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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질한 사람은 없는데

앨리 러셀 혹실드, 도둑맞은 자부심

by 오학준



“파시즘은 극단주의라는 주변부를 통해 ‘뒷문’으로만 들어오지는 않을 것이다. 파시즘은 투표함을 통해 앞문으로 들어올 것이다.”(395)


미국 켄터키 주의 한 작은 광산 마을인 파이크 카운티는, 한 때는 광산업과 제조업의 성장으로 부를 축적하던 도시였다. 광산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비록 몸은 힘들었을지언정 자부심만은 대단했다. 광부 노동조합의 단단한 계급 연대는 인종의 벽을 종종 넘어서곤 했다. 하지만 1970년대부터 시작된 세계화는 도시의 풍경을 극적으로 바꾸어놓았다. 제조업 일자리가 썰물처럼 해외로 빠져나가고, 일자리와 부를 창출하는 고부가가치 사업은 해안가 주들로 쏠렸다. 드높은 애팔래치아 산맥 옆에 자리 잡은 이 작은 농촌 도시는 이제 전체 미국 하원의원 선거구 가운데 두 번째로 가난하다. 크고 작은 부상을 치료해야 했던 광부들은, 제약회사의 만행으로 무분별하게 풀려버린 오피오이드 계열 진통제에 중독이 되어버렸다. 더 적은 수입, 더 적은 일자리, 더 많은 마약 중독자로 고통받는 이곳의 주민들은 트럼프에게 몰표를 주고 있다. 정작 그들의 고통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는 정치인에게 자신들의 미래를 내맡기고 있다. 앨리 러셀 혹실드의 <도둑맞은 자부심>(이종민 옮김, 어크로스, 2025)은 바로 이 도시의 사람들과 나눈 심층 인터뷰를 바탕으로, 그들을 괴롭게 만드는 정치 세력을 지지하게 되는 감정의 근원을 찾아나간다.


“실제 문제에 대한 실질적 해결책이 없는 상황에서 상실감과 수치심이 정치인들이 캐내려는 ‘광석’이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29)


세계화와 그로 인한 산업 구조의 재편은 한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사회적 변화다. 문제는 그러한 변화가 개인들의 자부심과 수치심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데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자부심’이란 자신이 쓸모 있다고 느끼는 감정이다. 나를 필요로 하는 세계나 타인이 없다고 판단하면, 자부심은 점차 무너진다. 내가 꼭 무엇을 해야지만 자부심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세계가 변하고, 내 직업과 성취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달라지면 나의 자부심에도 상처가 날 수 있다. “대부분 사람이 어느 정도 자신이 속한 더 큰 집단(지역, 국가, 축구팀, 가족 등)의 자부심 또는 수치심을 ‘떠안고’ 살아간다. 이러한 집단이 자부심 경제 내에서 갖는 위상은 개인의 통제 범위 밖이다.”(54-55)


파이크빌은 세계화의 패자였다. 화려한 해안 도시와 몰락한 내륙지역 농촌 간의 대비라든지 부가가치가 낮은 험난한 육체노동에 대한 평가절하는 소위 ‘붉은 주’의 주민들이 자부심을 잃게 만드는 데 영향을 미쳤다. “전직 광부들은 실직만큼이나 중요한 또 다른 상실을 경험했다. 바로 자신의 숙련된 능력과 지식의 가치가 땅에 떨어진 것이다.”(73) 그로 인한 상대적인 가난함은 자신들이 더욱 믿고 따르던 프로테스탄트 윤리 앞에서 초라해진다. 행동의 결과가 전적으로 개인의 책임이라면, 블루 스테이트의 사람들보다 못 살고 있는 건 전부 ‘나’의 책임이라는 말이 된다. 내가 무엇을 적극적으로 잘못한 것은 아닐지라도, 남들이 나를 볼 때 내가 세상의 흐름에 맞추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래서 남들이 보기에 내가 ‘잘못’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자부심의 원천이었던 삶의 모든 국면이 수치심을 유발하는 근거로 순식간에 변한다.


저자는 우리가 단순히 물질 경제에만 살고 있는 게 아니라 자부심 경제 속에서도 살아가고 있으며, 지금까지는 물질 경제적 차원에서만 접근했기에 정작 그로 인해 변화하는 자부심 경제의 중요성에 대해선 간과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문제는 이 자부심 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은 우리가 완전히 통제 불가능하고, 그로 인한 상실감 역시 막을 수 없다는 데 있다. 다만 이런 상실감이 곧바로 분노나 박탈감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감정이 이렇게 전환되기 위해서는 일종의 ‘프로파간다’가 필요하다. 극우파가 노리고, 공략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자신들의 상실감이 자신의 탓이 아니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은 언제든 미끄러져 내려가는 미끄럼틀 앞에 서 있다. 누군가 거기에 손가락 하나만 가져다 대면 손쉽게 밀려내려 갈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내려간 사람들이 자신의 열광적인 지지자가 될 것임을 그들은 잘 안다.


이를 위해 극우파들은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위대한 어제’를 복원하겠다는 야심 찬 목표를 내세운다. 이민자들에 의해서 더럽혀지지 않은 나라, 좌파와 여성, 소수자들에 의해 정당한 몫을 빼앗기지 않은 나라의 호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는 약속을 내세운다. 자신들의 부서지고 빈 자부심을 쓸모 있게 여겨주는 극우파 조직들에 자아를 의탁하면서, 사람들은 대리 만족을 느끼고 자부심이 회복되는 듯한 느낌에 전율한다. 의도적으로 원인을 오해하고, 그런 오해를 선해해 주고 인정해 주는 극우파들의 ‘우쭈쭈’는 마음을 다친 이들이 듣기에 기분이 좋다. “조상들과 자신이 잃어버렸다고, 심지어 도둑맞았다고 믿는 자부심”(96)이 일거에 회복되는 것 같다. 이런 즐거움을 방해하는 모든 ‘사실’은 좌파의 자학적 사관에 불과하다. 적극적인 오해야말로 그들이 가장 은밀하게 원하던 바다. (하지만 책에선 이런 부분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트럼프는 이들의 방향 잃은 복수심을 자신의 정적에 대한 복수를 위해 동원한다. 그리하여 국가 자체가 거대한 사병집단화된다. 이런 행위로 실제로 이득을 보는 것은 트럼프와 그의 측근들 뿐이지만, 지지자들은 그의 복수에서 마치 자신의 복수가 성공한 듯한 카타르시스를 얻는다. 그들이 보기에 트럼프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러 온 순교자다. 그는 백인이 원래 누리고 있던 것, 누려야만 했던 것들이 민주당과 좌파의 자학사관과 ‘소수자 우대정책’에 의해서 빼앗겼다고 말하며, 이를 되찾겠다고 감히 말한다. 그런 말을 그동안 숨겨왔어야 했던 ‘나약한’ 자신들과 달리 그는 자신의 부와 권력을 바탕으로 거리낌 없이 발언한다. 이 발언에 그들은 깨닫는다. ‘우리가 틀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약했던 것이다.’ 우리가 다시 힘을 찾는다면 빼앗긴 몫을 다시 되찾을 수 있다. 패배는 더 이상 우리의 무능의 탓이 아니며, 우리의 수치심은 우리 탓이 아니다. 그에게서 부정당한 자신들의 과거를 다시금 회복할 수 있다는 환상을 볼 수 있다. 이것이 트럼프로 향하는 붉은 주의 밑바닥 민심일 수 있다.


물론 붉은 주에 사는 모두가 같은 정도로 트럼프와 극우파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각자가 처한 처지와 경험에 따라 그들에 대한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그들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보여주는 이들도 종종 자신들이 민주당과 공화당 양쪽에서 전부 다 잊힌 존재라는 데에서 오는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자신들이 겪고 있는 이 상실감에 대해 누구도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는다는 무시의 감각을 외면할 수 있을까? 물론 그들이 느끼는 상실감이 실제로 자신들이 생각하는 바로 그 원인 때문인지 아닌지 확실히 알긴 어렵다. (그리고 으레 그러하듯 대부분은 완전히 거짓된 원인에 매달려 있다.) 그들과 오랜 시간 인터뷰를 한 저자마저도 종종 그들의 상실감과 그들의 원인 돌리기에 의문을 표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심층적으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그들의 상실감 자체는 사실이기 때문일까. 하지만 잘못된 원인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것까지 우리가 보듬어 안아야 할 필요가 있는 건지 혼란스럽다. (이 책의 장점이자 한계라 생각한다.)


“<자기 땅의 이방인들>에서 나는 우리 모두가 정치적 수사의 이면에 이념적 주장과 진실의 개념을 넘어서는 “깊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그렇게 느껴지는” 이야기, 즉 감정이 들려주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에는 판단이나 사실이 끼어들 틈이 없다. 대신 세상이 어떻게 느껴지는지를 이야기로 들려줄 뿐이다. 나는 우파에게는 우파의 깊은 이야기, 좌파에게는 좌파의 깊은 이야기가 있다고 믿게 됐다.”(311)


어쨌든 그 덕분인지 그는 이들과의 깊은 인터뷰를 통해 상처받은 우파의 공통적인 서사를 그려내는 데엔 성공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그(상처받은 우파)는 참을성 있게 아메리칸드림의 실현을 기다려왔지만, 자신에게 돌아올 공을 끊임없이 새치기하며 가로채는 고학력 여성과 흑인들에 지쳤다. 심지어 민주당 정부의 방종과 묵인 아래에 이민자, 공무원 들도 이제 내 순서를 건너뛸 준비가 되어 있다. 그들이 보기에 민주당은 무절제하고 파렴치한 경비원이다. 심지어 앞서 줄 서 있던 사람들이 뒤돌아서서 자신을 비난한다. 이 무식한 성차별주의자, 인종주의자, 동성애 혐오자. 그들은 자기가 달라진 게 없다고 스스로 믿는데, 졸지에 도덕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무능한 사람이 되었다. 이것은 그들의 수치심을 자극하고, 자부심이 무너져간 시절을 정당화하는 서사다. “도시적이고 자유주의적이고 부유한 어딘가에서 날아든 굴욕감 같았다. 이 모든 요소가 합쳐지면서 다양한 형태의 자부심 상실로 이어졌고, 이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통과하면서 특정한 방식으로 인식됐다. 즉 이 지역 사람들은 실패를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강했지만 사실 그들이 사는 주에는 다른 도시들에 비해 경제적 기회가 훨씬 더 적었다. 이것이 바로 자부심의 역설이었다.”(322-323)


그런데 그들은 왜 무엇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지 않고 ‘도둑맞았다’고 믿는가? 빼앗는 것엔 주체가 있다. 실체가 불분명하거나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구조적 변화에 따른 상실은 해결되지 않는 불안감을 늘린다. 확실한 희생양이 필요하다. 트럼프와 그의 추종자들이 내놓는 선거 결과에 대한 허구적 주장은, 세계화와 자동화로 인해 패배자가 되어버린 사람들에게 상실의 (허구적으로 구성된) 진실을 전달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헝거 게임>처럼 부자들의 놀잇감,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해 버린 가난한 사람들의 복수, 그들의 정당한 몫을 빼앗아간 부자들에 대한 분노를 자신들의 분노와 연결시키는 것이다. “극단주의자가 신규 회원을 끌어들이기 위해 이런 식으로 온갖 상상의 적들을 제시할 수 있다”(227). 사람들은 언제든지 굴러 떨어질 수 있는 내리막길에 있다. 혹은 기꺼이 그 비탈에 서서 누군가 등 떠밀기를 기다리고 있다.


주장을 종합하면, 지역 사회 산업의 붕괴와 강한 자부심과 개인주의적인 책임 윤리 문화가 강한 보수적 / 종교적 토양은 한데 맞물려 지역의 몰락을 개인의 수치심으로 전환하는 구조를 형성하고 자부심을 붕괴시킨다. 이는 수치심을 끌어들이는 새로운 자석이 되고 이 빈 틈을 ‘좋은 불량배’ 도널드 트럼프가 파고드는 것. 그는 수치심을 제거하는 의례를 과격하게 재현한다. 트럼프의 의례는 1) 공개적으로 도발하고, 2) 그에 따른 비난을 감수하며 수치심을 전시하고, 3) 이 수치심이 부당한 것이라며 피해자로서 자신을 내세우고, 4) 소송과 정권 획득 등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회복하는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이 의례가 반복되면서 우파 성향의 지지자들이 결합했다.


대안적 서사 (민주당이든, 국가든)가 없는 상황에서 이 특정한 감정적 서사가 ‘빼앗겼다’는 감각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어떤 일정한 보상으로 작용한 것은 비교적 명백해 보인다. 하지만 진짜로 도둑맞은 것인가? 아니면 단지 사라진 것인가? 실제로 사라진 것들이 많지만, 그것들이 정말로 ‘도둑맞은’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트럼프는 도둑맞은 것이라는 프레임을 각인시켰다. “겉보기에 트럼프는 지지자들에게 자부심을 되찾아주고 있었다. 그는 대다수 미국인이 거짓이라고 여기는 것들을 그들에게 제공했다. 그리고 그 거짓을 한 가지 진실과 결합했다. 잃어버린 자부심이라는 진실이었다.”(342) 트럼프는 그들을 대신하여 희생하는, 그들의 대변자이자 순교자였다. 그에 대한 공격은 나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는 일종의 종교적 동일시가 일어났다. 종교집단이 그를 지지할만한 이유가 있다.


혹실드는 애도의 부재가 그들이 극우파에게 마음을 내어준 이유 중 하나였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타진해 본다. “그들이 보기에 자부심과 수치심의 이야기 아래에는 비밀이 숨겨진 듯했다. 그 비밀이란 어떠한 보상도 애도도 받지 못한 끔찍한 사실이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기술과 삶의 방식에서 찾았던 남성들은 이것들이 모두 평가절하된 상황에서 슬픔을 억누르며 상실을 애도할 방법조차 찾지 못하고 있었다. 실제로 성공을 최우선으로 하는 미국에서 삶의 터전을 잃은 시골의 블루칼라 남성들이 애도할 문화적 공간이 어디 있었을까?”(341) 물론 나로서는 스스로 견디고 스스로 구원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믿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마저 일종의 핑계라고 보긴 하지만, 모욕이 난무하는 공론장에서 스스로 견뎌내라고만 말하는 것도 잔혹한 일이긴 하다. “전쟁으로 생을 마감하고 이 묘지에 잠든 사람들은 잃어버린 자부심을 외면하면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준다.”(391)


“레드넥이라는 말의 유래를 아세요? … 석탄 전쟁 당시 노조 소속 노동자와 회사에서 고용한 대체 노동자를 구별하는 방법이 있었어요. 노조를 위해 싸우는 노동자들은 회사 유니폼을 입고 있었고 그 유니폼에는 빨간 스카프가 달려 있었죠. 그리고 백인 노조원은 흑인과 이민자를 형제자매로 여겼어요. 그래서 레드넥이 된다는 건 원래 자랑스러운 일이었어요.”(249)


그나마 이방인들, 이민자들, 소수자들에 일정한 공감을 느끼는 건 바닥 수준으로 가난한 백인 또는 부유한 백인이다. 아예 나락으로 떨어져 본 경험이 있는 이들이나, 아예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수행할 수 있는 수준의 사람들만이 자신과 다른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가난한 자들, 즉 중산층과 어울려야만 하는 이들은 그들은 별개의 두려움을 느낀다. “보수적인 제 이웃들에게 공산주의자 취급을 당하고 좌파들에게는 인종주의자라고 손가락질받을 거예요.”(196) 그들의 계급 연대는 여전히 인종에 가로막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아메리칸드림의 성취를 통해 반인종주의로 이끌린다. “공감의 다리 위의 양상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아래의 양상은 ‘흔들리는 배에 함께 타고 있다는 연대 의식’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379) 즉 인종을 넘어선 계급 연대 혹은 상위 계급의 도덕적인 책임 의식, 가망이 없지만 이것 말고는 답이 없어 보인다.


저자는 이 답답한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자는 걸까? 그가 보기엔 아메리칸드림을 새롭게 정의하고 모두가 그 꿈에 다가갈 수 있게 해야 한다. 아메리칸드림의 재설정이라. “우리가 목표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안정적 생활 여건, 튼튼한 공동체, 그리고 연약한 지구를 보살피는 노력이다. 우리는 부의 극단적 격차를 줄이고, 중산층을 재건하고, 민주주의를 지키는 안전장치들을 더 단단히 세울 수 있다. 그리고 아메리칸드림이라는 목표에 모두 평등하게 접근하게 함으로써 수치심이 가장 깊게 파고드는 취약 지점을 줄일 수 있다.”(396) 노동자라는 정체성의 확고한 부활, 새로운 전선의 확보, 민주당의 전략 변화, 새로운 서사의 제작,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을 위한 세밀한 복지, 블라블라. 그러니까 쓸모 없어졌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자부심을 확보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거다. 그의 주장에서 버니 샌더스의 그림자가 어렴풋하게 비친다.


아쉬운 부분도 있다. 이론적 차원의 논의가 많이 옅다. 아무래도 취재물이다 보니 그렇겠지만, 개인적 차원의 수치심이나 자부심이라는 감정이 어떻게 집단적 차원의 정치로 전환되는지, 그런 감정들이 이데올로기나 프로파간다와 어떻게 연결되는지가 더 깊게 논의되면 어땠을까. 상상의 상실로 인한 분노에 대해 단순히 이해 불가능하기에 침묵하는 것을 넘어서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논의가 부족하다. 그것은 아무래도 이 책이 '이해'를 목표로 두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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