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달라졌나 했는데 그냥 약간 파니니 정도
통 글을 쓸 짬이 없었다. 진짜 시간 여유가 없었다는 건 아니고, 몸이나 마음이나 일을 끝내고 나면 손에 어느 것도 잡히질 않았다. 잠만 자거나, 생각할 필요도 없이 멍하니 TV만 들여다봤다. 큰일이 여러 가지 있었다. 개인사도 그렇지만 직업적으로 더 그랬다. 그렇게 두어 달을 보낸 지금도 여전히 헤매고 있어서 도저히 글감을 고를 수가 없었다. 지금 하는 업무는 여전히 모르는 것 투성이라서. 이제야 문득 내가 처음에 브런치에 글을 왜 쓰기 시작했는지 기억났다. 그냥 좌충우돌로 부딪혀보는 내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건데. 그래서 요즘 얼마나 부딪히고 있는지 두서없이 써볼까 한다. 처음으로 글감도 안 잡고, 얼개도 안 짜고 마음 가는 대로.
사원이나 대리나 사실 말단인 건 거기서 거긴데 드디어 뭔가 직급이라는 게 붙었다. 아닌 척하지도 않고 대놓고 기대해왔지만 막상 진짜 진급을 하니 기분이 묘했다. 발표가 날 때 회사에 다 같이 있어서 축하를 받을 줄 알았지만 코로나로 인해 모두 자가격리 중이었고, 생각보다 그냥저냥 조용히 지나갔다. 나도 엄청나게 들뜨고 신날줄 알았는데 그냥 살짝 기분 좋고 말았다. 나를 예측하는데 실패한 건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다. 사실 가족이나 친구들보다 같이 일하던 분들에게 당연한 결과라고 인정받는 게 기분이 그보다 좋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 해 온 걸 이렇게 보상받는구나 싶기도 하고. 역시, 코로나로 인해서 아직도 승진턱은 못 냈지만.
기분이 엄청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담스럽기도 하다. 나도 아직 내 이름 뒤에 대리가 붙는 게 어색한데 사람들은 잘도 대리라고 불러줬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사원 나부랭이라며 웃고 넘길 수 있었던 일도 피할 수 없을 것처럼 느껴졌다. 혼자만의 생각일 수도 있지만. 대단한 자리에 간 건 아니지만 회사에서 직급을 붙이고 연봉을 올려줬는데 그만큼을 더 해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급하고 불안한 것도 사실이다. 지금까지 보다 더 잘, 더 안정적으로 해내야 한다는 생각.
사실 대단한 인사 발령도 아니었지만. 대충 귀띔이 있어서 알고는 있었다. 그렇게 사랑하던 우리 팀을 떠난 것도 아니고, 담당을 바꿨다. 위아래 사람이 동시에 바뀌었고, 내가 하던 업무는 그대로 왔지만 원래 내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업무도 내가 메워야 했다. 문제는 그게 두 명분이었다는 거지. 심지어 그중에 한 명은 우리 부문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대리님이었다. 회사에서는 어지간히 일을 잘해서는 소문나기 쉽지 않은데, 그 사람 자리에 들어가는 게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내 의지로 그런 것도 아니지만 그 자리에 내가 왔다고 소문이 나버려서.
그나마 바뀐 상사와 그동안 친하게 지내왔고, 업무 스타일도 성격도 잘 맞는 편이라 좋았다.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그대로 볼 수 있어서 좋기는 하다. 그래도 어쨌든 자리를 옮겼으니 여기서도 잘한다는 걸 보여줘야 했다. 나를 떠나보낸 예전 담당 사람들에게도, 나를 맞이하게 된 새로운 담당 사람들에게도. 대단한 보탬이 되지는 못해도 짐이 되지는 말아야지.
사실 큰 얼개가 바뀐 건 아니다. 여전히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다만 발령과 진급 전의 나는 오로지 프로젝트만 했는데 지금은 운영 업무도 같이 하고 있다. 물론 많이 배려해주셔서 프로젝트 비중이 훨씬 높기는 하지만. 지금 진행하는 프로젝트는 예전에 진행했던 프로젝트보다 규모도, 비용도, 중요도도 훨씬 크다. 하루를 종일 쏟아도 볼 자료가 산더미고, 모르는 개념들이 가득이다. 진도를 따라가기도 벅차고 솔직히 약간 자괴감도 느껴진다. 회사의 모든 업무 프로세스를 다 알아야 하는 프로젝트라 어지간한 사람은 다 알 수 없는 거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답답하다. 내가 이렇게까지 몰라서 프로젝트를 제대로 진행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계속 든다.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건지, 잘하고 있는 건지. 아직 확신이 없어서 조금만 안 좋은 말을 들어도 쉽게 마음이 흔들린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내가 확신이 서면 그럴 일이 없는데, 아직 확신이 없다는 거겠지. 사공도 많고 솔직히 버거운 느낌도 있다. 하지만 맥없이 무너지고 놓아버리기에는 나를 믿어준 사람들이 걸린다. 그렇게 가볍게 배반할 만한 믿음은 아니다. 그 사람들을 다 떠나서, 나를 위해서라도. 이 프로젝트를 해내고 나면 우리 회사의 전체 운영 프로세스를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확신하고 단언할 수 있다. 여태까지 해왔던 어느 프로젝트보다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공감이 간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길을 찾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딱 그거 하나를 추진력으로 삼아서 달리고 있다. 연말까지 잘 달려봐야지.
다만 이렇게 프로젝트하기에도 죽겠는데 중간중간에 치고 들어오는 운영 업무를 쳐내야 하는 게 고역이다. 뭐 안 된다고 하는 오류 건도 봐야 하고, 개발 요청도 검토해야 하고, 감사에서 걸린 지적 사항 대응도 해야 하고, 이벤트 대응도 해야 하고... 운영이야 말로 화수분이다... 조금 적응돼서 이 업무를 다룰만해지면 운영 빌런들에 대해서 꼭 기록을 남기고 말 것이다...
몇 년쯤 샌드위치했으니까 이제 좀 덜 치이려나 했는데, 사실 별반 다를 바는 없고 그냥 그대로 그릴에 갖다 누른 파니니 정도가 됐다. 그냥 그릴드 샌드위치나 다를 바 없다는 말 언제쯤 덜 치이고 살 수 있으려나... 샌드위치 졸업하고 싶다. 올해는 계속 이렇게 정신없이 지나가려나. 정신없다는 생각으로 계속 글을 쓰지 않으면 이대로 어영부영 지나갈 것 같아서. 화가 나면 나는 대로, 신기하면 신기한대로 손 가는 대로 다시 글을 써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