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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기 Aug 04. 2019

마음의 기울기

균형에 대하여

참 이상하게도, 내 기분만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보통 때의 마음이 어두운 쪽으로 기운다. 무력했던 순간들이 시도 때도 없이 떠올라 주먹이 불끈 쥐어지는 것이다. 나를 함부로 대한 사람들도 밉지만, 가장 떠올리기 싫은 것은 무례했던 나 자신이다.


웃긴 말들을 억지로 떠올려 마음속에 즐거운 바람을 들여본다. “어떤 호두가 손잡이를 이렇게 설치했을까요?” 싱크대 도장을 하는 아저씨가 블로그에 쓴 말. “대가리 속이 자갈밭이냐.” 사회면 뉴스 기사의 댓글에서 본 말. “당장 뜨개질이라도 시작하란 말이야, 종이학이라도 접어야 할걸.” 곧 생일인 그가 내 통장 사정을 알고 한 말이다. 우리는 말장난을 좋아해서, 둘 중에 한 명이 “그렇곤 하지.”라고 말하면 얼른 “Broken hearted!”하고 응수한다.


마음보다 몸을 힘들게 해보자 싶어 오랫동안 걸었다. 밤마다 변기를 부여잡고 토를 하는 일로 스스로를 괴롭힌지 다시 일주일이 되었기 때문에, 러닝 앱이 두 시간이 경과되었다고 말해줄 때까지 걸을 작정이었다. 돌아오려면 네 시간은 걸릴 것이다. ‘또 토하면 두 배로 걷는 거야.’ 퉁퉁 부은 얼굴을 하고 스스로에게 벌을 주러 집을 나섰다.


잔뜩 찌푸린 날씨라 강이 한산했다. 물을 잔뜩 머금은 나무들이 싱그러운 향을 가득 뿜어냈고,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는 좋지 않은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사람이 지나가면 숨을 참았다.



자다 일어난 머리처럼 한쪽으로 쏠린 나무들을 지나 삼십 분을 걷자 등이 굽은 인어 동상이 보였고, 한 시간이 지나자 괴물 조형이 보였다. 어둑하고 습한 공기 속에서 사람들은 이곳저곳 놓인 그물 해먹에 몸을 내려놓고 있었다. 자전거 도로엔 허리가 자전거 안장만큼 가느다란 사람들이 휙휙 지나갔다. 길이 좁아지자 구릿빛 삼총사가 경비대처럼 발을 맞추어 뛰어갔다. 젊은 남자들은 하나 같이 검은색 민소매 티셔츠에 검은색 반바지를 입고 뛴다. 물론 나도 검은색 옷을 입고 나왔다. 구릿빛 삼총사가 저 멀리 뛰어갔다가 돌아올 때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때에 삼총사를 따라 돌아가야 했으나 두 시간을 꼭 채우고 싶어서 더 걷기로 했다.


한 시간 반이 지날 때 즈음엔 한강철교를 지나 동작대교의 불빛이 보였다. 멀리 오긴 했구나. 온통 거미줄인 다리 밑을 정신없이 헤집고 가다 보니, 이어폰에서는 왠 슬픈 이별 노래가 흘러나왔다. ‘톡톡 떨어지는 빗방울 그 사이로, 하나둘 지나가는 사람들 그 사이로, 그대는 지나가고, 내 맘은 지워가고, 신발은 젖어가고, 내 볼도 젖어가고...” 아. 두발이 저려오고, 종아리가 당겨오고... 내 덩치면 발이 245 정도는 되어야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때 즈음, 두 시간이 되었다는 안내말이 들렸다. 돌아가는 내내 짧은 비가 내렸다가 그쳤다. 너무나 반갑고, 시원하고, 기억에 남을 비. 나는 앞으로 비가 내리는 날 걷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할 것이다.



골고루 비를 맞는 강물은 살짝 굳은 팥죽의 표면 같이 뭉근해 보였다. 조용하고 넓은 강변, 군데군데에서 불쑥 나타나 달리는 청년들, 앉지 못하는 의자와 들어가지 못하는 상점들, 오랫동안 가만히 앉아 낚시를 하는 사람들. 접속자 수가 적은 시간대의 게임 속 같은 풍경이 신선했다. 무표정한 나는 유저일까 NPC일까. 내 삶의 주인공이 되려면 하기 싫은 일을 익숙하게 해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사실 타인에게 애정을 쏟는 것만큼 마음이 밝아지는 것이 없다.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과 좋아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쓰는 일이 균형이 맞을 때, 나는 가장 즐거운 기분이 된다.


이번 주말, 보름 만에 그를 만나 서로 마음껏 애정을 주고받았다. 둘만의 말투로 종일 떠들고 노래를 불렀고, 설거지하는 그의 엉덩이를 실컷 발로 차주기도 했다. 그의 생일을 맞아 화장품을 선물했고 초콜릿 케이크도 먹었다. 그리고 집에서 네 끼의 식사를 차려주었는데, 다 된 미역국에 소금통을 들이부어 미역국을 두 번 끓이기도 했다.


그가 고마워한 것보다 내가 훨씬 더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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