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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성 Aug 20. 2024

겨울 연남

  사랑은 주체의 내부에 있는 걸까, 아니면 외부에 있는 걸까. 고민이 되는 주제다. 이를 주제로 쓴 시가 있었는데 그때 내린 결론은 '사랑은 내부에 있다.' 였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감정인 만큼 얼핏 생각했을 때는 주체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어떤 경험들은 사랑의 위치를 확인시켜주기도 한다.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린 다음날이었다. 대관령에서 소식을 보내온 어머니는 손주들과 눈 속에 파묻혀 활짝 웃고 있다. 하얀 눈밭을 퍼석거리며 발걸음을 옮긴 나는 오후 3시 50분에 홍대입구역 3번 출구에서 나왔다. 퇴근 후 속눈썹 관리와 미용실 예약 일정이 있다는 아내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곧바로 연남 숲길로 이어지는 이 출구는 연남동으로 가는 가장 유용한 통로였다. 한때 연남동에 적을 두었는데, 아내와 함께 매일 연남동에서 데이트를 하고 파죽지세로 맛집을 정복하러 다녔던 날들이었다. 그런 기억이 선명해서 그런지 홍대입구역 3번 출구에서 나오는 첫 전경을 보자마자 익숙하고 겨울임에도 따뜻한 느낌이 든다.

  만남은 경계의 순간이다. 아내를 만나기 전에 나는 혼자지만, 아내를 만난 순간부터는 함께가 된다. 서로를 인식하고 만나는 그 찰나의 순간이 중요한 것은 혼자로부터 함께로 전환되는 이후의 분위기와 기분을 그 경계의 짧은 순간이 지대한 영향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아내가 나를 인식하는 그 순간을, 그러니까 우리가 이제부터 함께 있다고 인식하게 되는 그 순간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다는 것이 나의 욕심이고, 욕심에서 기인하는 나의 행동 양식이다. 눈이 녹은 물에 젖은 아스팔트 도로 위로 발걸음을 옮긴 나는 아내를 만나기 전 무엇으로 만남의 순간을 장식할 수 있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마카롱 가게로 들어갔다.
 
  연남동에 위치한 마카롱 가게인 크레미뇽은 아내와 연애할 당시부터 만남의 순간에 아내를 기분좋게 해주던 것으로 아주 통통한 마카롱이다. 매우 오랜만에 들른 것이었기 때문에 혹시나 문을 닫았을까 염려했으나 다행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좋아하는 가게들이 그 자리를 지켜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요즘이다. 좋아하는 가게들이 문을 닫는 것을 보면 왠지 모르게 이별통보를 받고서 느끼는 아픔이 비슷하게 느껴진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만난 듯 반가운 크레미뇽에서 통통한 마카롱을 6구 포장하여 다시 하얀 눈밭으로 나왔다.

  아내와 주고받은 마지막 문자에서 아내는 약 1시간 전에 속눈썹 관리샵에 들어갔다고 했다. 문제는 그 이후로 무소식이라는 건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내 핸드폰의 배터리도 바닥을 보이고 있는 데다가 눈인지 비인지 모를 것이 내리기 시작했다. 통상적인 생각으로 속눈썹 펌에 걸리는 시간이어봤자 1시간 내외일거라고 생각했다. 속눈썹 샵에 들어간지 약 1시간이 되었고, 그 이후에 구체적인 시간은 모르지만 미용실 예약도 있으니 금방 끝나서 연락이 오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 사고 과정 끝에, 나는 간만에 연남동에 온 김에 아내와 데이트를 많이 했던 곳들을 둘러보며 산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사람이 많은 이 동네에서 우리가 주로 다녔던 가게들은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가게들 문앞을 지나면서 아내와 함께 방문했을 당시의 기온과 습도, 우리의 옷차림, 그날의 대화 주제들이 떠오른다. 마치 혼자 걷고 있는데도 혼자가 아닌 것 같이 느껴지는 산책길이다. 실제로 위치한 가게들이 마치 벽면에 설치된 사이드 스크린처럼, 영상미가 좋은 필름을 보는 것처럼 말이다. 연애를 시작한 후 서로를 더 알아가려고 하고, 결혼을 계획했던 순간들과 그날의 스크립트를 간직한 가게들은 마치 나와 아내의 아카이브같이 느껴졌다.

  아름다운 추억 여행을 하는 것과 별개로 내 걸음은 생각보다 빨랐다. 좁은 연남동 거리를 둘러보는 데에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은 것이다. 잊고 있던 추위가 차츰 코트 안으로 파고 들었고 마카롱 쇼핑백을 든 손은 입술같이 붉어졌다. 더 돌아볼 곳이 없는 상황에서 핸드폰을 확인해보았으나 여전히 아내에게서 연락이 없다. 설상가상 아내는 어느 속눈썹 관리샵에 갔는지 말해주지 않았기에 더욱 막막한 상황이었다. 아내의 미용실 예약이 5시에서 5시 반으로 추정되었으므로 내가 기다려야할 시간을 대략 계산해보아도 여전히 1시간은 남은 것이다. 그런 상황에 배터리는 다 되어 휴대폰이 곧 꺼지기 일보직전이었다. 막막한 상황에 두려움을 느끼는 한편 나약해지는 마음 사이로 문득 짜증 비슷한 것이 올라오려 했다. 그러나 누구를 탓할 일도 아니거니와 설령 내가 겨울날에 정말 아내의 실수로 막막하게 거리를 헤맨다 하더라도 아내에게 짜증을 내는 것과는 전연 당위가 성립되지도 않는 일이다.

  한편 막막한 것은 여전한 가운데 나는 문득 즐거운 일을 생각해냈다. 결혼한지 7개월이 된 지금 아내와 나는 환상의 호흡을 자랑하는 것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 자부심은 많은 면에서 우리가 서로 비슷한 생각을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생각해낸 즐거운 일은 바로 아내가 있는 속눈썹 관리샵을 찾아보는 것이었다. 아내의 취향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나는 지도 어플을 켜서 '속눈썹'을 검색했다. 이전엔 몰랐지만, 연남동엔 정말 많은 관리샵이 있었다. 무수한 관리샵이 뜨는 것을 보고 막막하고 막연함이 올라오는 한편, 보물지도를 가지고 모험에 나서는 출항의 뱃고동이 마음속에 울려퍼지는 듯한 설렘을 느끼기도 하였다. 나는 관리샵을 하나씩 터치해보고서 지도 어플에 뜨는 샵의 썸네일 이미지를 유심히 보았다. 나의 판단 기준은 '아내가 골랐을 법한 썸네일을 가진 샵'이었다. 여러 샵을 터치해보던 중 하얗고 깔끔한 이미지의 썸네일이 뜨는 샵이 나타났다. 순간 나는 '여기다!'라고 생각했고 즉시 뱃머리를 돌렸다.

  걸어가면서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한편 마치 사랑의 증명을 하는 게임처럼 두근두근거렸다. 한 번에 맞추면 엄청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한 번에 맞춘다고 세상이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마치 나를 베팅하는 도박처럼 느껴졌다. 걸어가는 길에 핸드폰이 배터리 부족으로 꺼진 이후로는 더욱 그렇다. 배터리가 있으면 지금 가는 곳이 아닐 때 다음 행선지를 정할 수 있지만 이젠 그럴 수 없게 됐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첫 판에 전 재산을 올인하는 것처럼 단 한 번의 기회가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미 출항한 배는 떠나온 항구를 돌아보지 않는 법이다.

  한 걸음마다 아내와 막막함이 번갈아 일어났다. 만약 그곳에 아내가 없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갑자기 나를 보면 아내가 많이 놀라겠지? 하는 생각들이 왼발, 오른발에 교차한다. 길을 건너고 골목의 귀퉁이를 돌아갈 때마다 이 동네에서 쌓였던 우리의 필모그래피가 상영되었고 영상 속의 우리는 나의 마음을 응원하듯이 즐거운 얼굴이다. 무수한 우리의 얼굴을 지나쳐 온 끝에 골목길, 빌라 건물 1층에 위치한 작은 샵을 찾게 되었다. 진눈깨비보다는 덜 진 것에 머리가 젖은 나는 필로티 아래로 들어가 샵의 문앞을 자세히 보기 시작했다. 시선이 아래로 향하던 와중 나의 얼굴엔 점차 옅은 미소가 퍼졌다. 샵의 문에 발린 불투명 막 아래로 아내의 신발이 보였다.

  그리고 나는 다시 사랑이 안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눈이 아래에 쌓이고 하늘에서도 내리는 궂은 날, 한 시간 가까이 연남동을 헤매던 나의 마음엔 눈꽃만 피어있는 것처럼 향긋한 기운으로 부풀었다.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믿는 것이다. 사랑이 나의 외부에 있었다면 하늘을 덮은 먹구름이 내 속까지 덮어버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내를 찾는 여정이나, 연남동에서 헤매는 이 막막함을 결코 즐거워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막막함을 스크린 삼아 나의 마음을 투사하였고, 거기엔 사랑이 비쳐 설렘을 만끽하며 걸어왔고 놀랍게도 아내에게 단번에 닿은 것이다. 그러니 사랑은 내 안에 있음을 더욱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이윽고 샵의 문을 열고 나온 아내의 눈은 토끼와 같이 동그랗게 커졌다. 어떻게? 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자 나는 괜시리 심술이 난 것마냥 어디라고 말을 해줬어야지~ 하며 투덜거렸다. 그리고 아내에게 짧은 항해일지를 들려주자 아내 역시도 매우 놀랐다. 역시 부부는 부부라며.

  그렇게 우리는 미용실에 들렀다가 우리 부부의 최애 메뉴인 우탕으로 저녁을 마무리했다. 눈이 쌓인 바닥에 아내를 찾아오는 길에 찍힌 발자국이 남은 하루였다. 걸음마다 아내를 만날 수 있을까 두려워하는 마음과 설렘으로 찍은 발자국이라서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듯하다. 안에 있는 사랑을 잉크로 사용하여 찍었으니 사랑의 위치와 관련한 답을 나타내는 방증이 될 발자국이었다. 사랑의 담론이나 경험론적 관계의 파이를 키우는 한편, 아내와의 관계가 만들어내는 사랑은 또 무엇을 깨닫게 해줄지 기대된다. 다음에 아내가 또 어딘가 간다면 일부러라도 이날의 게임을 다시 한 번 해보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다시 나는 사랑에 대한 진리 또는 본질을 발견하고 증명할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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