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4월을 맞이하며...
오늘은 1200쪽이 넘는 회계 전공책의 교정과 편집이 끝나서 인쇄소에 파일을 보낸 날이야. 출판사에 출근한 지 이제 두 달밖에 안 된 내가 뭐 대단한 일을 했겠냐마는 그래도 공들여 쓴 글을 끝낸 것처럼 시원 섭섭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네.
평소 같으면 약간은 허한 맘을 달래려 너에게 전화를 했을 것 같은데, 오늘은 '집에 가서 글로 써 봐야지'하고 생각하며 퇴근을 했어. 노을을 보면서 지난 작업을 더듬어 보니 머릿속에서 이런 저런 생각들이 떠오르더라.
순간, 글쓰기라는 게 이렇게 감정과 생각들을 쉽게 툴툴 털어버리지 못하게 만드는 건가 싶어서 과연 너랑 편지를 쓰기로 한 게 잘한 일인지 후회아닌 후회를 했드랬다. 세상은 계속해서 '빨리 빨리' 많은 것들을 '쉽게 잊어버리라'고 재촉하는데 가뜩이나 쿨하지 못한 내가 계속해서 생각하고, 느끼고, 반성하게 만드는 글쓰기를 한다는 게 잘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드랬다.
그러고 나서 집에 돌아와 컴퓨터를 켜 보니 네가 먼저 글을 써 놓았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 눈에 띄더라.
2011년에 '별이 빛나는 밤'은 아니고 그와 비슷한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이 우리나라에서 전시됐었어. 고흐 그림 특유의 붓터치가 잘 드러나면서도 색감까지 맘에 드는 이 그림이 너무도 보고 싶었지.
그때도 내게 먼저 연락을 한 건 역시 정은이였어.
"은정아, 네가 좋아하는 고흐 그림이 온 거 알지? 같이 갈래?"
초등학교 6학년 같은 반에서 졸업, 중학교 3학년 같은 반에서 졸업, 고등학교 1학년 같은 반, 같은 대학교 같은 학과를 졸업한 정은이가 심지어는 같은 대학교 같은 학과 내 동기와 결혼을 했으니...
한 학년에 한 반만 있는 시골 마을에서 자란 것도 아니고, 심지어 중학교 때는 한 학년에 15반이나 있었다는 걸 생각한다면, 확률상으로 따져봐도 정은이는 내게 신께서 주신 선물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는 친구지.
그런데 이런 정은이랑 나는 그리 자주 연락을 하지는 않아. 어떤 해에는 1년에 채 다섯 번도 연락을 하지 않았던 적이 있을 거야.
대학교 1학년 때도 원래 알고 지내던 우리가 너무 딱! 붙어 다니면 새로 만난 다른 친구들이 불편해 할테니 너무 그러지 말자고 했었는데... 네 글을 읽으니 어쩌면 대학생 되었다고 고삐풀린 망아지마냥 날뛰던 나도 언제나 바르고 어른스럽게 정돈된 정은이의 모습이 부담스러웠던 것은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반면에 또 나는 끊임없이 실수하고, 갈팡질팡하는 내 모습을 다 지켜보면서도 한결같은 모습으로 옆에 있어 주는 정은이가 그렇게 편하고 든든할 수가 없었어. 열등감으로 똘똘 뭉쳐 있던 나를, 한없이 미숙했던 나를 오랫동안 고스란히 지켜 보면서도 있는 그대로 긍정해 주는 정은이가 내게는 그 자체로 커다란 위안이었어.
자주 전화해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도 늘 같은 마음으로 만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건 그 자체로 축복이지. 이런 우리가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 2011년 7월 27일이었다. 좀처럼 약속을 잘 하지 않지만, 웬만해선 한 번 한 약속이나 말은 꼭 지키려고 하는 우리는 융통성이 없는 건지, 개념이 없는 건지... 우면산 터널이 붕괴되어 인명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도 하필이면 우면산 밑자락에 있는 예술의 전당에 고흐의 그림을 보러 갔었다.
이 난리 통에 그림이 웬말이니. 결국 이날 미술관은 문은 닫혀있었어. 정은이랑 비빔밥을 한 그릇씩 간단하게 먹으며 고흐의 그림을 걱정하다가 그림도 그림이지만 이러다가는 우리가 물에 떠내려갈 판이라고 피식 웃으며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난다.
2011년은 내게 쉽지 않은 해였던 걸 너도 잘 알지. 사실, 그림을 보러 갈 때도 내 마음은 궂은 장마날씨보다 더 흐렸고, 내 머릿속은 사진 속에서 보이는 도로보다 더 어수선했어.
처음으로 담임을 맡았던 2011년, 나는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에 처한 아이를 지켜보는 게 힘들었고, 자신의 나이에 비해 힘든 삶의 무게를 짊어진 미숙하고 불안한 아이들이 좁은 교실에서 생활하며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모습이 마음 아팠다. 또 이녀석들의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내게까지 전달이 돼서 몹시도 괴로웠다.
처음에는 소위 사회에서 문제아라고 손가락질 하는 아이들이 도저히 이해가 안 가서 괴로웠고, 나중에 이 아이들의 삶이 고스란히 이해되었을 때는 내가 가진 편협한 시선으로 아이들을 재단하려 했던 게 미안해서 괴로웠다. 내가 정답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가혹한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몸살을 알았던 시절이었다.
2011년의 내 상태처럼 어수선하고 지루한 장마가 끝나고, 혼자 고흐의 그림을 보러 갔었어. 혹시, 불운한 삶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열정적으로 걸어 간 사나이에게서 고단하고 거친 삶을 살아내는 노하우를 조금이라도 배울 수 있을지에 대한 기대를 조금은 했던 것도 같아.
그런데, 지금 나는 이토록 고대했던 고흐의 그림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아. 다시 찾아간 미술관에서 나는 고흐의 그림 대신 그 옆에 있던 밀레의 '봄'을 보고 울컥 감정이 복받쳐 눈물을 쏟았드랬어.
인터넷에서 검색을 하면
프레데릭 하트만이 바르비종의 유명한 화가인 테오도르 루소에게 ‘사계(四季)’를 주제로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는데, 루소가 작품을 제작하다가 완성하지 못한 채로 1867년에 사망하자, 미완성 작품들을 밀레에게 마무리해 줄 것을 부탁했다.
라고 블라블라 더 많은 정보들이 나오더라만...
나는 그냥 파릇파릇 돋아나는 연둣빛 새싹들, 은은하게 배어나는 노란 색감이 전해주던 따뜻함, 어두운 먹구름 뒤에 있는 무지개가 좋았어.
"힘드니? 겨울이 가면 봄은 와. 우리 삶엔 먹구름도 있지만, '쨍'하게 아름다운 무지개의 순간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하는 목소리가 내 어깨를 토닥여주는 것 같기도 했지.
여름 방학 때 이 그림을 보고, 개학 후 학교에 돌아갔을 때는 미숙한 첫 담임에게도 여유가 조금은 더 생겼던 기억이 난다.
작년에 오르세 미술관에서 이 그림을 4년 만에 다시 봤을 때 조용히 읊조렸어.
"다시 만나서 반가워. 네가 전해 준 위로와 희망 덕분에 나는 힘든 시간들을 용케도 잘 이겨내고 봄을 맞아 여기에 왔단다."
보름아, 봄이고 또 4월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4월은 잔인한 달'로 시작하는 '엘리엇(T. S. Eliot)'의 시 '황무지'를 교양수업 시간에 배웠던 기억이 난다.
황무지
엘리엇(T. S. Eliot)
4월은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 꽃을 피우며
추억에 욕망을 뒤섞으며
봄비로 잠든 뿌리를 일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우리를 따뜻하게 감싸 주었었다.
망각의 눈이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으로 가냘픈 생명을 키웠다.
(생략)
황무지는 1922년 1차 세계대전 직후에 발표가 되었다고 했어. 그 해에도 정신적으로나 환경적으로 황폐해진 상황에서 황량한 겨울이 가고 봄이 오니까 어김 없이 꽃은 피었다는구나. 인간 세상에 뭔 일이 있든 아랑곳하지 않고 아름답게 피는 꽃을 보고 시인이 '잔인한 달'이라 표현했다는 이야기를 4월이 되면 종종 생각하곤 해.
네 말대로 우리 이곳에도 촛불을 켜 놓고
밀레의 '봄'을 보면서도 희망을 찾기 힘든 분들, 밀레의 그림을 보고 위안을 받았다는 내 말이 그저 배부른 소리로 들릴 분들, 여전히 잔인한 4월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분들을 생각하면서...
잊지 않겠다고 말로만 하고 그냥 잊고 사는 우리 같이
16일에는 촛불을 들고 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