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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 나 Aug 07. 2024

키오스크 시대의 사랑


굳이 이야기할 필요는 없지만, 난 굉장히 전형적인 일상을 보내는 사람이다. 그런 나에게 주말은 미룬 집안일을 하고, 약속이 있으면 나가거나 해 먹고 싶은 음식을 해 먹고, 다음 주를 준비하는 정말 일정한 루틴이 있는, 그런 시간일 뿐이다. 그런 나에게 새삼스러운 주말 일정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 아무래도 최근 한 소개팅들이 있을 것 같다.


애석하게도 난 소개팅 시장에서 유리한 조건은 아니었다. 나의 모든 조건은 선호되는 조건이 아니었고 비선호를 이길 만큼 내가 즉각적인 매력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쓸데없이 공부만 많이 한, 그저 그런 외양의 비정규직 여성을 조건만으로 원하는 경우는 분하게도 그 의도를 의심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다른 불행은 난 지독하게도 추상적인 취향을 가진 사람이라는 점이다. 나의 이상형은 다음과 같다. 담배를 안 피우고, 선하며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 다름도 존중하며 대화할 준비가 된 사람. 이런 이상형은 조건과 조건이 만나는 소개팅 자리에서는 하등 의미가 없는 기준이었다. 자만추와 인만추를 굳이 나누자면 순도 100의 자만추였던 나는 소개팅으로 사람을 만날 거라는 큰 기대가 없었다. 이 말은 소개팅 자리에서 만날 상대의 조건을 고민해 본 적이 없다는 말이다.


소개팅은 뭐랄까.. 비유하자면 키오스크에 주문을 입력하는 것과 같은 행위이다. 메뉴, 추가할 토핑, 세트인가 단품인가와 같이 원하는 명확한 주문이 있고, 사이드로 무엇을 추가할 것인가, 이걸 내가 무엇으로 결제할 것인가. 이 모든 것을 인격 없이도 주선자에게 명확히 전달할 수 있으면 성공적인 것이다. 그리고 난 이런 키오스크 앞에서 주문을 망설이는 존재와 같다.


“저는요, 어.. 햄버거 번이 뭐든, 패티가 뭐든 상관없다니까요. 그냥 적당한 온기를 가진 햄버거면 된다고요!"


추상적인 나의 이상형이 어떤 가능성으로 다가갔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이상형이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만은 명확한 것 같다. 내가 가진 현실적 조건과 유사한 조건이라는 것 외에는 전혀 대화가 되지 않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제안받고 있기 때문이다. 적당한 온기를 가진 햄버거를 주문했는데, 번이 뭐든, 패티가 뭐든 상관없다는 말만 주방에 들어가서 재료들만 덜렁 나오거나, (운이 좋으면) 건강에 무지 좋다는 샌드위치가 나온 기분이랄까…


아닌가, 나와 매칭되는 그들이 차은우처럼 생겼다면 내가 이런 생각을 안 했을까? 최고급 소고기 패티가 나왔으면 나머지가 부실해도 스테이크로라도 먹을 수 있으니 말이다. (인간을 햄버거 속 재료로 비유하다니… 너무 무례한 거 같네요. 차은우 씨, 미안합니다.) 생각해 보면 내가 번이든 패티든 그 종류가 상관없다고 했으니 주선자 입장에서도 누구를 소개해 주어야 하는지 모호한 것은 당연한 게 아닐까? 아니 그냥 애초에 난 햄버거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 아닐까? 몸에는 좋지만 햄버거보다는 맛이 없는 샌드위치가 사실 내 몫의 식사인 건 아니었을까? 소개팅 제안을 거절하던 어느 금요일, 그냥 이런 생각이 들어 조금은 맥이 풀렸다.


매번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하는 소개팅이 크게 아쉬운 것은 아니었다. 그냥 한번 연애를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것일 뿐. 사실 연애를 하지 않아도 그간 난 혼자서 행복했고 앞으로도 날 행복하게 만들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사랑의 조건이 유형화되는 현실은 껄끄럽다. 내 사랑의 형태는 그와 맞지 않아서, 내 세상에서 낭만의 보금자리가 없어지는 것만 같아서 그게 조금은 막막하다.


키오스크에 입력될 나는 얼마 정도의 사람일까. 90년대생. 인문대 박사 수료에 강사 재직. 교육자 가정. 그저 그런 얼굴과 작은 키. 이 모든 조건은 지나온 시간 동안 내가 꾸었던 꿈, 내가 세상을 향해 가지는 태도 가운데 아주 일부만을 설명해 줄 수 있을 텐데. 난 초여름 해지는 풍경과 그 속에 불어오는 바람을 좋아한다. 주말 아침에 다음 주 먹을 도시락 반찬들을 다 만들어 두고 거기서 행복을 느낀다. 세상의 선을 지켜내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정함의 힘을 힘껏 믿는다. 함께 발전할 상대보다 서로의 안식이 되는 상대를 원한다. 그렇지만 몇 가지 정보로 압축된 키오스크 상의 나를 택하지 않는다면, 이 모든 건 나눠볼 기회조차 없다. 아니 선택하더라도 내가 이걸 전달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ㅇㅇ아, 자격지심이 없는 사람을 만나려면 그냥 차라리 키 크고 잘생긴 남자를 좋아한다고 해.. 경험상 그런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열등감은 적더라. 너와 성실성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을 원한다면 몸이 좋은 남자를 소개해달라고 해. 운동을 열심히 한다는 건 그래도 성실하고 건강하다는 거니까. 네가 당장 그걸 원치 않더라도 일단 그렇게 말해봐. 혹시 모르잖아. 조건은 명확해야 해. ” 내 소개팅 일화를 듣던 친구는 키오스크에 어떤 버튼을 클릭해야 하는지 우회경로를 알려줬다. 갓 튀긴 감자튀김을 먹으려면, 소금 뿌리지 말아 달라는 요청을 넣으라는 트위터 발 꿀팁 같은 조언이었다. 이게 맞나…?  난 여전히 확신이 없다.


사랑을 믿어보지만, 키오스크식 사랑은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 눈치가 보인다. 외적인 것으로는 규정할 수 없는 내 사랑의 조건들이 이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같아서, 진정으로 원치 않는 여러 조건들을 사랑을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만들어내는 게 거북하게만 느껴진다.


내가 성취한 것들이 나보다 중요해진 곳에서 어떻게 사랑을 구하는지 난 알다가도 모르겠다. 나의 졸업 예정 일자와 취업 계획은 궁금해하면서도 정작 나의 전공은 궁금해하지 않는 사람과의 사랑은 자신이 없다. 상대가 이룬 것보다 상대가 바라보는 세상이 궁금한 나는 그냥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 된 것 같다. 난 어떤 주문을 넣어야 하는 것일까. 정말로 모르겠다.


철없게도 낭만적인 나의 사랑은 아무래도 이 연애 시장에 적합하지 않다. 키오스크 앞에서 주문을 망설이는 내가, 입력되지 못할 눈치 없이 모호하고 서툰 사랑의 조건이 요즘 나의 우스운 주말 광경 가운데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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