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어수업(한동일)
제목만 보면 겁이 날지도 모르지만, 사실 책이 어렵지는 않다. 쉬운 문장으로 쓰인 이 책에서 저자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있다. 바로 '라틴어는 어렵다'는 것이다. 조직적이고 수학적인 언어로 칭송받는 라틴어는 모든 상황에 일대일로 대응하는 문법이 있기에 학습자는 복잡한 문법표를 모두 암기해야만 한다. 동사 하나의 변화가 160여 개에 달하고, 명사도 성과 수에 따라 어미변화를 하며, 격변화는 여섯 개나 있다. 동사와 명사에 대한 아주 간단한 설명인데도 벌써 머리가 아파온다. 그래서일까? 저자도 라틴어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보다는 이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라틴어를 통해 독자에게 보여준다.
저자는 라틴어의 복잡한 체계 때문에, 유럽의 인문계 고등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공부하는 습관과 태도를 라틴어를 통해 가르친다고 말한다(71-72). 처음 접했을 때 매우 거대해 보이는 라틴 문법과 문학을 보면 자연스레 겸손해지기 때문이다. 사실 언어를 공부하는 것만큼 성실함이 요구되는 일이 없다. 매일매일 단어를 외우고 문장을 읽으면 조금씩 실력이 쌓이지만, 조금만 미루면 그동안 모아 온 정보가 순식간에 휘발되기 마련이다. 수련하고 훈련하는 마음으로 공부하는 자만이 언어를 정복할 수 있다. 이렇게 고생 끝에 어느 정도 경지에 다다르게 되면 비로소 세상을 보는 눈이 탁 트인다. 그래서 장인은 세상을 보는 시각이 남다르다. 깊이가 생기는 만큼 나의 노력을, 인생의 중요한 부분이 된 나의 실력을 그리고 나를 사랑하게 된다. 오랜 시간 함께 동고동락한 전우애가 생기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고생 끝에 무언가를 성취한 수고와 기쁨을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수고와 성취 역시 무시하지 않고 존중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내가 어려운 일을 해냈듯이, 다른 사람도 어려운 일을 해낸 것이다.
독자로서 나는 이 책을 인생, 특히 공부하는 인생에 대한 입문서로 읽었다. 공부란 무엇인지, 지금 여기(hic et nunc)에서 삶이란 무엇인지, 진리란 무엇인지 등의 질문에 조그마한 해답을 얻은 기분이다. 이제부터는 책을 읽으며 특별히 인상 깊었던 부분과 기억해둘 만한 내용을 글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질문 하나, 공부란 무엇인가?
저자는 언어 공부를 비롯하여 대학에서 학문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양적으로 늘리는 것이 아니라 '틀을 만드는 작업'이라 말한다(27). 그리고 이 작업을 마치면 두뇌가 활성화되고, 사고 체계를 넓혀준다. 저자의 핵심은 '공부하는 것'이 단순히 지식을 쌓는 것만은 아니라는 데에 있다. 요즘은 많이 줄었다지만, 아직도 우리나라의 대학진학률은 70%를 훌쩍 넘는다. 더 큰 공부를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대학에 왜 가야 하는지 모르고 가는 이들이 태반이다. 그저 취업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우리 사회의 대학은 '취업사관학교'가 되어 사회의 부품을 생산하는 공장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대학의 소명은 학생들에게 공부하는 법을 알려주는 일이다. 이는 단지 지식을 쌓아 올리는 일에 그치지 않고 학생 스스로 생각하는 법과 글 쓰는 법을 배우고 자기의 인생을 사랑하는 법을 알려주는 일이다. "Non scholae sed vitae discimus(우리는 학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을 위해서 배워야 한다.)."
20대 초반의 청년을 만나서 나중에 무얼 하고 싶냐고 물으면, 열에 아홉은 돈을 많이 벌고 싶다고 말한다. 많은 돈으로 무언가를 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일단 돈을 많이 벌고 생각해보겠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묻고 싶다. 돈을 많이 벌면 무엇을 하고 싶을지 이것저것 떠오를까? 돈이 많아지면 나의 꿈이 커질까? 대부분의 병사들이 전역을 외치며 살지만, 막상 전역하면 무얼 할지 고민하는 것과 똑같다. 잘 먹고 잘살겠다는 개인의 열망을 누가 뭐라 할 수 있나. 그러나 사회의 모든 이들이 이처럼 맹목적으로 자기만 잘살겠다는 생각으로 산다면 미래는 어두울 것이다. 공부는 나의 시야를 넓히는 일인 동시에 나의 분야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발견하는 것이다. 나의 능력을 나만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을 위해 자기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 진정 공부를 제대로 한 사람이다.
질문 둘, 지금 여기(hic et nunc)에서 삶이란 무엇인가?
"Si vales bene est, ego valeo(당신이 잘 계신다면, 잘 되었네요. 나는 잘 지냅니다.)." 이 문장은 로마인들이 편지를 쓸 때 첫머리에 인사말로 애용하던 문구다. 타인의 안부를 먼저 살피고, 그로 인해 나 역시도 안녕하다는 말은 왠지 모르게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다. 내가 먼저 만족해야 하고 나의 시야에 타인이 사라진 요즘, 우리의 삶이 위태롭게 여겨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현대인이 다른 사람을 살피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로마인보다 나쁜 사람인 까닭이 아니라,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물질적으로는 전에 없던 풍요와 여유를 누리지만, 마음의 여유는 점점 사라지면서 바쁜 사회 속에서 빈곤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연애, 결혼, 출산 등을 포기하는 이른바 'N포세대'인 청년들은 희망도 꿈도 없는 미래를 바라보며 현실에서 여유를 잃어간다. 이렇게 각박해지는 사회에서 우리는 라틴어 서간 인사말을 통해 공동체 의식을 다시 고양하고 삶의 여유를 가져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이런 여유 없음의 증상일까? 현대인은 사회를 향한 나눔의 손길을 내밀기보다는 내 울타리를 더 튼튼하게 만들기 위해 기를 쓴다. 여유가 없다고 느낄 때, 다른 사람을 살피며 함께 나아갈 생각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를 스스로 가둔다. 성찰하기보다는 자신의 눈을 가린 채 성장만을 쫓는다. 일례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는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에 봉착했을 때 해답을 찾기 위해서 종교인, 사상가, 철학자가 하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요즘은 거대 기업인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물론 그들이 하는 말도 가치가 있지만 이런 현상을 보면 무언가 씁쓸하다. 우리에게 남아 있던 작은 여유마저 제거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를 쫓아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언가를 쫓도록 한다. 철학과 사상은 우리가 가는 방향이 맞는지 점검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이런 고민이 없을 때 우리는 여유를 잃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착각한다. 나에게 먼저 안정적인 삶, 평온한 삶이 자리 잡아야 비로소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런 시간은 잘 오지 않는다. 어쩌면 끝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왔다고 하더라도 이미 필요가 없거나 늦어 버렸을지 모른다(87). 마찬가지로 내가 먼저 여유를 찾은 뒤에 이웃에게 손을 뻗겠다는 것은 손을 뻗지 않겠다는 말과 거의 다르지 않다. 당신이 잘 있기에 내가 잘 지낸다는 말처럼, 내가 먼저 당신을 잘 지내도록 만드는 삶은 나에게 여유를 가져올 것이라 믿는다.
질문 셋, 진리란 무엇인가?
책을 읽으며 느낀 한 가지 최고의 진리는, 삶 그 자체가 희망이라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다양하게 살아간다. 세계를 여행하며 사는 사람도 있고,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며 행복을 얻는 사람도 있고, 목표한 바를 성취하기 위해 사는 사람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즐거움을 위해 사는 사람도 있다.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우리는 의미 있는 삶을 원한다. 그리고 무언가를 희망한다.
삶은 그 자체로 귀하고 아름답지만, 누군가는 자신의 삶이 죽음보다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삶에서 희망을 찾지 못한 것이다. 저자 역시 자신의 삶을 포기하려던 순간이 있었지만, 라틴어 문장이 자신을 잡아주었다고 고백한다. "Letum non omnia finit. Dum vita est, spes est(죽음이 모든 것을 끝내지 않는다. 삶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 인간은 살면서 크고 작은 고통과 상실을 경험한다. 이런 고통의 상황에서 희망을 발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시각을 뒤집어보자. 고통이 있음은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살아 있는 사람만이 고통을 느끼는데, 고통이 없는 삶을 바란다면 그것은 모순이다(87). 때로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절망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것 같다. 그러나 고통은 생에 대한 이해와 깊이를 남다르게 만들어 주기에 우리에게 필요한지도 모른다.
희망은 절망을 배경으로 한다. 절망 속이라도 그저 살아 있다는 이유로 우리는 희망을 품을 씨앗을 심은 것이다. 살아 있기 때문에 우리는 무언가를 희망할 수 있다. 따라서 삶은 그 자체로 희망이다. 그러나 이 희망은 거저 자라지 않는다. 풍성한 열매를 맺으려면 좋은 토양과 적당한 양분이 필요하듯이, 희망이라는 씨앗은 믿음이라는 양분을 필요로 한다. 믿음이란 단순히 바라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아니다. 현실의 절망을 초월하고자 하는 간절함과 애절함이다. 그저 살아 있다면, 그리고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다면, 삶은 지속되고 오늘과 내일을 살아가는 힘의 원천이 된다.
우리의 삶은 '공부'로 채워져야 한다. 라틴어든, 법학이든, 역사학이든, 공학이든, 자연과학이든 상관없다. 우리는 계속해서 시야를 확장해야 한다. 공부하는 삶은 우리에게 여유를 가져다주며 고통이 찾아오더라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사고의 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세상을 공부하며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또 풍성하게 채워가면, 우리 사회도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