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설의 춤사위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주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거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69』(조선일보 연재, 2008
조국 근대화의 그늘, 소외된 고향의 뒷모습
이 시가 쓰인 1970년대는 '조국 근대화'라는 기치 아래 도시 중심의 급격한 산업화가 진행되던 시기입니다. 국가는 수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도시 노동자의 저임금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노동자가 그 저임금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농산물의 가격을 강제로 낮게 묶어두는 저곡가 정책을 폈습니다. 이렇게 도시가 화려한 불빛으로 채워질 때, 농촌은 비료값조차 건지지 못하는 빈곤의 늪에 빠져 공동체가 해체되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따라서 이 시의 첫 구절인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는 단순한 공연의 종료가 아니라, 농촌이라는 삶의 터전이 무대 뒤로 밀려나 소외되는 서글픈 현실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구경꾼이 떠나간 텅 빈 운동장은 바로 우리 사회가 외면한 농촌의 모습이고, 여기서의 농무는 원통한 삶을 견디기 위해 몸이 마지막으로 쥐어짜내는 처절한 생존의 몸부림입니다.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주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공허한 무대와 술잔에 담긴 원통함
공연이 끝나고 관객이 떠난 학교 운동장은 적막합니다. 화자는 분장을 지우지도 않은 채 술집으로 몰려가고, 그들이 기울이는 잔에는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는 탄식이 담겨 있습니다. 이 원통함은 단순한 푸념이 아니라, 일해도 삶이 나아지지 않는 구조 앞에서 치밀어 오르는 억울함과 분노일 것입니다.
시가 첫 장면부터 '텅 빈 운동장'을 내세우는 이유도, 축제의 환함 뒤에 남는 것이 빈 공간인 것처럼, 농사 뒤에 남는 것도 결국 빈 손임을 먼저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사라진 공동체의 열기와 자조의 외침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도, 함께 어우러지는 큰 무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이고,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서서 / 철없이 킬킬대'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공동체가 한 덩어리로 움직이던 예전의 활기가 빠져나간 자리, 곧 함께 분노하고 함께 견딜 ‘판’이 사라졌음을 보여줍니다.
보름달 아래에서 어떤 이는 임꺽정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이는 '서림이(임꺽정을 배신한 인물. 체면을 버리고 구차하게 살아남은 인간)처럼 해해'댑니다. 울부짖음과 실없는 웃음은 둘 다 현실을 정면으로 감당하기 벅찰 때 터져 나오는 반응입니다. 그래서 곧바로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라는 자조가 나옵니다. 발버둥의 무력감이 확인되는 지점에서, 시는 한 번 바닥을 찍습니다.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거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도수장 앞에서 터지는 처절한 신명
그런데 시는 그 바닥에서 방향을 틉니다.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삶을 살리는 곳이 아니라 죽임의 기운이 감도는 곳(도수장) 앞에서 신명이 난다는 것은 분명 역설입니다. 하지만 그 역설이야말로 이 작품의 핵심입니다.
이는 즐거워서 추는 춤이 아니라, 더는 말로 풀 길이 없어 몸이 리듬으로 버티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결말이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거나 /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처럼 동작의 나열로 끝납니다. 해결책은 제시되지 않지만, 무너지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생존이 몸의 신명으로 형상화되는 것입니다.
슬픔을 신명으로 되치는 역설의 미학
이 작품은 농촌의 빈곤을 직접 설명하거나 고발하지 않습니다. 축제의 ‘앞면’이 아니라 막 뒤의 공허, 말로는 다 담기지 않는 원통함, 그리고 그 원통함이 끝내 신명으로 꺾여 나가는 과정을 한 호흡의 장면들로 보여줍니다.
생활의 언어와 현장의 동선을 그대로 시의 리듬으로 끌어들여, 슬픔이 단순한 체념으로 끝나지 않고 때로는 집단적 에너지로 솟구칠 수 있음을 증언합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의 춤은 ‘흥겨운 놀이’가 아니라, 끝내 무너지지 않기 위해 어깨를 흔드는 민중의 버팀이며, 그 버팀의 순간을 강렬한 이미지로 남긴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2008년 한국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조선일보)'을 해설해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지난 작품 해설들, 기존에 내가 고른 작품 해설들을 다시 보고 싶은 분들, 검색을 통해 들어왔지만 다른 글들도 보고자 하는 분들을 위해 네이버블로그를 만들어 다 모아 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