴팍해져 갔다.

화도 잘 내고,

전화를 걸어 몇 십 분 동안 제 할 말만 하고,

내가 아무리 전화하지 말라고 사정을 해도 저 내키는 대로 할 뿐이었다.


함께 여행을 하도 대화의 결이나 성격, 하물며 먹는 것조차 맞지 않아 공항에서 대판 싸우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라는 엄포까지 놓고 헤어진 적도 있다.

그래도 몇 달이 지나면 다시 우리는 예전과 같았고,

또 다시 언니와 유럽으로, 캐나다로, 다낭으로 여행을 다녔다.


불안했던 언니의 삶은 작년부터 바뀌기 시작했다.

언니가 회사를 다니며 베란다에 꽃을 키웠는데 그걸 무척이나 재미있어 했다.

조카가 곧 결혼을 한다.

조카의 결혼은 언니의 도시에서의 고립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제 그만 내려와 나랑 살자.

집을 새로 짓고 언니가 원하는 꽃도 실컷 키울 수 있도록 정원을 크게 만들거야.

언니와 함께 했던 속초여행

집을 짓고 함께 생활하는 1년 동안은 나에게 지옥과도 같았다.

20년도 넘게 떨어져 살다가,

그리고 온전히 독립적인 주체가 된 내가 언니와 맞추며 살아가는 게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우리는 매일 싸웠고,

언니의 고함소리에 내 심장이 크게 뛰곤 했다.

직장에서의 스트레스와 내가 주도적으로 진행하던 프로젝트의 지분도 있겠지만 언니와의 갈등으로 인해 공황증세가 나타나고 우울증도 오기 시작했다.

언니는 엄마와도 갈등이 심했는데 두 사람의 갈등으로 내 심장은 터져 버릴 것 같았고, 매일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집을 짓지 말 걸.. 다시 혼자 사는 삶을 택할까?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떠날 생각만 들었다.


하지만 시간은 중재자가 되었다.

그동안 서로 너무나도 다른 삶을 살았기에 우리는 10대 때의 우애있는 자매가 되기 힘들었다.

공동생활이 익숙해지고 집도 자리를 잡고

무엇보다도 정원의 꽃과 나무가 쑥쑥 자라면서 언니의 행복감이 높아져 갔다.


오늘 아침 산책은

뒷동산으로 갔다.

산길을 내려오면서 언니가 춤을 춘다.

춤추는 언니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언니의 괴팍함은 삶의 고달픔으로부터 연유했던 것이었구나.

어제도 바닷가를 다녀 오며 차안에서 몸을 들썩들썩 춤을 추더니..

부쩍 요즘 '행복하다'라는 말을 자주 하는 언니.

50년 넘게 살아오면서 언니에게서 행복하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요즘 밖에 없는 것 같다.

집을 짓고 함께 살길 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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