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생의 바퀴, 망각의 잇몸. 수정본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둥굴게 둥굴게 길을 깎아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네요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25』(조선일보, 2008)
고향이라는 LP판 위를 달리는 바퀴
이혼의 위기에 처한 부부의 문제를 상담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이 있습니다. 문제의 원인을 찾아가다 보면, 어릴 적 부모에게서 받은 상처에 이르게 될 때가 많아서 보는 이를 가슴 아프게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원인이 된 부모는 이미 세상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더 무서운 일도 있습니다. 살아 있는 부모의 기억 속에 그 일이 없을 때입니다.
세상에 일어난 모든 일은, 그렇게 기억되고 재생되고 또 망각됩니다. 잔인한 일이지만 이것이 진실입니다.
이 작품은 단순히 옛 고향을 그리워하는 서정시가 아닙니다. 우리 삶의 기억이 어떻게 재생되고 다시 소멸되는지를 탐구하는 형이상학적인 기록입니다.
시적 화자는 자전거를 타고 고향 마을을 돕니다. 여기서 자전거는 멈춰버린 과거의 시간을 일깨우는 ‘현재’이자, 마을이라는 거대한 레코드판 위를 긁으며 소리를 내는 ‘재생 바늘’의 역할을 합니다. 화자가 페달을 밟아 마을 구석구석을 누비는 행위는, 잠들어 있던 과거의 데이터들을 현재의 감각 위로 강제로 불러내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현재의 감각을 과거의 물질로 가공하는 소음
시의 도입부에서 결정적인 전환이 일어납니다. 여치 소리와 바퀴 소리는 지금 몸에 닿는 현재의 감각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소리에서 지금 피부에 닿는 찬바람이 과거의 정미소 나락으로 변환됩니다. 현재의 감각이 과거의 물질로 가공되는 순간입니다.
이 변환이 일어나는 장소가 '바퀴살 아래'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LP판 위를 긁는 바늘이 새겨진 홈을 소리로 변환하듯, 바퀴는 마을 위를 달리면서 땅에 새겨진 과거를 감각으로 변환합니다. 그리고 이 변환에는 질감이 있습니다. 빻아진다는 것은 현재와의 마찰 속에서 과거가 잘게 부서지면서 감각의 형태로 나오는 것입니다. 바퀴가 멈추면 소리도 멈추고, 기억도 멈춥니다. 화자가 페달을 밟는 한, 과거는 계속 빻아져 나옵니다.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가 나네요
마모되지 않는, 동결된 상처의 생생함
자전거가 돌며 마을의 어느 곳을 지나는 순간, 화자는 '입양 가는 아가'라는 서늘한 풍경의 기억과 마주하게 됩니다. 다른 기억들이 시간의 흐름 속에 부드러워지는 것과 달리, 이 기억은 수천 년의 세월을 건너뛴 듯 차가운 냉기와 냄새를 간직한 채 박제되어 있습니다. 이는 화자에게는 시간이라는 연마기가 아무리 돌아가도 가루가 되지 않는, 결코 닳지 않는 고통의 실체입니다.
화자는 자전거를 타고 이 지점을 통과하며, 마을 할머니는 이미 지워버렸을지도 모를 그 비극적 진실을 손등을 덮는 차가운 구름처럼 생생하게 감각해 냅니다.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둥굴게 둥굴게 길을 깎아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없이 깎이고 있네요
껍질을 벗겨 드러내는 고향의 속살
화자가 골목 모퉁이를 돌 때마다 마치 사과 껍질을 벗기듯 길을 깎아 냅니다. 여기서 길이 깎인다는 것은 기억의 소모가 아닙니다. 덮여 있던 과거를 눈앞으로 불러내는 '소환의 과정'입니다. 평범해 보이는 현재 마을의 껍질을 자전거라는 칼날로 깎아내면서, 비로소 그 속에 숨겨져 있던 고향의 옛 모습과 아픈 속살이 노출되고 있는 것입니다. 앞의 아가의 일처럼요.
그래서 껍질이 깎여 나간 큰 사과의 부피는 화자가 복원해 낸 기억의 총합이고, 화자는 부지런히 마을을 누비며 할머니가 평생 보아온 거대한 생의 기록을 우리 앞에 선명하게 복원하여 펼쳐놓고 있는 것입니다.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네요
잇몸의 블랙홀로 사라지는 기억의 최후
그러나 이제 노망 든 할머니는 화자가 공들여 재생해 놓은 그 거대한 사과(기억)를 숟가락으로 파내어 잇몸으로 오물거립니다. 화자가 기억을 ‘재생’하는 주체라면, 할머니는 그것을 완전히 지워버리는 ‘망각’의 종결자입니다. 과거에 아기에게 눈물만 먹였던 사람들 중의 하나였을 그녀는, 이제 노망이라는 보호막 뒤에서 자기 생의 마지막 결실인 사과를 먹어 치움으로써 고통을 무화시킵니다. 마을의 모든 소문이 모여들고 또 퍼져 나갔을 그 구멍가게의 평상에 앉아서요.
화자가 소리를 내며 기억을 불러올수록, 할머니는 부지런히 그것을 파먹어 망각의 세계로 밀어 넣으며, 이 잔혹하고도 평화로운 엇박자 속에서 시는 마무리됩니다.
화자는 '잘도 잡수시네요'라는 말로 이 잔혹한 망각의 공정을 ‘생의 필연적인 풍경’으로 인정합니다. 잘 익은 것은 결국 먹혀 사라져야 한다는 것, 그 소멸의 효율성에 대해 화자는 씁쓸하면서도 담담한 긍정을 보내는 것입니다
소멸을 통해 완성되는 '잘 익은' 생의 미학
이 작품은 고향을 정태적인 공간이 아닌, 끊임없이 가공되고 소모되는 물질적 현장으로 재정의합니다. 시인은 자전거라는 현대적 소재를 통해 '현재가 과거를 어떻게 호출하고 처리하는가'를 탁월하게 형상화했습니다.
시의 흐름이 청각적 요란함에서 시작하여 잇몸질의 무음(망각)으로 수렴되고, 자전거 바퀴에서 할머니의 둥근 입으로 이어지는 '원의 이미지'를 활용한 점은 존재의 탄생과 소멸을 시각화한 압권입니다.
결국 ‘잘 익은 사과’란, 모든 껍질이 깎이고 속살이 드러나 마침내 잊힐 준비가 끝난 존재의 정점을 의미합니다. 사라지는 것들이 그 찰나에 얼마나 거대한 부피를 가졌는지를 기록한 이 시는, 우리로 하여금 ‘망각’ 또한 생이 도달할 수 있는 하나의 부드러운 완성임을 깨닫게 합니다.
[비평 노트] 기존 해설과 다르게 읽었습니다.
첫째, 깎임의 방향입니다.
깎임을 고향의 쇠락이나 기억의 소모로 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껍질을 벗겨 속살을 드러내는 소환의 과정으로 읽었습니다. 방향이 정반대입니다.
둘째, 화자와 할머니의 관계입니다.
기존 해설들은 둘을 독립된 인물로 다뤘습니다. 나는 화자가 재생하는 것을 할머니가 망각하는 엇박자 구조로 읽었습니다. 이 긴장이 시의 핵심 동력이라는 독해입니다.
셋째, 화자와 할머니와 아기의 삼각 구도입니다.
기존 해설들은 이 세 존재의 관계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습니다. 할머니는 친족이 아니더라도 같은 마을 공동체 안에서 그 아기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사람입니다. 화자는 그 기억을 재생하고, 할머니는 그것을 먹어 없애고 있습니다. 이 긴장이 마지막 장면에 씁쓸함을 만들어냅니다.
**** 지금은 '2008년 한국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조선일보)'을 해설해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지난 작품 해설들, 기존에 내가 고른 작품 해설들을 다시 보고 싶은 분들, 검색을 통해 들어 왔지만 다른 글들도 보고자 하는 분들을 위해 네이버블로그를 만들어 다 모아 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