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직을 하고 가장 먼저 사라진 건 이명이었다. 아니, 선후관계를 정확히 따져보자면 알아채지 못한 사이 긴장이나 스트레스가 이명보다 먼저 사라졌을 것이고 뒤늦게 생활이 편안해진 내가 일상을 짓누르던 무언가가 사라졌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순서야 어찌 됐든 결국 이명은 사라졌다. 퇴사를 염두에 두고 마지막 카드로 결정한 휴직이었기에 가계 경제에 대한 은근한 불안감과 미래에 대한 중압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들은 회사를 다니면서 느꼈던 압박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듯했다. 시간적, 심적 여유가 많은 걱정에서 나를 구했다. 이명이 들리지 않으니 일상이 한결 편해졌다. 길을 걷다가 갑자기 멈춰서는 일이나 인상을 쓰는 일도 줄었고, 짜증스럽게 잠깐을 외치는 일은 아예 없어졌다. 정해진 루틴에 맞추어 따박따박 출근을 하고 때 되면 퇴근을 하는 규칙적인 생활보다 어떤 하루가 펼쳐질지 모르는 의외의 날들이 훨씬 안정적으로 느껴졌다. 이 맛에 한량을 하는구나. 자의적 백수가 된 나는 TV 프로그램 '라디오스타'에 소개된 적 있는 희극인 김신영 님의 고모부가 떠올랐다. 그분을 내 롤모델로 삼으면 어떨까. 풀피리라도 연습을 해보면 어떨까.
물론, 생각만 그렇게 했을 뿐 자주 앞으로의 일들에 골몰했다. 그러면서 나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도 계속 고민했다. 나는 몸을 쓰는 것을 좋아하고, 책 읽고 글 쓰는 것을 좋아하고, 도심에 있으면 지치고 자연에서 유유자적할 때 에너지를 얻으며, 한 곳에 메어있는 것은 참지 못하고... 그렇다면 나에게 맞는 길은.. 목수인가? 나무를 베고 저녁엔 난로 앞에서 책을? ... 평소에도 그렇듯 현실적인 생각은 잘 하지 않아서 쉽게 답을 내릴 수는 없었지만, 여하튼 오랜만에 찾아온 무계획과 무작정이 좋았다. 나는 모르는 내일과 모레가 마음대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흰 도화지처럼 느껴졌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을 따라 그린 앞장들은 다 찢어냈으니, 이제 오래도록 꿈꿔 온 나만의 그림을 그려도 될 것 같았다. 어쩌면 아무것도 그리지 않고 오래도록 내두어도 괜찮겠고.
그런 생각을 하며 집어 든 책이 바로 김영하 작가가 쓴 여행 에세이 '오래 준비해온 대답'이었다. 사실 개정판이 나오자마자 사서 읽었기 때문에 1회 차 완독을 한 건 꽤 오래 전의 일인데, 막상 읽을 책을 고르려고 하니 휴직을 한답시고 읽으려 사모은 새 책들 사이에서 형형히 빛나는 이 책을 도저히 모른 체 할 수가 없었다. 신화와 역사, 철학, 글과 사진으로 선명히 담긴 시칠리아의 모습으로 워낙 다채로운 읽을거리가 담긴 책이긴 했지만 아무리 고민해 봐도 그중에 내가 이 책을 다시 집어 든 이유라 콕 집어 말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보고 싶어 사둔 책이 그토록 많으면서, 나는 왜 하필 이 책에 끌렸을까? 공기가 차갑게 바뀌어 가는 이 계절에, 시칠리아의 뙤약볕을 담은 책을 왜? 신화나 역사에 관심이 많은 것도 아니고, 여행 에세이를 좋아하는 편도 아니면서 도대체 왜?
답은 책의 첫 부분을 읽어 내려가며 바로 알 수 있었다. 안정적인 매일을 뒤로하고 의외의 날들로 떠난 자의 사유. 내가 원하는 건 바로 그거였다. 여행을 떠나기 전 그는 서울에 여러 가지를 버려둔 채 알지 못하는 나날들을 향해 나아간다. 시칠리아 여행은 아마 그런 날들로의 도약을 위한 발구름판 정도라고 보면 될까. 정착자로서의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 그는 여행지에서 바다를 마주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여유와 돌 산 가운데 서서 자신을 지켜야 했던 자들의 견고함을 수없이 마주하며 느릿하게 여행한다. 하루만 묵으려고 했던 곳에서 사흘을 내리 지내기도 하고, 버스로 4시간이 걸릴 거리를 기차를 타고 10시간을 넘게 달려 도착하기도 하면서 그가 얻은 것은 잃어버렸던 자신이다. 글의 마지막 즈음,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기에 어느 것에도 골똘히 생각할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는 그의 말이 내 뒤통수를 맞췄다. 멈춰 서고 나서야 잃은 것이 보인다니, 나는 정말 '인간적'이구나, 싶기도 했다.
친구 J가 보내온 시칠리아 여행 사진.
두 번의 경험 중 재독이 훨씬 좋았던 이유도 내가 의외의 여유 안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이야기하는 시칠리아는 정신없이 빠르게 달리는 와중에 한 가닥 여유를 찾기 위해 읽는 것보다 어느 정도 내가 쥔 것을 놓을 각오를 하고 아무것도 아닌 날, 내일 일은 될 대로 되라고 생각하며 내버린 휴가를 맞아 읽어야 훨씬 맛깔난다. 그런 날이라면 날씨야 어떻든 전혀 상관이 없다. 나는 추워지는 계절에 유튜브로 '벽난로 타는 소리 10시간, 4K' 같은 것을 틀어놓고도 타들어가는 더위를 말하는 그를 이해하며 읽었다. 어느 날 무작정 휴가를 내고 싶은 당신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