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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chaela Apr 11. 2016

내겐 너무나 따뜻한 너

뽈~~~

벚꽃은 절정인데 스모그 플러스 황사가 아쉬웠던 주말을 너는 어찌 보냈니? 나는 어제 진하게 걸었단다. 네가 아닌 부모님과 함께 진하게 걸었단다.


과년한 처자가 벚꽃 만개한 윤중로를 2년 째 부모님과 걷는다는 게, 축복인지 저주인지는 모르겠더라만...

작년에 사진을 찍었던 나무 앞에서 동일한 포즈를 취하라고 요청하는 김 작가(=자칭 사각 프레임의 마술사 = 포토그래퍼 김은정 = 나)의 말에

"아 굳이 뭐..." 하면서도 "허허"하며 자리를 잡는 아빠와 함께하는 시간은 확실히 행복했어.

사진을 찍을 때면 꼭 아빠를 앞세워 자신의 똥배를 가리는 엄마가

"우리 여기 3년 째 오는데, 해마다 이렇게 오자. 나이 더 들어서 꼬부랑 할머니가 될 때까지"

하며 굳이 허리를 꼬부리는 액션까지 더했을 때, 나는 확실히 행복했어.



무엇보다도 행복하게 만든 건, 엄마의 여유였어.




네가 과하게 미적 감각이 있다고 표현해 줬다만... 확실히 내가 아름다움을 쉽게 알아채고, 감동하고 눈물을 흘린다는 건 맞는 말인 것 같아. 그런데 나는 가끔 이런 나의 성향이 타고 난 것인지, 후천적으로 학습된 것인지를 생각하곤 한단다.


너를 처음 만났던 중학교 1학년 초,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토씨 하나라도 놓칠새라 온 몸에 힘을 바싹 주고 있던 똥똥이 시절의 나는 확실히 공감 능력이 뛰어난 아이는 아니었으니까. 너도 알다시피 혹여 내 필기를 보고 옆의 친구가 점수를 더 받게 될까봐 전전긍긍하던 그 시절의 나는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아이였으니까.


내가 감성을 타고 태어났다면, 그 시절 내 감성의 팔할은 엄마의 눈치를 보는 데 다 소진되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해.

그 시절의 엄마는 어쩌면 현 대통령이 하나로 만들고 싶어하는 역사책에 딱!! 어울릴만한 표본이 아닐까 싶어. 젊은 나이에 상경해 시골에서 서울로 유학온 동생들을 돌보며 눈부신 산업화를 이끌어 낸 산업 역군, 달동네에서 시작된 살림을 15년 만에 청산하고 근면과 성실을 바탕으로 장만한 아파트 한 채, 게다가 높은 교육열까지 갖췄으니 뭐 하나 빠진 게 없지않니?


코를 찔찔 흘리며 숨바꼭질을 하는 게 제격인 나이에, 너무도 철이 일찍 들어버린 나는 공부를 했단다. 지금처럼 조기교육이니 사교육이니 극성스럽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니 빼어난 수재가 아닌 나도, 돈 많~은 부모를 두지 않은 나도 남들 신나게 놀 때 공부를 조금 하면 1등을 할 수 있었거든. 내가 1등을 하면 고단한 엄마의 삶이 크게 위로를 받는 것 같아서 좋았거든. 1등이라는 옷을 입으면 뚱뚱한 외모가 가려지는 것 같아서 좋았거든. 자랑스러운 1등 딸을 둔 엄마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게 좋았거든.


이렇게 쓰다 보니 그렇게 인정머리 없이 공부를 하던 시절에도 나는 어쩌면 누구보다 감성적인 아이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드는구나. 어린 나이에도 저런 오만가지 감정을 느꼈던 걸 보면 말이야. 그래서 나는 가끔 1등을 못 할까봐 불안했을 어린 나를 떠올리면 지금도 마음이 짠~ 해지고 눈물이 나. 네가 내 글을 읽고 눈물이 나는 건, 이런 마음을 네가 익히 알고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네가 생각보다 엄청나게 따뜻하고 뜨거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해.




엄마의 눈치를 보는 게 몸에 배서 그런가... 좋게 말해 나는 상대방의 감정을 헤아리는 촉수가 예민하게 발달해서 예의바르고 배려가 남다른 사람으로 성장했어. 그런데 그만큼 내 마음속에서 내지르는 소리를 무시하고 억누르는 사람이 되었지.


그런데, 2012년 체코에서 억눌렀던 내 감정들이 마구마구 폭발했던 순간, 그걸 놓치지 않았던 게 바로 너야.

밤에 성 비투스 대성당을 보고는 "헙.. 압도당하는 느낌이야."하고 내뱉었을 때, 수 천번의 붓질로 완성된 무하의 스테인드글라스 색감을 보고는 얼음이 되어 서 있었을 때, 옆에서 내가 성당을 보고 스테인드글라스를 보는 것처럼 나를 봐 준게 너였어.


그리고는 이후로 줄곧 나를 정말 행복하게 하는 순간이 언제인지, 나의 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목소리가 뭔지 귀를 기울이라고 나보다 더 간절하게 애원했던 게 너였어.



너는 말로만 끝내지 않고, 계속해서 나를 채찍질했지.

서른 언저리까지 무던히도 남의 눈치를 보고 엄마의 눈치를 보던 나는 네가 먼저 읽고 건네준 '나는 왜 눈치를 보는가(가토 다이조)'를 읽고 조금씩 엄마에게 입바른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절절하게 애가 끓어서 물불 못 가리게 만드는 게 진실한 사랑이라 생각하며 리비도를 충만하게 끓어올려 줄 이성을 찾아 헤매던 내게 '사랑의 기술(에리히 프롬)'을 건네 주며 성숙한 사랑에 대해 얘기해 준 것도 너였어.

나는 네가 준 '사랑의 기술'을 읽고 엄마가 내게 줬던 사랑이 어떤 점에서는 성숙하지 못해 다분히 폭력적이었다며 또 입바른 소리를 해댔다.



가끔은 몽환적이고 낭만적이고 유아적이고 퇴행적인 감성이라는 트램플린을 타고 불안한 행복을 추구했던 내게, 네가 던지는 날카로운 말 한마디는 무지하게 차가웠다. 어떤 때는 마냥 트램플린을 타며 놀고 싶은데, 굳이 책을 건네주며 이제 그만 내려오라고 재촉하는 네가 얄미울 때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 나는 알아. 네가 던지는 그 차가운 말들은 뜨거운 마음이 없다면 절대 나올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너를 보면서 '감상적인, 너무나 감상적인' 내가 내 감정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느라 오히려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어.

나는 그저 아픈 사람이 옆에 있으면

"아프냐? 나도 아프다."

하고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이었다면

너는

"다쳤는데 아픈 게 당연하지. 어떻게 하면 덜 아플 지 고민해 보자."

하며 약을 발라주는 사람이었지.


너를 통해서 내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알게 된 나는, 이제 더 이상 남의 눈치를 필요 이상으로 보지는 않게 된 나는 너처럼 뜨거운 마음으로 차갑게 약을 발라 주는 법을 조금씩 배울 참이야.




나이가 들어 저절로 그런 건지, 10년 전부터 이미 자신이 그리던 그림과는 멀어지는 딸을 보며 조금씩 포기를 한 탓인지, 내가 했던 입바른 소리들 덕분인지.

엄마는 요새 부쩍 소소한 것들에 행복을 느끼는 사람, 마음에 여유를 가진 사람이 되었단다.



뜨개질 따위에는 도통 관심없는 사람인데, 내가 실을 사다 줬더니만 아프리카 사막에서 일교차 때문에 죽어 가는 신생아를 살리겠다며 동네 아주머니들과 함께 저렇게 모자를 떠 왔다.

뜨개질을 하면서 나의 입바른 소리들에 상처입었을 엄마의 마음도 조금은 치유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는데, 하나도 제대로 완성하지 못한 엄마에게 내 마음이 얼마나 전해졌는 지는 미지수야.


사실, 엄마에게 뜨개질을 권유했던 건 내가 느꼈던 치유의 경험을 엄마에게도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거든.

사랑의 모자 뜨기를 처음 시작할 때는 내가 아이들의 목숨을 살리는 거라는 건방진 생각이 있었는데, 한 코 한 코 실을 걸 때마다 건방진 마음은 어느덧 사라지고 내가 나 아닌 구군가를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 들더라. 그러면서 결국 뜨개질은 아프리카 아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 하고 있는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

그리고 그 뜨개질이라는 게 참 희한하더라. 한 코 한 코 실을 걸 때마다 '내가 지금 살아 있구나...'하는 생의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지는거야.

네 글을 읽으면서, 뜨개질을 하는 동안 내가 느꼈던 이런 감각들이 뜨개질을 하시는 유가족 분들께도 고스란 살아났으면 하는 바람이 들더라.


책을 잘 읽지 않는 엄마가 며칠 전에는 혜민 스님의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을 읽고나서, 지나가는 투로 쿨하게

"앞 부분 읽는데, 네 생각 많이 나더라."

하며 책을 내 앞에 놓더라.


다른 사람들에게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자신을 돌보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내가 생각났다는 엄마를 보니, 내가 너를 통해 고군분투하며 성장하는 동안, 엄마도 이렇게 함께 성장했구나 싶어서 뭉클하면서 짠하더라. 60살 넘어 뼈아프게 파고드는 딸내미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넘기는 척 하더니만 고스란히 받아내며 조용히 저렇게 애쓰고 있었구나... 싶어서 고마운 마음이 들더라.


토요일에 진~하게 꽃놀이 다녀와서 일요일에 질펀하게 낮잠을 자고 잠못 드는 새벽.

소소한 행복을 느끼고 즐기며 또 꿈꾸는 엄마 이야기를 전하면서 너에게 고맙다는 말을 한다는 게 얘기가 길어졌네.


그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고마우이 친구.

우리 엄마들이 우리의 입바른 소리를 듣고 할머니가 돼서도 저렇게 애쓰시는 것처럼

우리 둘 꼬부랑 할머니가 되더라도 서로 입바른 소리를 지금처럼 해 주며 죽는 날까지 오늘 보다는 조금 더 나아지려고 노력하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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