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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에타 Aug 27. 2020

권태

photo by Arif Ibrahim

무력감 - 아마도 이 무력감에서
피폐가 솟아나고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출구가 입구이고 입구가 출구이다.
아무도 거기서 빠져나올 수 없다.
그곳은 차갑고 희미한 어둠에 싸여 있다.
밤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밝고
낮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어둡다.
그런 희미한 어둠에 휩싸일 때
나는 올바른 방향과 시간을 잃어버린다.
또한 나는 과연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일인지를 알 수 없게 된다.
- 무라카미 하루키, <먼 북소리>


현실과 이상의 괴리와 대립은 권태의 원천이다. 현실의 덫에 걸린 채 권태가 독가스처럼 내면으로 퍼진다. 도처에 편재해 있는 무의미성으로부터 벗어날 방도를 찾지 못한 채 만성적인 권태와 무기력에 침잠한다. 이유가 어떻든 쉽사리 이 권태를 극복할 수 없다. 권태는 내 등에 완벽하게 달라붙은 채 나와 함께 살아간다.


나는 내가 지구 위에 살며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 지구가 질풍신뢰의 속력으로
광대무변의 공간을 달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 참 허망하였다. 나는 이렇게
부지런한 지구 위에서는 현기증도 날 것 같고
해서 한시바삐 내려 버리고 싶었다.
- 이상, <날개>


그런데도 계속해서 밥을 먹고, 일을 하고, 글을 쓰고, 심지어 가느다란 희망과 확신을 가지고 정의와 진리를 추구한다. 물론 어김없이 뒤통수를 얻어맞고 비틀거리는 순간이 찾아오고, 던지면 되돌아오는 부메랑처럼 언제나 원점을 맴돈다. 지리멸렬한 권태와 공허는 나아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하는 일상의 비루함 속에서 출구를 찾지 못한 채 헤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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