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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예 Feb 11. 2019

나의 프로방스

12 뤼베롱의 작은 마을들 – 고르드 & 루시옹

1988년, 영국의 잘나가던 카피라이터였던 피터 메일은 휴가차 방문했던 프로방스의 분위기에 반해 아예 1년간 눌러앉아버렸다. 요즘 유행하는 ‘한달살기’가 아닌 ‘일년살기’를 체험하고 이 경험들을 기록한 책이 바로 <나의 프로방스>다. 카피라이터 출신답게 그의 글은 무척이나 재치있다. 이 책에 대단한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 남쪽 시골 마을에 갑자기 찾아온 외국인 부부가 1년에 걸처 서서히 프로방스식 촌뜨기가 되어가는게 주요 내용. 낯선 장소에서 그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일들이 벌어진다는 점에서는 여행 에세이로, 그것이 여행이 아니라 일상의 성격을 띤다는 점에서는 일상 에세이로 볼 수도 있다.


대도시스러운 인프라가 갖추어져있지 않은 시골에 폭설이 쏟아지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얘기, 배관 수리를 해줄 배관공을 부를 때는 한 계절이 바뀔 만큼은 기다릴 각오를 해야한다는 얘기, 숲을 뒤지며 송로 버섯을 찾는 얘기, 그리고 어떻게 음식을 준비하고 차려 먹는지 등의 얘기들이 이어진다. 특히 음식을 준비하고 먹고 정리하고 또 다음 식사를 준비하는 이야기는 마치 이 동네 사람들은 ‘먹는다’는 것에만 중점을 두고 하루를 사는 느낌이 들 정도인데, 이는 한국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예능 프로그램 <삼시세끼>를 닮았다.


이 책을 꽤 재미나게 읽었는데 프로방스 중에서도 이곳 뤼베롱 지역이 바로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된 지역이라고 한다. 산세가 험한 지역이면서도 아름다운 풍광 덕에 많은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다분히 ‘프로방스스러운’ 작은 시골 마을들이 여럿 모여있는 뤼베롱 지역. 마을마다 각자의 특색이 있어 다 들러보면 좋겠지만 여건상 그러기는 힘들어서 딱 두 곳에만 가보기로 했다.


첫 번째로 들른 곳은 고르드. 마치 산꼭대기에 지어진 독수리 둥치처럼 산을 에워싼 돌집들이 가득한 작은 마을이다. 언덕의 가장 높은 곳에는 르네상스 시대에 지어졌다는 성이 있고 언덕 아래로 내려오면서는 계단 형태로 집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돌로 만든 집과 촘촘히 돌을 쌓아 만든 담벼락이 딸린 건물들. 그리고 그 건물과 건물 사이를 잇는 울퉁불퉁한 자갈길. 고르드는 카뉴쉬르메르처럼 꼬불꼬불한 언덕길을 미로처럼 비집고 다녀야하는 지역이었는데 그곳과는 느낌이 많이 달랐다. 이쪽은 훨씬 더 비밀스러운 요새의 느낌이 났다.


특히 이 곳은 햇빛 때문이겠지만, 황금빛으로 빛나던 모습이 기억에 남았다. 멀리서 바라보는 마을의 모습도 아름답고 마을에서 바라보는 뤼베롱 산세의 모습도 아름다워 이쪽에서 저쪽을 바라봤다가 저쪽으로 뛰어가서 다시 이쪽을 바라봤다가 하느라 발과 눈이 몹시 바빴다.


고르드와 그리 멀리 떨어진 지역이 아닌데도 그 분위기가 사뭇 달랐던 루시옹은 붉은 빛으로 물든 마을이었다. 루시옹은 돌이 아니라 흙으로 만들어진 집들이 즐비한 마을인데 이 동네의 흙에는 철분이 다량으로 함유되어 있어 붉은 빛을 띤다고 한다. 이런 집들은 지었다거나 쌓았다기보다는 빚어냈다는 말이 더 어울릴 법하다. 울긋불긋한 빛깔은 가을을 닮은 것도 같고 저녁 노을을 닮은 것도 같았다. 루시옹은 고르드처럼 언덕이 가파르다거나 미로같은 골목이 이어지지는 곳은 아니고 편안히 둘러볼 수 있는 소박한 동네라 걷기에는 이쪽이 훨씬 수월했다. 붉은 벽에 녹색의 창문! 이런 색감과 센스라니, 수많은 예술가들이 그토록 프로방스를 사랑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프랑스 정부에서는 1982년부터 관광정책의 일환으로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les beaux villages de France)’을 선정해 관리하고 있다. 인구 2천명 이하의 작은 마을이면서 예술, 과학, 역사, 풍경 등 나름 까다로운 심사를 통해 프랑스 전역에서 150여개 정도의 마을에만 이 수식어를 사용할 수 있게 허락하는데 고르드와 루시옹 모두 이 수식어를 사용할 수 있는 마을로 선정되어있다.


누군가는 프로방스 여행은 이런 마을들을 경험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정말이지 아비뇽과 엑상 프로방스 사이의 요 정겨운 마을들은 보석같다는 표현이 아깝지 않다. 나도 피터 메일처럼 마음에 드는 마을을 만났을 때 선뜻 눌러 앉을 수 있는 날이 올까. 쉬이 답을 할 수는 없겠지만 언젠가 한 번쯤은 꼭 그럴 수 있기를 바래본다.


※ 뤼베롱 지역은 대중교통으로 접근할 수는 없는 지역이어서 아비뇽이나 엑상 프로방스에서 출발하는 뤼베롱 투어상품을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좀더 느긋하게 둘러보러면 렌트카가 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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