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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해리 Jan 06. 2023

당신만 있다면 어디든

샴페인 잔에 담은 우유 

음식 : 양지 쌀국수(에머이)

음악 : California Dreamin’ (The Mamas& The Papas 노래, John Phillips, Michelle Phillips 창작)

영화 : 중경삼림(왕가위 감독)


이렇게 글을 쓰려니 당시의 내가 착각을 해도 단단히 했구나 정신이 번쩍 든다. 역시 여행은 한갓진 로망 실현이 아니라 긴장을 놓을 수 없는 낯선 세계와의 조우에 관한 것이었다고 홀로 쌀국수 가닥을 씹으며 쓸쓸히 수긍하고 씁쓸히 순응한다. 그러나 시원하다.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걸 다시 확인했다. 

내가 먹고 싶은 건 스테이크 같은 것이었다. 그게 나의 ‘로망’적인 여행 음식이자 내가 생각한 서양 음식이었다. 시드니에 고작 두 달 있으면서도 스테이크를 먹은 횟수는 정작 딱 한 번에 불과했고, 그것도 첫째 날이었다. 그 이후 시드니를 떠날 때까지 스테이크를 먹지 못했다. 타의든 자의든 간에 말이다. 내가 시드니에 머물면서 먹은 음식의 7할은 한국 음식이었고, 나머지 3할을 월남쌈, 타이 음식, 브런치, 그리고 쌀국수가 차지한다. 아, 양고기도 있다. 그중 가장 낯선 음식은 단연 쌀국수다. 월남쌈이나 타이 음식도 쌀국수와 마찬가지로 이국의 음식이지만 우연한 기회로 한국에서 먹어는 봐서 익숙하진 않아도 최소한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쌀국수는 어째서인지 살면서, 한국에서, 어떤 이유로든 먹어본 적이 없는 만큼 낯선 음식이었다. 내가 책에서 읽은 스튜나 스테이크도 아니고, 한국식 일본 요리나 중국 요리도 아닌 생소한 음식이고, 우리집은 익숙한 음식만 먹는 축에 속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나에겐 기대가 있었기에, 기대 바깥의 음식을 먹는 건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하지만 안 먹겠다는 말을 도저히 못했다. 

첫 쌀국수는 시드니의 한인타운 같은 곳에서 먹었다. 맛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사촌언니가 밖에서 주차를 하고 있는 사이 난 두 조카와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표현은 너무 얌전하다. 큰 조카는 사촌이모가 낯설어 투정을 부렸고, 아기인 둘째 조카는 내 품에서 몸부림을 치며 가게가 떠나가도록 울었다. 큰 조카는 엄마를 찾아 가게 밖으로 곧바로 뛰쳐나갈 것만 같았고, 작은 조카는 나의 팔에서 단숨에 빠져나갈 것만 같았다. 더군다나 나는 처음 먹는 음식은 두려웠다. 그런데 나는 이걸 못 먹겠다는 말을 뱉느니 차라리 이 공포를 삼키는 게 편한 사람이다. 난 도망치지 않았고 사촌언니가 가게에 들어오자 질서 없는 혼돈은 겨우 사그라들었다. 소소한 혼란 사이에 들어온 쌀국수와 다른 베트남 음식들은 뜨끈뜨끈했고 난 이 모르는 음식을 입에 넣기를 앞두고 긴장에 침을 꿀꺽 삼켰다. 당시를 아무리 회상해도 도무지 내키지 않았던 음식의 맛을 아직도 모른다. 그 전에 겪은 적이 없어 생판 모르는 맛이었다. 물음표를 씹어도 그것보다 맛이 날 것 같았다. 나의 기억과 혀에 등록되지 않은 맛의 베트남 쌀국수를 처음 먹은 뒤로도 난 시드니에서 제법 자주 먹었다. 매번 무슨 맛인지 몰랐고 선택권이 없었다. 그때마다 난 저작 운동만 무의미하게 반복했다. 시드니를 떠날 때 난 쌀국수를 영영 안 먹을 줄 알았다. 

멜번에선 오직 나 혼자였다. 타지에서는 내가 끼니로 쥐를 먹든 쥐약을 먹든 걱정해주는 사람이 없는 법이다. 냉장고에 반찬 없는 서구 문화권에서 아무리 간단한 것이라도 매번 뭘 해 먹는 것도 지친다. 그럴 때면 축 처지는 몸뚱아리를 질질 끌고 근처 베트남 쌀국수집으로 겨우 당도했다. 멜번의 웬만한 식당들은 하나같이 일찍 문을 닫아 그 식당은 저녁 8시에 적적한 길에서 외로이 은은하였다. 그 시간대 손님은 나뿐이었다. 곧 있으면 마감을 앞둔 직원들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은 느리게 치는 파도 같은 안정감을 선사했고, 주문한 뒤 얼마 안 있어 직원은 듬뿍한 쌀국수를 내왔다. 내 앞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국수를 마주하면 그간 몸에 쌓인 냉기와 마음을 적신 부아가 사르르 마르는 기운이 들었다. 늘 국물부터 수저로 떠 호로록 마셨다. 국물은 참 촘촘했다. 면을 소심하게 집어 호호 불어 입에 넣으면 의문의 설움이 소로로 풀렸다. 기댈 곳 하나 없이 오로지 혼자뿐이고, 알 수 없어도 뭐든 스스로 결정해야 했던 그 시기 멜번에서 그나마 덜 생소하고 시린 속을 따스하게 데울 수 있는 건 그로부터 3년 전 시드니에서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먹은 쌀국수였다. 처음엔 까슬거리던 털 장갑이 서서히 길이 들더니 내 손에 보드라워진 것이다. 쌀국수는 그렇게나 포근했다. 마지막 손님인 내가 먹은 값을 치를 때 직원이 육수가 끝물이라 지나치게 진하지 않았는지 은근하고 조심스레 묻곤 했다. 그게 꼭 의미 있는 안부 인사처럼 들렸다, 아무도 날 궁금해하지도 걱정하지도 않는데. 멜번에서 사무치게 외로우면 고민하지 않고 쌀국수를 먹었고, 웬만하면 먹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때도 난 어쩔 수 없이 쌀국수를 먹는다고 간주했다. 여정은 짧지만 긴 호흡의 여행 후 다시 한국에 돌아갔을 즈음만 해도 쌀국수 생각을 일체 하지 않았다. 새벽에 집에 도착하자마자 먹은 건 ‘불닭볶음면’과 복숭아, 그리고 옥수수였고, 그간 목소리로만 만난 친구와 얼굴을 보자마자 간 곳은 ‘공차’였다. 쌀국수가 다시 어지간히 당길 때는 순전히 그 일상이 또 지긋지긋해졌기 때문이다. 사방이 똑같았다. 사방이 또 막힌 장벽이었다. 주어진 환경, 강요되는 선택, 환영받지 못하는 부적응자의 필연적 불행이라는 벽돌이 틈 하나 없이 촘촘했다. 어딜 가든 또 똑같아. 여지가 없어. 변함없는 같음에 숨이 막히는 나에게 낯섦은 얼마나 신선한 숨통이었나. 낯섦은 지금까지와 다르고 지금까지 없던 것이다. 지겨울 수 없는 것이다. 어디를 가든 어디에 있든 핵심은, 낯섦을 느끼는 것. 낯섦을 느낀다는 건 그냥 넘기지 않음이다. 호기심을 갖고 그 안에서 생경함을 찾는 것이고 눈에 익은 존재만이 반드시 세계의 전부가 아님을 깨우치는 것이다. 쌀국수는 바로 그 정겨운 낯섦을 불러 일으켰다. 

나는 쌀국수를 접할 만한 환경에서 크지 않았다. 내가 읽은 책에는 핫초코와 케이크, 영화에는 칠면조와 젤라또 아이스크림, 현실에서는 기본 밥, 반찬, 국, 가끔 특별해야 소고기나 회, 꽃게찜 혹은 새우찜이 있었다. 근사한 것과 수수한 것투성이의 삶에서 쌀국수는 듣도 보도 못했다. 근사한 음식을 간접적으로 읽거나 들으며 난 맛을 보기도 전에 그 음식에 대한 환상을 가졌고, 수수한 음식을 직접적으로, 또 반복적으로 먹으며 감각의 칼날은 길이 들었다. 과일만 깎는 칼은 결국 과일만 깎게 되듯이 말이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음식만 먹고, 먹던 음식만 먹고, 익숙하지 않은 외양과 냄새가 나는 음식에는 손도 일절 안 대는 식습관은 이 정반대의 상황 조건에 맞닥뜨렸을 때 날 꽉 막힌 겁쟁이로 만들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 곳만 가고, 갔던 곳만 가고, 이상하게 생기거나 보이는 곳은 발걸음도 일절 들이지 않았다. 인간의 겁은 자연스러우나 난 익숙함에 푹 절었다. 내가 선택한 적 없는 익숙함이었다. 엄마가 차리는 밥상, 가족들 중 어른이 먹는 음식, 학교에서 주는 급식 중 내가 과연 어디서 이국을 느낄 수 있었을까. 타의적인 익숙함에서 낯섦에 대한 욕구가 자의적일 수 없다. 코스모폴리탄이나 다름없는 친구의 가족과 타이 음식을 먹었을 때를 근거로 든다. 지금 회상하면 꽤 잘하는 식당이었는데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때의 난 날아다닐 것 같은 쌀알에 기겁해서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첫 해외 여행으로 간 도쿄에서도 음식이 낯설어 입에 뭘 좀처럼 대지 않아 조식과 컵라면 외에 생각나는 음식이 없다. 그런 나에게 쌀국수는 예외가 아니었지만,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까닭은 이국 생활에서 먹었기 때문이다. 여행이 체험이라면 생활은 생계가 된다. 내가 쥐를 먹든 쥐약을 먹든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 타지에서 쌀국수는 가족과 함께 먹은 음식이다. 배를 골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인데 음식까지 주니 얼마나 복이야. 그렇게 한참 뒤에 알았다, 내 쌀국수에는 처음부터 고수가 들어 있었음을. 사람마다 호불호가 그렇게 강한 고수를 난 아무 거부감없이 아무렇지 않게 먹었다. 왜냐하면 그건 낯섦 속에 이미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생존에 잔상과 상상 그 어느 것도 없는 이국이 슬며시 들어오고 만 것이다. 

쌀국수에 녹아든 낯섦의 발로가 어디서 있은 적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경험이기에, 오직 나만의 경험이기에 쌀국수의 낯섦은 차가운 적이 없었다. 오히려 후끈하면 후끈했지. 쌀국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낯섦의 바깥으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주변에 어떤 식당이 있든 쌀국수 식당이 있으면 난 다른 선택은 고려도 않고 그저 홀린 듯이 쌀국수 식당으로 갔다. 생판 모르는 동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혼자 먹는 점심으로 쌀국수를, 아는 사람 없이 처음 간 동네에서 처음 만난 사람과 함께 먹은 점심도 쌀국수, 혼자 영화를 보기 전에 혼자밖에 없는 식당에서 쌀국수. 그 쌀국수’들’의 맛은 복잡했다. 글로 밥 벌어먹을 날이 오기까지 얼마나 더 많은 시간과 남의 업무를 해야 할지 절대 알 수 없는 막막함, 엑셀의 수식과 철저한 수직 관계에서 느껴지는 나 자신에 대한 한심함, 나의 또래들이 번듯한 직장인이 된 모습에서 밀려오는 의구심 등 내가 작가의 길을 과연 잘 가고 있는 것일까 쌀국수 한 모금과 한 젓가락에도 끊임없이 반추하였다. 아르바이트 장소는 건마다 바뀌었기에 그때마다 환경은 낯설었지만 상황은 기가 막힐 정도로 똑같았다. 나는 작가로서 언제 빛을 볼지 모르고 생계는 마이너스에 생활은 불안하고, 작가로서 나의 역량을 밝힐 기회는 전혀 없고 냉대와 교활함 사이에서 분통이 터지는 와중에 쥐어지는 돈은 들이는 시간과 에너지에 비해 너무 적었다. 꼭 아르바이트가 아니어도 착잡하고 서러웠다. 극장 영화 관람에 대한 관심이 적어지는 시대, 대중성이 없는 영화에는 주의를 주지 않는 사회, 서로 친구가 되기에는 너무 의심이 많고 셈이 복잡해진 세상에서 좋은 영화를 혼자 보고 누군가와 함께 하는 식사에서도 전혀 안심하지 못하고 먹는 쌀국수의 맛은 참 낯설 수밖에 없다. 이 또한 언제 어디서 누구와 있어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쌀국수를 먹는 동안 주변을 둘러보면 아무도 책을 읽고 있지 않았다. 덕분에 쌀국수는 두려움과 지긋지긋함 사이의 교집합이었다. 그 교집합에는 세상에 나만 혼자인 것 같은 기분, 실제로도 혼자이기에 느끼는 외로움, 아무도 모르고 아무도 몰라주는 데서 느껴지는 외로움이 자리했다. 그래서 쌀국수를 위로라고 일컫진 않겠다. 비극 속에서는 뭘 해도 비극이다. 쌀국수는 다만, 나의 삶에서 낯섦은 평생 따라다닐 것이고 그 여정에서 찾을 수 있는 그늘이라는 것이다. 

내가 왜 이러고 있을까? 내가 왜 이곳에서 쌀국수를 먹고 있을까? 나를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이곳이 편한 것도 아니고, 이 여정이 마냥 행복한 적도 없는데 말이다. 꿈을 현실로 이루는 여정에서 회의감은 자주 든다. 글을 쓰기 위해 떠났던 멜번에서 시리얼과 샐러드를 먹다가 울분이 치밀 때도, 나와 마주앉은 사람이 영 좋지 않은 기운을 뿜어대도, 기약 없는 미래에 또 공중누각을 짓는 기분이 들 때 쌀국수 가닥과 고명을 씹으며 이를 갈아붙였다. 아무도 내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고 도움을 거절하는 냉정한 시대에 따끈한 쌀국수 국물이라도 마시면 꾹꾹 눌렀던 설움이 도리어 터질 것만 같았다. 그 음울하고 짙은 국물을 마시면 당장엔 속이 다 풀리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리 먹어도 마셔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꿈과 현실의 이질성에 고추 고명을 풀면 그 알싸함에 코끝이 아리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시드니에서 쌀국수를 먹었는지 쌀국수를 먹을 때마다 똑똑히 기억한다: 이건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먹어야 하는 음식을 먹기 위해서 먹어야 한다면 먹겠다. 쌀국수는 나의 절치부심이다. 어디에서 무엇을 해도 낯섦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원하는 바를 이루려다 또 아무도 모르는 지점에서 고됨과 꿈만함에 시달린다면, 마음을 잠시 내려놓을 순간을 찾지 못한다면 쌀국수다. 

그러고 보니 도저히 못 먹겠다는 말을 안 한 거구나. 물론 내가 못 먹겠다고 하면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뻔했지만. 



:: 맛있게 먹는 법

쌀국수까지 맛있게 먹는 법을 고안하거나 알아차리면 내가 너무 가련하다. 


원래 <샴페인 잔에 담은 우유>의 글은 제가 직접 읽은 녹음본을 같이 기재하나 

긴 글을 읽을 몸 상태가 아니기에 아쉽지만 글만 올립니다. 


글로 할 수 있는 

모든 걸 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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