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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예 Mar 04. 2019

걸음 걸음 예술이 뚝뚝

15 파리, 몽마르뜨 언덕을 걷다

파리에 오기 전 파리 미술관, 특히 루브르에 대해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루브르만 해도 제대로 보려면 일주일은 필요하다' 거나 '전략적으로 관람해야한다'는 그런 이야기들. 하지만 일주일을 오롯이 루브르에 쏟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거니와 어떤 작품이 어느 방에 있는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전략을 세운다는 말인가? 하는 의문은 항상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작전 씩이나 짜야한다는게 조금 싫기도 했다.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인 것은 인정하지만 이번엔 차분하게 몽마르뜨를 걷는 쪽을 택했다.

  

몽마르뜨는 파리의 북쪽 끝 지역이자 지대가 가장 높은 동네이다. 19세기 무렵, 파리 시내에 방 한칸 얻을 여유도 없었던 가난한 예술가들이 상대적으로 집세가 저렴한 몽마르뜨에 모이면서 몽마르뜨는 가난한 예술가들의 사랑방이 된다. 피카소, 고흐, 르누아르, 모딜리아니, 모네 등 이름만 대면 알법한 많은 화가들이 몽마르뜨에서 거주하거나 몽마르뜨에서 활동하거나 몽마르뜨를 배경으로 작품을 그리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몽마르뜨를 거쳐갔다.


그냥 봤다면 ‘예쁘네’하고 말았을 분홍빛 라메종 로즈. '장미의 집'이라는 이름의 오래된 카페는 몽마르뜨의 뮤즈이자 연인으로 불리는 수잔 발라동이 그녀의 아들 모리스 위트릴로와 살았던 집이다.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채 가난한 세탁부의 딸로 태어난 수잔 발라동. 서커스단의 곡예사로 활동하다 15살 무렵 부상을 입고 더 이상 서커스를 계속할 수 없게 되자 몇몇 화가들을 위한 모델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게된다. 당시 화가와 모델은 육체적인 관계로 발전하는 일이 흔했고 더욱이 수잔은 특유의 묘한 매력 때문에 금새 여러 염문설의 주인공이 되었다고. 수잔은 르누아르를 위해 모델을 서기도 했는데 르누아르의 부인이 수잔을 극도로 싫어했다(요즘말로 하면 극혐)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수잔은 18살이 되던 해, 아들 위트릴로를 낳으면서 미혼모가 되지만 이후에도 계속 모델일을 했으며 대도시의 밤 문화를 아름답게 그려내는데 일가견이 있었던 화가 툴루즈 로트렉과 동거했다. 그와 헤어진 후엔 신고전주의 음악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에릭 사티와도 동거했지만 6개월 만에 헤어지는 등 이런저런 남자들을 여럿 거쳤다. 그녀의 마지막 사랑은 아들의 친구이자 화가였던 21세 연하남 앙드레 우터였다.


수잔이 몽마르뜨의 뮤즈나 연인으로 불리는 것은 그녀의 화려한 남성 편력이나 그녀를 모티브로 한 수많은 예술 작품들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는 모델 일을 하며 화가들의 작품을 눈동냥, 본인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결국 화가가 되었다. 대담하고 두꺼운 선과 화려한 색채를 활용한 여성의 누드, 그 중에서도 자신의 누드를 주로 그렸으며 그녀의 아들인 모리스 위틀릴로가 화가가 된 것 역시 그녀의 영향이 컸다고 전해진다.


밑바닥 생활을 전전했지만 정식 미술 교육을 받은 이들도 쉬이 입성하지 못한 내셔널 살롱에 여성 최초로 이름을 올린 수잔 발라동의 이야기를 알고나면 예쁘기만 했던 분홍빛 카페는 사연 있는 장소로 다시 보인다. 그닥 멀지 않은 곳에 에릭 사티의 집도 위치해있는데 이 집에는 여전히 누군가가 살고 있다. 자전거를 타고 온 아저씨가 아무렇지 않게 쑥 들어가버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라 메종 로즈와 에릭 사티의 집 외에도 당시 예술가들의 만남의 장이었던 라팽아질 캬바레와 물랭 드 라 갈레트, 피카소가 <아비뇽의 처녀들>을 그린 곳으로 알려진 세탁선, 한국에서 뮤지컬로 유명한 <벽을 뚫는 남자>를 형상화한 조각상, 기구한 삶을 살다간 프랑스의 국민 가수 달리다의 집 등 엄청나게 많은 이야깃거리 들이 몽마르뜨에 자리잡고 있다.


꼭 '누구누구의 집'이라거나 '누구누구가 무엇을 했던 곳'이 아니어도 이 언덕 전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아름답기에 골목골목을 산책하는 것만으로 그 분위기에 흠뻑 젖을 수 있긴 하지만 걷는 길, 보이는 풍경 모두에 사연이 있는 곳은 흔치 않다. 이는 이곳이 몽마르뜨여서 가능한 일일 것이다. 특히 쓸쓸한 듯, 촉촉한 듯한 이곳 특유의 공기가 끝나가는 가을과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지금의 몽마르뜨는 한 눈에 아름다운 파리 시내 전경을 담을 수 있는 언덕이자 예술과 낭만이 있는 곳으로 통한다. 그 시절 그 언덕을 거닐었던 예술가들의 자취를 따라 그들의 인생을 엿볼 수 있으며 프랑스 인들이 가장 그리워하는 파리의 모습을 품고있는 동네. 루브르를 포기한 것이 전혀 아쉽지 않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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