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잃어버린 고향, 돌아온 시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활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傳說[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의와
아무러치도 않고 여쁠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해ㅅ살을 등에지고 이삭 줏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집웅,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 도란거리는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솔직히 말해서 정지용의「향수」는 그의 다른 시에 비해서 결코 그 격조가 높다고는 할 수 없다.오히려 부분을 보면 시적 이미지와 은유로 넘쳐나 있지만 그 전체의 내용은 수필의 한 대목처럼 설명적이다.「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 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같은 시구는 수식에 수식을 첨가해 가는 과다한 시적 수사로 되어 있으면서도 연마다 반복되는「그 곳이 참하 꿈엔 들 잊힐 리야」의 구절은 직설적이고도 상투적인 산문형태의 글로 되어 있다.
감각이나 시간과 공간의 구성이 그랬듯이 서술의 양식에 있어서도 시와 산문의 이질적인 두 특성을 다 함께 공유하고 있는 것이 지용의 시「향수」라고 할 수 있다.그리고 바로 그 점이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게 된「향수」의 비밀이기도 한 것이다.
하늘을 향해 쏘아 올린 화살은 끝내는 땅으로 추락하고 만다.잃어버린 화살을 찾아 풀섶의 이슬에 온 몸을 적시고 돌아오는 아이처럼 우리는 고향도 시도 그렇게 잃었다.아스팔트와 콘크리트에서 태어난 우리의 아이들은 잃어버린 화살조차 쏜 적이 없다.그래서 아직은 가요곡의 가사로나마 불리어지고 있는 정지용의 「향수」는 바로 잃어버린 시에 대한 향수이기도 한 것이다.
- 이어령, '다시 읽는 한국시'
노래로도 불리며 널리 알려진 작품입니다. 도시에서 사는 이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시골 고향의 가난하지만 평화로운 모습과, 그곳을 향한 그리움을 담담하게 그려 내고 있습니다. 복잡한 철학보다 보이게 하고 들리게 하는 방식에 힘을 가지고 있는 작품입니다. 그래서 읽다가 보면 풍경이 눈앞에 그려지고, 바람과 사람의 숨소리가 귀에 와 닿는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 원문에 후렴구는 독립된 연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편의상 앞의 연에 포함된 것으로 보겠습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1연은 고향의 한가한 낮 풍경을 펼쳐 보여줍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은 마을사람들의 수다처럼 과거의 이야기를 흘려보냅니다. 이어지는 '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은 소리를 색으로 바꾼 공감각적 표현입니다. ‘금빛’이라는 말 때문에 울음은 느리고 묵직하게 느껴집니다. 이 한 장면만으로도 넓은 들판, 가을빛의 공기, 느릿한 호흡이 동시에 살아나고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화자가 꿈에도 잊지 못하는 곳입니다.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2연은 밤으로 넘어가며 실내의 온기를 보여줍니다.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이라는 말로 밤이 깊어감을 알려 주고,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에서는 바람이 부는 모습이 화면처럼 눈으로 느껴집니다. 밖은 차갑지만, 안에서는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세워 괴고 있습니다. 농가의 하루가 규칙적으로 흐르던 시절, 가난했지만 질서와 평안이 있던 밤의 풍경입니다. 이 대비가 고향의 온도를 더욱 또렷하게 느끼도록 해 줍니다.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활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
3연은 유년의 기억으로 들어갑니다. '흙에서 자란 내 마음'은 화자의 성정이 자연에서 빚어졌음을 말해 줍니다.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 함부로 쏜 활살을 찾으려 /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모습은, 막연하지만 뜨거운 꿈을 좇던 아이의 행동을 보여주고 있는데, 여기서 ‘화살’은 손에 잡히지 않는 소망의 비유처럼 보입니다. 손에 쥐지 못했어도 그 시간을 관통했던 느낌들은, 이제 그리움 속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습니다.
傳說(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의와
아무러치도 않고 여쁠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해ㅅ살을 등에지고 이삭 줏던 곳,
4연에서는 어린 누이와 아내가 등장합니다.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는 활달하면서도 소박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 '사철 발벗은 안해가 / 따가운 해ㅅ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에서는, 아내의 가난하고 고단한 삶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추수가 끝난 뒤 떨어진 낱알을 줍는 일은 생계의 마지막 끝을 붙잡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화자는 그 장면을 원망이 아니라 그리움의 일부로 받아들입니다. 삶의 고단함조차도 이 시에서는 고향의 정조가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는 석근 별
알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집웅,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 도란거리는 곳,
5연은 밤으로 돌아가 시선을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이동하고 있습니다. '하늘에는 석근(성근) 별'에서 출발해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집웅(지붕)', 그리고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도란'으로 내려앉습니다. 첫 연의 바깥 넓이가 마지막 연에서는 방 안으로 응축되며 닫히는 것입니다. 울음이 퍼지던 벌판에서, 이제는 가족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모입니다. 바깥으로의 확산과 안쪽으로의 모임이 균형을 이루면서, 이 시의 분위기는 따뜻한 여운으로 마무리됩니다.
* 이 작품은 상징과 비유 속에 감추어진 의미를 찾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부드럽게 읽어 가는 가운데 상상과 공감이 절로 일어나는, 시다운(?)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쉽고 아름다운 시에는 그렇게 만드는 많은 요소들이 있습니다.
* 이 작품의 후렴구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는 단순한 감탄이 아닙니다. 산만하게 느껴질 수 있는 각 연의 장면들을 '그리운 고향의 모습'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묶어내는 고리입니다. 외면의 풍경 묘사 위주로 되어 있는 본연에 붙어 내면을 보여줌으로써 내외면이 조화를 이루게도 합니다. 바깥의 묘사가 길어져도, 이 한 줄이 올 때마다 시의 중심이 다시 그리움으로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 후렴으로 휴식이 생기고, 전체를 한 곡의 노래처럼 이어지게 하는 역할도 합니다.
* 따뜻한 장면(1·3·5연)과 고단한 장면(2·4연)을 교차로 등장시키는 구성도 눈에 띕니다. 또, '확대–축소'의 리듬을 두 번 반복합니다. 벌판(1)에서 방안(2)으로, 다시 내 마음(3)으로 좁혀졌다가, 벌판(4)과 방안(5)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현재(1·2·5)와 과거 회상(3·4)의 장면이 오가며, 지금도 남아 있는 것과 이미 사라진 것들이 조화를 이루기도 합니다. 이 교차와 왕복으로, 독자는 과장된 감상에 빠지지 않고, 담담한 균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 운율과 소리의 효과도 중요합니다. '빈밭/밤바람”의 'ㅂ', '밭·밤·바람·말·달리고'의 'ㅏ' 모음이 촘촘히 반복되며 겨울밤의 바람이 실제처럼 스쳐 갑니다. 낭송해 보면 바람과 말발굽의 생동감, 잔상을 남기며 사라지는 거리감이 영상처럼 느껴집니다. '금빛 게으름 울음'과 같은 공감각(청각과 시각의 상호 전환)과 이러한 두운의 반복이 만나, 이 시는 읽히는 동시에 들리는 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 이 시는 우리가 잃어버린 다른 것들도 떠올리게 합니다. 다 갖추지 못했던 삶, 때로는 고된 하루, 그 안에서 서로 나누던 따뜻한 말들이,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라는 한 줄로 되돌아 오는 것입니다. 그 시구를 따라, 우리는 각자의 넓은 벌과 흐릿한 불빛 아래 따뜻한 방에서 만나던 공동체의 삶을 회상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시의 그리움은 개인의 추억을 넘어 공동의 기억이 되나 봅니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뿐 아니라, 고향을 실제로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도 이 시, 노래가 스며드나 봅니다.
**** 지금은 '2008년 한국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조선일보)'을 해설해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지난 작품 해설들, 기존에 내가 고른 작품 해설들을 다시 보고 싶은 분들, 검색을 통해 들어 왔지만 다른 글들도 보고자 하는 분들을 위해 네이버블로그를 만들어 다 모아 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