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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밍 Apr 08. 2019

딴짓 유목민

친구라고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고, 술은 입에도 대지 않으며, 여행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 가끔 헬스장에도 가고 영화관에도 가지만 그는 대개 일 아니면 공부에 파묻힌 채로 단조로운 일상을 살아왔다. 10년간 그와 연애를 하며 흔한 데이트코스를 탈피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해봤지만, 본격적으로 함께 할 딴짓을 찾게 된 것은 결혼 후였다. 같이 살면서 알게 된 그의 퇴근 후 삶이 적잖이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신혼여행에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어느 날, 남편은 아이패드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슬쩍 봤더니 알 수 없는 기호와 숫자가 가득했다. 대학수학이었다. 전엔 몰랐는데 일을 하다 보니 왜 대학수학을 배우는지 알겠다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퇴근 후 대학수학을 푼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음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남편은 수학을 풀었다.


“여보, 당신 게임 좋아하지 않았어? 나도 그 게임 해볼까?” 남편을 대학수학에서 구해야겠다는 사명감으로 나는 좋아하지도 않는 게임을 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삼십 대 중반이 된 그는 동체시력과 손의 움직임이 예전 같지 않아 게임이 재미없다고 했다. 더군다나 예전에는 채팅창에서 욕을 먹었는데 요새는 헤드셋을 끼고 육성으로 욕을 먹는 게 거북하다고. 그는 그렇게 오랜 친구와 같던 게임을 떠나 수학공부에 정착해버리고 만 것이다.


대학수학 사건(?) 이후 처음 남편에게 제안한 것은 복싱이었다. 남편은 주저했지만 이내 같이 체육관에 등록했고 처음엔 재미있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딱 2주였다. 남편의 표현을 빌리자면 직장이 힘든 게 아니라 복싱이 힘들었다. 체력이 쉽사리 붙지 않아서인지 하루만 운동해도 며칠은 앓는 것 같았다. 한 번은 둘이 손잡고 복싱장 앞까지 갔다가 감자탕만 먹고 돌아온 날도 있었다.


영화는 취향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겁이 많은 나는 남편이 좋아하는 스릴러 영화를 보며 무서워서 눈을 감았고 남편은 내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보며 졸려서 눈을 감았다. 책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문학을, 그는 사회과학 분야의 책을 좋아했다. 내가 가슴에 쿵 박히는 시구를 읊으면 남편은 아리송한 표정이었다. 서로가 추천해서 책꽂이에 잔뜩 쌓아둔 책은 왠지 모르게 손이 잘 가지 않았다.

가죽 공예를 하러 간 적도 있다. 하다 보면 나중엔 가방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가 의외의 복병을 만났다. 첨단공포증이었다. 뾰족한 것을 보면 머리가 아프다는 남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최대한 바늘을 보지 않으며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했다. 남편이 만든 여권케이스는 눈을 크게 뜨고 만든 나보다 더 예뻤지만, 남편의 두통 때문에 다음을 기약하기는 어려웠다.


이 외에도 필라테스, 탁구, 핸드드립, 다도(茶道), 요리, 보드게임 등 다양한 시도를 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계속하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딴짓 유목민으로 살고 있다. 달라진 점이라면 초반에는 나의 딴짓에 남편을 동참시켰는데, 지금은 우리 둘 다 열심히 딴짓을 찾는다는 것이다.


남편의 삶에 함께 보낸 시간이 조금씩 스며들어 여유라는 마음의 공간을 만들어냈음이 분명하다. 나의 시간 1에 그의 시간 1을 더해서 2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서로의 시간은 화학작용을 일으켜 전혀 새로운 순간을 만들어냈다. 그가 즐거워할 때 나도 웃음을 터뜨렸고, 내가 어색해할 때 그도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반에서 1, 2등을 다투는 것처럼 은근히 경쟁하기도 했다. 혼자서는 ‘아, 네.’하며 그저 묵묵히 배웠을 텐데 같이 있으니 별것 아닌데도 감탄사가 흘러나와 서로의 기분을 들뜨게 했다.


우리의 다음 딴짓은 펜드로잉이다. 남편과는 달리 그림에는 영 소질이 없는 내가 드로잉을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괜찮다. 또 다른 딴짓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피아노, 스쿠버다이빙, 마라톤, 농사···. 취향이 잘 안 맞기는 하지만 온갖 딴짓을 함께 시도해 볼 좋은 친구가 한 명 있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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