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중석 <한국현대사 60년>
(2014년에 썼던 걸 살짝 다듬었습니다)
나는 이승만, 박정희로 이어지는 독재 정권을 경험해 보지 못한 세대이다. 이미 절차적 민주주의가 도입된 이후에 청년기를 맞은 소위 X세대, 그 중에서도 가장 어린 X세대에 속한다. 때문에 민주화 운동의 경험도 없고, 민주주의는 항상 있어왔던 것이라 생각했기에 소중함도 몰랐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과 그에 이어지는 박근혜 정권에서 버젓이 자행되고 있는 역사왜곡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지난 역사를 제대로 알려주는 이러한 저서들이 널리 읽혀야 한다. 이 책을 통해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경험과 성과, 한계를 앞으로 이 땅에 살아갈 나와 나의 후배, 그리고 자녀들과도 공유하고 싶다.
1960년대 이후의 대한민국 현대사는 민주화운동의 역사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 이전의 현대사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기에 이 책에서는 해방 시기부터 민주화운동이 극단으로 치닫던 1980년대, 그리고 그 이후의 사건들까지를 다루었다고 한다. 우리의 선배들이 살아왔던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것은 내가 앞으로 내딛을 한 발자국에 기초가 된다.
이 책은 해방 시기와 이승만 독재, 4월 혁명과 민주주의, 박정희 군부정권, 유신체제와 반독재 투쟁, 광주민주항쟁에서 6월 항쟁, 민주주의의 진전과 남북화해까지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시기별로 일어났던 다양한 민주화운동을 시대순으로 정리하여 소개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가 지나왔던 흔적에 대해서 알고 기억해야 할 것이다.
비극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한국 현대사는 일본 식민지 통치 기구를 답습해버린 미군정에서 출발한다.미국은 일본의 패배 후 해방된 남한을 통치하기 위해 일제에 복무했던 친일관리들을 계속 사용했다. 친일을 했던 이들은 미군에게도 그렇게 할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미국과 소련의 힘싸움에 밀려 해방의 기쁨을 누린 것도 잠시뿐 한국은 남과 북,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나뉘고 말았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반공국가 건설에 박차를 가하느라 친일파 처리는 흐지부지되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북은 전쟁을 일으켰다. 이 참혹한 전쟁은 북한과 남한 둘 다에 쉽게 치유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서로 자신들의 체제로 통치하려는 지도자들의 욕심은 애꿎은 시민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국가적 폭력을 이용하여 국회를 비롯해 자신에게 반하는 세력을 가차없이 처단했다. 이승만은 억지 개헌, 경찰을 활용한 폭압 등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영원히 유지하고자 했다. 게다가 반공을 위해 국가보안법이라는 악법을 만들기도 하였고 거기에 자신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는 언론규제조항까지 추가했다. 여전히 청산되지 않고 있던 친일파들을 중용하여 맹목적인 충성을 얻고자 했다. 이 때에도 이승만의 딸랑이들이었던 자유당은 똘똘 뭉쳐 자신들의 이승만을 지키려 했던 반면, 민주당은 대통령 및 부통령 후보 선출에 대해 분쟁을 해소하지 못했다. 요즘의 상황과 꽤나 유사한 모습이라 생각된다.
독재로 치닷던 이승만 정권의 비열한 행동에 대구 경북고 학생들은 60년 2월 28일 시위를 일으켰다. 이렇게 촉발된 학생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승만과 그 추종세력들은 부정선거를 통해서 권력을 유지하려 하였으나 시민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1차 마산 시위 도중에 실종되었던 김주열 학생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마산의 학생과 시민들은 대규모로 시위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이 시위를 폭동으로 규정하고 배후에 공산당이 있다는 혐의를 씌우며 위협했다. 이는 결국 1960년 4월 19일 고등학생, 대학생 그리고 시민들에까지 확장된 대규모의 시위로 이어졌고, 이 혁명을 통해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4월에 있었던 혁명은 순수하고 정의감이 강한 고등학생들로부터 시작되어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전 국민적 투쟁으로 확대되었다. 하지만 1960년 4월 혁명은 완성에 이르지 못했다. 혁명 후 과도 정부는 이승만 시대의 잔재를 청산하지 않은 채 국정을 유지했고, 국회 역시 권력 쟁취만을 위한 아전투구를 일삼으며 혁명으로 싹트기 시작했던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을 소멸시켜 버렸다.
그렇지만 혁명 후 한국 사회에는 국민들에 의한 민주주의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교원 노조를 비롯한 노동 운동이 활발해 졌고, 통일에 대한 논의도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허나 1961년 5월 16일 김종필, 길재호, 김형욱 등을 필두로 하는 군부 세력은 박정희를 지도자로 내세우며 쿠데타를 일으켜 혁명의 불씨를 완전히 잠재워 버렸다. 이 쿠데타로 대한민국은 군사국가가 되어버리는 비극을 맞이했다. 이들은 극우반공체제를 이승만 시기보다 더욱 강화시켰고, 3.15 부정선거를 주동했던 세력들보다 진보적 민족주의자들을 더욱 심하게 단죄하는 모습을 보였다. 국가보안법에 더해 반공법을 제정하여 시민의 자유를 더욱 억압하였으며 이 법들에 기초한 중앙정보부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다.
군부 정치 시대의 혼란이 지속되었지만 결국 1963년 12월 17일 박정희는 대통령에 취임했다. 군사 정권을 마무리한다고는 했지만 청와대비서실, 경호실, 중앙정보부, 공화당 요직은 군복 벗은 군인들이 대부분 차지하도록 하여 여전히 군사문화가 지배적인 정치를 유지하였다.
일제 시대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나온 박정희의 등장을 일본은 반겼다. 박정희 역시 취약한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한 경제 발전을 위해서 일본의 도움이 필요했다. 박정희는 한일 회담 타결을 위해 애썼으나 반일감정에 차 있는 국민들은 반대투쟁을 일으켰다. 한일 회담 굴욕 외교 반대 투쟁이 확산되자 박정희는 서울 일원에 계엄령을 내린다. 결국 1965년에 한일협정이 체결되면서 일본의 사죄문제는 애매하게 넘어가 버렸다. 이러한 결정에도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많은 반대 투쟁이 있었으나 박정희 정권을 멈추지는 못했다.
베트남 파병 문제에 있어서도 박정희 정권은 무조건 밀어부쳐 많은 사람들이 현재까지도 고통속에 살아가도록 하는 결정을 내리고 만다. 1967년 치러졌던 총선은 1960년 이승만의 3.15부정선거 다음으로 최악의 후유증을 낳았다. 금권, 관권, 선심공약, 중앙정보부의 간첩단 사건 등으로 점철된 총체적 부정선거였다. 강도의 차이가 있어보이기는 하지만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던 2012년 대선때의 모습과 겹쳐지는 부분들이 있어 보인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것을 대한민국 시민들에게 제대로 알려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박정희는 독재를 이어가기 위해 1969년 3선 개헌도 추진했다. 권력을 향한 이 끊임 없는 노력은 대체 인간 본성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놀랍기만 하다.
1971년 대선에서는 김대중이라는 새로운 바람이 일었다. 대통령은 그대로 박정희가 되었지만 총선에서는 야당의 집안 싸움에도 불구하고 사상 처음으로 여당과 야당 국회의원수가 131석 대 89석으로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1971년에는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강하게 일어났다. 하지만 박정희는 이러한 요구에 더 강력한 탄압으로 맞섰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국회를 해산시키고 헌법 일부 조항의 효력을 정지시킨다는 특별 선언을 발표하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10월 27일 비상국무회의는 헌법 개정안을 의결해 공고하고, 11월 21일에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했다. 유신헌법에서 대통령은 국회의원을 3분의 1임명할 수 있었고, 대법원장과 법관의 임명권까지 부여되어 입법·사법·행정 3권을 한 몸에 장악했다. 국회의 권한은 현저히 약화되었다. 이런 권한에다가 긴급조치권·국회해산권·법률안거부권까지 갖는 대통령을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허수아비 기구에서 선출하게 했다. 박정희는 이 유신체제를 통해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완벽하게 말살해 버리고 제왕의 자리에 올랐다.
공고해 보였던 유신체제는 1973년 실패로 돌아간 김대중 납치사건을 계기로 그 야만성이 국내외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유신 반대 시위가 전개되었다. 여러 반대 투쟁을 맞닥뜨린 박정희는 1973년 1월 8일 긴급조치를 통해 유신헌법을 부정·반대·비방하는 자는 최고 징역 15년형에 처할 수 있고, 자격정지 15년을 병과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 보통군법회의와 고등군법회의를 설치할 수 있게 하였다.
박정희는 유신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사건을 조작해 반대투쟁을 강압적으로 잠재우려 했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행사 때 부인 육영수가 총에 맞아 사망하게 되는데, 이 때 범인이 재일교포 문세광인 것으로 발표되어 반일감정이 극대화되면서 한동안 반 유신 시위가 잠잠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천주교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 관련으로 구속되자 그 해 9월 26일 서울 명동 성당에서 유신헌법 철폐와 지 주교 등의 즉각 석방을 요구하는 신부와 수녀, 평신도의 시위가 있은 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출범했다. 이 단체는 유신체제를 가차없이 비판하면서 인혁당 사건 등의 진상규명을 요구한 가장 투쟁적인 반유신단체였다.
1975년 5월 13일에는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되어 유신헌법을 반대하는 활동을 일체 금지시켰고, 그런 활동을 보도하지도 못하게 했고, 이 조치를 위반한 사람은 영장 없이 체포해 징역에 처했다. 박정희에게는 운 좋게도 인도차이나가 공산화되면서 보수 반공세력이 위기감을 퍼트려 반유신 활동의 범위가 크게 축소되었다. 그렇게 2년 여가 흐르면서 1977년 가을부터 학교들을 중심으로 반유신 투쟁이 되살아 나기 시작했다.
1978년 12월 12일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민당이 공화당을 1.1% 앞서는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며칠 후 박정희는 12월 27일 유신대통령에 취임하였다. 하지만 이후 반유신 투쟁과 민주화 운동은 점점 확산되어 갔다. 김영삼은 1979년 5월 30일 김대중 등의 지원을 받아 신민당 총재로 선출되었고 점차 박정희와 각을 세우게 되었다. 그 해 10월에 부산과 마산,창원지역에서 격렬한 시위가 발생하였고 박정희는 여전히 군대를 투입해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이 부마항쟁 후 곧 열린 1979년 10월 26일 청와대 옆 궁정동 중앙정보부 별관에서 대통령, 비서실장, 경호실장, 중앙정보부장과 2명의 여자가 참석하는 '대행사'가 열렸다. 그곳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그 동안 갈등을 빚어왔던 경호실장 차지철을 총으로 쏜 후 박정희도 쐈다. 이렇게 권력에 눈이 멀어 한 나라를 다 가지려 했던 박정희는 사라졌다. 혹자들은 박정희가 경제 정책을 잘 펴서 나라를 잘 살게 했다고도 주장하곤 하는데 실제적으로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있던 시기 전체를 보면 경제 운용도 엉터리였음을 알 수 있다. 박정희라는 허상에서 대한민국 국민들이 도대체 어떻게 하면 벗어나게 될 것인지 걱정이다. 이런 엉터리 독재자 덕에 그의 딸 박근혜는 현재 대통령 노릇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라는 괴물은 사라졌지만 독재라는 괴물은 여전히 건재했다. 그 해 12월 12일 역시 군인이었던 전두환 일당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들은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유신헌법 내 조직을 통해 최규하를 대통령에 앉혔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영삼과 김대중은 서로 각자의 길을 걸으며 대권을 향해 나아갔다. 한편 전두환의 신군부 세력의 권력 장악에 맞서 노동자, 대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투쟁을 했으나 군사력을 앞세운 쿠데타 세력을 막아서지는 못했다.
특히 광주에서는 대학생들이 모여 민주화를 위한 시위를 이어가고 있었다. 계엄사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5월 18일 공수특전여단 2개 대대를 '충정작전' 암호명 '화려한 휴가' 아래 전남대, 조선대, 광주교대에 투입시켜 학생들을 체포했다. 다음 날 군인들은 시위대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무자비한 폭행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만행에 분노한 광주 시민들은 분노하여 저항을 시작했다. 거세게 일어난 민중들의 투쟁에 전두환은 군대를 더 투입하여 시민들과 전쟁을 벌였다. 한 때 도청을 시민들이 접수하기까지 했으나 군대에 맞서 장기간을 유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광주 민주항쟁은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원천이 되었다.
전두환 신군부는 일종의 군사혁명위원회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설치하고 광주 민주항쟁을 내란이라 규정하고 관련자들을 처벌했다. 언론, 출판에 대한 대대적인 압제를 가했고, 298명의 언론인을 언론사에서 추방했다. 삼청교육대라는 반인륜적 제도도 만들어 순화교육이라는 미명하에 인권을 유린했다.
1980년 8월에는 최규하가 대통령을 사임하고 27일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1981년에는 비상계엄령을 해제하고 미국에 가서 레이건 대통령을 만나고 나서 2월 11일 5,278명의 선거인단 선거를 거친 뒤 새로 대통령에 취임했다. 1981년 3월 25일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군부가 정당도 만들어줬다. 여당 민주정의당(민정당), 1야당 민주한국당(민한당), 2야당 한국국민당(국민당)을 만들게 했다. 진보세력의 출연에도 대비해 민주사회당(민사당)도 만들도록 했다. 그렇게 해서 선거 결과 총 151석을 얻게 되었다.
전두환 군부에 대한 투쟁도 계속되었는데 전두환 정권은 강제 징집 등으로 대응하였다. 이 시기 반미 시위도 격렬했다. 1980년대 중반에는 학생운동, 청년운동, 사회 각 부문 운동 등이 민주화 운동의 일환으로 활기차게 전개되었다. 1985년 2월 12일 총선은 신군부 장기 집권에 커다란 타격이 되었다. 김대중, 김영삼의 신한민주당(신민당)이 돌풍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때 신민당은 50석을 확보해 1야당이 되었다. 총선 이후 대학가에서도 학생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광주학살에 대한 처단을 요구하는 투쟁등이 이루어졌다.
1986년 2월부터 직선제 개헌서명 운동이 시작되어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이 시기에 신민당과 학생운동권, 재야운동권이 반독재민주 연합의 취지 아래 직선제 개헌운동에 함께 했는데 5월 3일 인천에서 열린 개헌추진 경기,인천지부 결성대회에서 갈라서게 되었다. 같은 해 4월 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자민투)가 결성되고 곧 이어 반제반파쇼민족민주투쟁위원회(민민투)가 조직되면서 전국 대학가 운동권은 이 두 조직으로 나뉘게 되었다.
전두환 때에도 이명박이 부활시키고 박근혜가 이어가고 있는 언론 통제 및 관제 언론의 정권 업적 과대홍보가 있었다. 전두환 정권에 대한 불만이 198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커져갔다. 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경찰의 물고문으로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것을 계기로 시민들이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전두환은 그해 4월 13일 개헌 논의를 금지하고 현행 헌법으로 대통령 선거를 하겠다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였다. 이에 대한 저항으로 범국민적인 개헌운동, 즉 민주화운동이 촉발되었다.
6월 9일 연세대 시위에서 이한열이 최루탄을 맞고 피흘리며 쓰러지는 사진은 학생들을 궐기시키는 데 폭발적인 위력으로 작용했고, 학생과 시민의 일체감을 형성시켰다. 민정당 대통령부호 지명대회가 열린 6월 10일 각 지역에서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열렸다. 이는 6월 민주 항쟁의 시작이었다. 경찰의 진압으로 수그러드는가 싶었던 시위는 6월 15일부터 다시 커지기 시작해서 17일에는 70개 대학이 시위에 참여했다. 6월 18일 시위에는 16개 도시에서 150만명이 참가했다. 날이 갈수록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6월 26일 민주헌법 쟁취 국민평화 대행진이 33개 도시와 4개 군, 읍 등에서 열렸다.
전두환 정권은 6월 항쟁에 굴복해 민정당 대통령후보 노태우로 하여 6월 29일 시국수습방안을 발표하게 했다. 이 선언은 여야 합의에 의한 대통령직선제 개헌 후 대통령 선거 실시, 대통령 선거법 개정, 김대중 사면, 복권과 시국사범 대폭 석방, 인권 침해 시정을 위한 제도적 개선, 언론기본법 개폐 등으로 언론 자유 확보, 지방자치제, 교육 자치에 조속 실시, 정당 활동 보장, 사회정화조치 강구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6월 항쟁은 독재정권의 장기화나 독재정권의 통제, 17년 전까지 있었던 직선제가 실시되지 않고 계속 체육관 대통령이 나오는 것에 대한 불만이 컸기에 대대적 시위가 되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장기 독재 등으로 인해 침체된 시민 의식이 정치의식을 고양시키는 데에는 제약으로 작용했다는 것은 6월 항쟁 직후 치러진 대선과 총선에 표출된 심각한 지역주의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60여년 이라는 짧은 시기에 대한민국이 이렇게도 비극적인 역사를 거쳐왔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여전히 청산되지 않은 친일파, 국민은 안중에 없는 정치인들, 고착화된 지역주의, 사회 곳곳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들의 정신에 여전히 남아 있는 군사 문화, 권력 유지를 위한 언론 지배와 사실 왜곡, 정부 기관들의 사건 조작, 국가 권력에 의한 시민 자유 제한 등은 2014년 지금에도 계속되고 있다.
특히 선거 시기에 벌어지는 각종 부정들은 과거 독재정권 시절 만큼은 아닐지라도 여전히 현 시대에도 과거의 잘못된 유산으로 남아 있다. 부정한 권력에 끊임없이 저항하고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지속해 왔던 것은 다름 아닌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각 국민들 한사람 한사람이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현재 대한민국에도 벌어졌고,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각종 권력형 비리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바로잡을 주체 역시 대한민국의 일원인 우리 국민들이다. 권력의 충실한 종이 된 언론, 사법부, 경찰 등에 종사하고 있는 양심이 살아 있는 시민들이 저항해야 할 것이며, 정치 권력보다 더 큰 영향력과 지배력을 가진 자본 권력에 대한 감시와 견제도 역시 그 안에 양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구성원들이 함께 모여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이 사회를 올바른 길로 돌려놓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