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_새어머니께
2021-02-09에 작성된 글.
어머니 안녕하세요
요 몇 년간 어머니에게만큼은 제 마음이 가닿지 못한 것 같아 정돈된 편지를 언젠가 꼭 쓰겠다고 다짐만 하곤 했는데 그게 드디어 오늘이 되었네요. 말로 표현하는 데 서툰 편이라 이렇게 글에 마음을 담습니다.
저희가 아빠를 통해 이어진 관계이기에 늘 아빠를 거쳐서 소통했던 것 같아요. 그랬기에 직접적인 소통이 늘 낯설었고 아빠가 없으면 괜히 소통의 끈이 끊어진 것 같기도 하고.. 저는 종종 그런 느낌을 받곤 했는데 어머니는 어떠셨을지 모르겠어요.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서도 마음 한 켠에 늘 답답함이 있었네요.
말씀 못 드린 게 하나 있어요. 이 이야기를 쓸까 말까 고민했는데 그래도 진심을 전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쓰기로 했습니다. 2년 전쯤 집에서 빈 공책이 필요해 찾다가 우연히 어머니가 제 나이 때 쓰신 일기들을 보았어요. 몰래 본 거라서 일단 죄송하다는 말씀드려요...
처음에는 그저 호기심에 들춰보았는데 하나하나 읽을수록 저의 모습이 보이는 듯해서 한동안은 그 일기에 빠져 살았어요. 제가 모르는, 그렇지만 저와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던 어머니의 과거들을 보며 밤마다 울기도 하고 위로도 받고 그랬습니다. 저희가 서로의 옛날이야기를 거의 공유한 적이 없어서인지 좀 낯설고 조심스러웠는데 그걸 알았다고 생각하니 비밀스럽게 혼자서만 내적 친밀감이(!) 생겼었답니다.
그 이후로 저희가 이미 정해진 관계가 아닌 다른 관계에서 만났다면 어땠을까.라는 아쉽고 의미 없는 상상을 하곤 했어요. 직장에서 혹은 친구로서 만났다면 제가 엄청 잘 따르거나 친해지고 싶어 했을 거예요. 어떠한 벽 없이요.
어머니가 저를 어떻게 생각하실지 궁금하기도 하고 사실 알 것 같기도 해요. 음.. 나름 밖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는 인간이려 무척 애쓰는데 이상하게 가족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눌려왔던 원망들 때문인지 굳이 애쓰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래도 어머니께 만큼은 괜찮은 사람으로 비춰지길 내심 바랬는데 지금껏 보여드린 모습은 그게 아닌 것 같아 조금 허탈? (이 마음이 뭔지 정확히 모르겠어요) 합니다.
감사하다는 말씀 꼭 드리고 싶어요. 특히 대학 생활을 책임져 주신 점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어머니께 가진 원망이나 미움은 없다는 것도 꼭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있을 이유도 사건도 없고요.
아빠와의 관계가 완만해져야지만 그 너머에 있는 어머니와의 부재도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기에 잠시 벽을 쌓았던 것 같습니다.
현재 혼자 지낸 지 1년이 다 되어가는데 스스로가 많이 단단해졌음을 느껴요. 이젠 온전히 독립해도 괜찮을 거라는 용기도 생겼습니다. 편지를 쓰는 지금도 설 이후에 아빠랑 제가 잘 지낼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는 않아요. 그래도 이제는 행복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노력은 해보고 싶습니다.
제가 또 이렇게 글을 써도 막상 마주 보면 무뚝뚝하고 뚱하니 있을 수 있어요. 그게 참 어렵습니다.. 아마 시간과 노력만이 해결해 줄 수 있겠죠.
앞날에 행복이 훨씬 많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감사드려요. 잘 살아보도록 할게요!
슬기 올림.
P.S. 아버지께는 아직 보여주지 않으셨으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