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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성 Aug 20. 2024

봄꽃에 대하여


 꽃이 피어난다. 차갑게 식은 줄 알았던 나뭇가지의 단단한 표면을 뚫고 올라온 봉오리가 피어난다. 피어난 꽃잎이 어디로 흘러가게 되는지 마냥 지켜보고 싶은 시간이다. 꽃 피울 순서를 기다리는 나무들은 신록이 올라오는데 여느 나무들과 다를 것 없는 싱그러운 푸름마저도 봄 햇살에 비치면 마음 속까지 투영되어 물드는 것만 같다. 꽃은 사람을 어떻게 설레게 하는 걸까. 왜 나는 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하는 걸까. 왜 나는 꽃이 피어있는 풍경을 그저 말없이 바라보게 되는 걸까. 바람에 흔들리고 꽃잎을 흘리는 어수룩한 나무들이 왜 이렇게 좋을까.


  시기적으로 봄이 내게 찾아오면 나는 봄을 가장 만끽할 수 있는 공간을 찾는다. 봄은 시간이 가져다 준 것이지만 나는 봄을 느끼기위해 공간을 물색하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 모두 맞아떨어져야 봄이 완성되는 것만 같다. 그러니까 봄은 내게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피상적인 개념으로 다가오는 것도 아니다. 나는 봄을 찾아나서는 주체적인 향유자인 것이다. 주체적 향유자로서 이제 봄의 절반쯤 지나가는 시점에서 내가 찾아나선 봄에 대해 중간 리포트를 해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또박또박 봄 일지, 봄꽃에 대하여'라고 이름을 붙여보면 좋겠다. 설렁설렁 발걸음을 옮기는 나른한 기분의 고양이와 같이 찾아나선 봄꽃에 대한 감상이다.


  1. 활짝 피는 꽃


  목련은 말그대로 활-짝 피어난다. 마치 커다란 알새우칩들을 한 데 모아 넓게 펴낸 것 같은 모양새다. 예전에 '더러운 것은 내가 아니다.'라는 시를 썼다. 목련이 주는 시각적인 질감이 너무나 보송하게 느껴지는 것이 참으로 오묘하고 독특한 아름다움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목련이 떨어져 사람들의 구둣발에 밟히면 적갈색으로 상흔을 드러내는데, 사람들은 자기의 발로 목련을 밟고서 떨어지면 더러워지는 꽃이라고 하곤 한다. 참으로 마음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목련은 억울하지 않을까. 더러운 건 내가 아닌데. 그런 상상을 하며 쓴 시여서, 그러니까 목련의 대변인이 되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목련을 보면 더 애틋한 마음이 드는 것 같다.


  활짝 피어난 목련은 압도적인 아름다움을 가지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개나리가 봄의 시작을 알려주지만 항상 나는 목련이 피고 나서야 봄을 느끼고 안심했다. 뽀얗게 피어난 목련이 바람에 조금 위태롭게 흔들리면 나는 여윈 나뭇가지를 붙잡아주고 싶다는 미혹에 시달렸다. 커다란 꽃송이에 비해 얇은 나뭇가지를 가진 것이 안쓰러워서였던 것 같다. 위태로운 것을 사랑하는 마음은 아마 바람이 슬쩍 부는 날에도 아내의 손을 꼭 잡게 하는 동기일 것이다. 그렇다고 아내가 목련같은 비율을 가졌다는 것은 아니다. 작은 머리에 마른 체형이라 더 걱정되는 것이니까 혹시 오해를 했다면 바로잡도록 하자.


  각설, 목련을 보고 알새우칩을 떠올리는 것은 아내가 새우칩을 좋아하기 때문이고, 발리에서 많은 새우칩을 아내에게 먹여줬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활짝 피어있는 목련을 보면 나는 아내를 깨워 목련 앞에 데려다주고 싶다. 목련을 뽑아올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아내를 목련 앞에 데려다 놓자, 뽀얀 피부를 가진 아내를 보고 목련이 '내 꽃잎인가?' 하고 헷갈려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 나는 뛰어오르는 입꼬리를 잡을 수가 없다.


  2. 사람들이 사랑하는 꽃



  차갑고 앙상한 겨울을 보낸 사람들이 가장 기다리는 것은 단연 벚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런 기다림과 기대를 벚꽃이 아는지 벚꽃은 매해 사람들의 마음에도 꽃을 피운다. 벚꽃을 보고 사진을 찍고 걷는 사람들의 웃음이 꽃잎같이 바람에 유영한다. 천변을 따라서 늘어선 벚꽃은 스스로를 위해 피어나는 것 같지 않다. 마치 존재 자체가 선물인양, 사람들이 좋아하기 때문에 피어난 것처럼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 아름다움이 사진에 담기지 않는 것은 내가 사진에 재주가 없는 것이지, 불광천의 벚꽃이 예쁘지 않아서는 절대 아니다. 사진을 잘 찍는 것은 역시 어려운 영역이다. 


  불광천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나의 작은 불광천이 어느새... 라고 생각이 들지만, 동네가 흥성해지는 것 자체는 좋은 일이니까 나는 조금 토라진 마음을 풀어낼 수 있었다. 이 동네엔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가득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내가 사랑하는 맛집이 많으니까 맛집의 사장님들에게 바쁘지만 보람되고 행복한 날들이어서 계속 곁에 남아주기를 바라본다. 그런 소망을 봄꽃이 들어준다고 생각하니 정말 선물같은 녀석이 아닌가 더욱 생각된다. 매년 벚꽃이 피면 불광천을 찾았다. 작년에도 아내와 왔었는데, 올해 아내와 함께 집에서부터 채비를 해서 나오니 더욱 즐거운 마음이었다. 심지어 우리는 집으로 돌아갈 때도 함께였다. 이제 결혼을 한지가 9개월이 되어가는데, 아직도 같이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 하루의 끝이 헤어짐이 아니라는 것이 벅차오르는 감사함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평생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벚꽃은 생각보다 늘 가까운 곳에 있다. 꽃이 필 때가 되어서야 벚나무였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일이 부지기수다. 그러니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을 소중히 여겨야겠다. 흔하게 파란 나무인 줄 알았던 모든 것들이 봄이 되면 무엇보다 아름다운 벚꽃을 만발히 피워낼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신이 나면 유난히 가늘어지는 눈을 가졌다. 눈이 그렇게 작은 편도 아닌데 봄에 나를 본 사람들은 나에게서 실눈을 읽어갈지도 모르겠다. 봄의 꽃이, 따뜻함이, 창문을 넘어오는 포근한 바람이 나를 자꾸 신나게 한다. 검은 옷을 입고 있던 당시는 옷의 분위기처럼 아주 칙칙하고 힘든 상태였지만 사진을 찍어보니 그런 와중에도 역시 가늘어진 눈을 하고 있다. 일에 지쳐 넓은 벤치에 의탁한 몸뚱이인데도 꽃들 사이에 있으니 좋은 마음이었나보다. 


  3. 아름다운 연회



  봄을 찾아나서는 여정에서 정말이지 목적지라고 할 만한 곳에 도달하면 나는 그것을 그저 완상하고 싶다. 봄을 찾아나섰던 모든 여정에 대해 보상을 받는다면 나는 그자리에서 이제 짐을 놓고 그동안 옮겨왔던 발을 멈추고 그저 바라보고 싶다. 마치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으로 연회를 한다면 그 비밀스러운 연회에 슬쩍 끼어보고 싶은 마음이다. 그런 연회를 찾아 열심히 발걸음을 옮기다가 멀리로만 돌렸던 시선이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참으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초등생 시절을 모두 보냈던, 아카시아와 라일락 향이 짙은 동네에서 있었다. 맨 처음의 동영상 역시 이곳이다.



  아버지를 보는 것이 이젠 매일 있는 일이 아니다. 나의 가정을 만든다는 것은 아버지가 만든 가정에서 독립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완전 모르고 있던 것은 아니지만 알고서도 준비할 수 없는 것도 역시 있다. 그래도 아버지 어머니와 나는 봄이 되면 이 공원을 찾는다. 이곳에는 나의 초등생이었던 시절을 화단 어느 구석에서 보관하고 있다. 올 때마다 꺼내보는데 참 어머니 아버지가 웃음짓게 하는 것이다. 이곳에서 나는 드디어 봄을 찾았다. 시간으로 다가온 봄을 공간적으로 찾아냈다. 나는 이제 봄을 완상한다. 그저 바라본다. 머리 위로 산뜻하게 지나가는 바람에 꽃잎이 우수수 흩날리고 그런 풍경을 그저 말없이 바라본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아름다움이 이곳에 있다.



  벚꽃만 있다면 연회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많은 꽃들이 함께 초청되어 자리를 빛내주고 있다. 그리고 한 켠엔 나와 이 동네가 가장 사랑하는 정지용 선생님의 시가 서있다. 정지용 선생님의 마지막 흔적을 간직한 동네다. 그분이 가장 그리워했던 동네이고, 영원한 상실에 슬퍼했던 곳이 이곳인 것이다. 지금은 얼룩백이 황소는 찾아볼 수 없지만, 상실감을 달래줄 새로운 꽃이 피었다고 전해주고 싶다.


  꽃의 이름에 대해서는 참 아는 바가 적다. 벚꽃사진도 섞여 있긴 한데, 라일락 정도를 제외하면 다른 꽃은 무슨 이름을 가졌는지 모르겠다. 기왕 이름을 모르는 김에 한 번 이름을 붙여봐도 좋을 것 같다. 꽃이 기분나빠하지 않을 만한 이름을 말이다. 


  4. 봄을 선물하고 싶다.



  봄을 찾아나선 여정은 나름 성공이었던 것 같다. 봄을 발견한 나는 이제 이 사랑스러운 봄을 선물하고 싶어졌다. 봄이어도 출근하고 퇴근하는 아내를 위해 내가 찾은 봄을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퇴근해서 집에 돌아온 아내에게 봄을 주려면 어떡해야 할까 고민하던 나는 문득 어머니께 꽃을 선물했던 날을 떠올리고 어머니께 봄을 찾아드렸던 날을 떠올렸다. 퇴근이 일렀던 나는 다시 집을 나섰다.


  꽃집을 향한 나는 아내를 웃게 해줄 후보들을 진지하게 들여다보았다. 한켠에서 분홍장미, 아마 헤라 라는 이름이었던가. 잘은 모르지만 봄이 스며든 꽃이 피어있었다. 아내와 연애하던 시절 '꽃이 피어있다'라는 시를 썼는데, 아내를 만나러 가는 길엔 항상 뒤를 돌아보면 꽃이 피어있는 것과 같이 즐거운 나의 모습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뒤에 남은 꽃을 이젠 아내의 앞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 비록 조촐하게 장미 세 송이밖에 안되지만 아내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기를 바라면서 데려온 꽃을 얇은 꽃병에 끼웠다. 현관문을 열면 한 눈에 들어올 수 있게 거실 테이블에 놓고서 나는 아내를 기다렸다.


  또박또박, 현관문 앞에 다다르는 아내의 발소리. 점차 가까워지고 나는 오늘만큼은 아내의 표정을 쉽게 떠올릴 수 없었다. 하늘 한방울같던 아내가 내 곁에 머무르는 매일이 계속되는 와중에 결혼 후 처음 맞이하는 봄을 가장 와닿게 선물할 수 있을까 긴장이 된다. 고작 장미 세 송이 가져다 놓고 너무 큰 것을 바라는 걸까. 역시 5송이는 넘게 샀어야 했던 것이 아닐까. 시기적으로 다가온 봄과 같이 아내가 다가온다. 띠리릭,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이윽고 손잡이를 잡는 소리. 현관문이 열리며 아내의 얼굴이 봄꽃같이 보인다. 숨죽인 상태로 거실 테이블에 놓인 장미 세 송이로 눈길을 한 번 돌리는 나를 보고서 아내도 눈을 돌린다.



  아내의 얼굴에 봄이 왔다. 나는 이번 여정에서 가장 아름다운 봄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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