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여름부터 참여하게 된 뮤지컬 <광화문연가> 공연이 시작된 지 일주일쯤 지났을까, 계약서에 적힌 날짜대로 페이가 정상 지급되었다. 갑자기 밝아지며 화기애애해진 분장실 분위기. 나 또한 그 말을 듣고 어떤 맛난 음식을 먹으러 갈까 생각하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OO (제작사 이름) 정말 최고네요!”
“너무 감사합니다. 제 때 맞춰서 주시고.”
“역시 대기업은 달라~”
사람들은 제작 PD님께 칭찬 아닌 칭송을 하며 수다를 떨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그저 “알겠습니다, (알려줘서) 고맙습니다." "오늘 맛있는 거 먹어야겠네요!” 정도의 반응으로 그칠 줄 알았는데 분장실에 있던 배우들은 거의 제작사를 떠받드는 듯한 분위기를 조성했기 때문이다. 월급을 받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 원래 이게 이 정도로 기뻐하며 감사해야 할 일인가?
이렇게 생각하는 내가 이상한 건가 싶어 우두커니 앉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왜 저들은 이토록 환호하는가.’
내가 경험했던 것들을 되짚어보았다. 여태껏 적지 않은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해 보았지만 이런 분위기는 한 번도 마주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를 포함한 모두가 월급날에 월급을 받았다. 물론 즐거운 일이긴 하지만 동시에 당연한 일이었다.
친구들의 이야기도 떠올려 보았다. 일단 제 때 월급을 받지 못한 친구들은 거의 없었다. 월급이 밀렸다던 한 친구는 계약된 날짜의 시간에서 몇 시간이 지나도 월급이 오지 않자, 사장님에게 당당하게 문자를 보냈고 월급을 받지 못한 친구는 노동청에 신고를 해서 결국 일주일 내로 받아냈다.
‘정규직이 아닌 아르바이트라서 그런가? 아니지. 오히려 아르바이트생 월급 떼먹는 경우가 훨씬 많지. 아니. 그래도 지금은 2018년이잖아. 요새 어떤 이상한 사람이 월급을 떼어먹어. 신고당하면 끝장인데.’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애써 감춰왔던 아픈 기억 하나가 갑자기 머릿속에서 번뜩였다.
‘아, 데뷔 공연 페이 아직 다 못 받았구나.’
1,300,000원. 2018년 올해 데뷔를 하게 된 작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아직 받지 못한 페이의 금액이다. 계약서에 적힌 지급일로부터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 4개월이 다 되어가지만 나를 포함한 나머지 배우들은 마지막으로 지급되어야만 했던 페이를 받지 못했다.
(2021년 6월 10일에 쓰는 덧붙임 글 : 2020년 여름에 출연료를 받지 못한 배우들이 모여 노동청에 단체로 신고를 했다. 2019년 뮤지컬 <친정엄마> 팀의 임금체불 문제가 있었는데 그 해 예술인 관련 법이 바뀌며 받지 못한 출연료를 받게 된 좋은 선례가 생겼다. 덕분에 우리 팀도 신고를 진행할 수 있었고 그렇게 2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 겨우 마지막 페이를 받았다. 노무사님과의 어마어마한 서류 교환과 싸인, 그리고 스트레스가 있었지만 말이다!)
사람들은 제작사 측에 끊임없이 연락을 했지만 지급 날짜를 계속 미루고 미루었다. 그렇게 4번째로 밀린 날짜까지 지급되지 않자 이제는 소식도 없다. 게다가 여수로 지방 공연을 가기로 했으나 공연 일주일 전에 취소가 되었다는 통보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페이를 정상적으로 받는다는 게 이들에게는 대단한 것 일수도 있겠구나.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의아함 대신에 안타까움이 자리 잡았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저들처럼 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에 겁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제작사와 관련된 사람도 아니고 뮤지컬 데뷔를 한지 갓 1년 된 새내기일 뿐이기에 정확한 정보를 알 수는 없다. 그저 인터넷이나 잡지에 실린 기사들, 그리고 오래 일해온 선배들의 말들로 이 사태의 원인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처음에는 화가 났다. 당연히 지급받아야 할 페이를 못 받았는데 노동청에 신고도 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는 선배들에게 화가 났다. 임금 체불로 신고하겠다는 나의 말에 ‘여기 바닥이 좁아서 찍힐 수 있으니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라고 악의 없이 말한 한 관계자에게 화가 났다. 늘 이렇게 대응하지 않았으니 제작사들이 같은 짓을 반복하는 것 아닌가.
최근에 앙상블 선배들에게서 꽤나 충격적인 대화를 들었다. A라는 제작사가 있는데 배우들에게 페이를 주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그 제작사의 다음 공연 오디션에 페이를 받지 못한 배우들이 지원서를 내고 참여했다는 것이다. 이 무슨 아이러니한 일인가.
그리고 뮤지컬을 오래 한 선배와 대화를 하다가 뮤지컬 페이 미지급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마음속에서 솟구치는 답답함을 참을 수 없었던 내가 선배에게 물었다.
“선배님, 왜 배우들이 적극적으로 신고하지 않는 걸까요? 이걸 신고하고 바로 잡아야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 거잖아요.”
”신고하는 게 당연하지. 근데 배우들 중에 당장 다음 작품 없는 사람들이 널렸고 처자식 먹여 살려야 하는 사람들도 많아. 그 제작사 신고하면 다시는 같이 못 할 거고 그만큼 할 수 있는 게 줄겠지. 그걸 누가 욕할 수 있겠어.”
“…”
참담해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무슨 악순환의 반복이란 말인가. 마치 가난함의 대물림 같았다.
처음으로 내가 아무것도 아닌 초라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분명히 학창 시절의 선생님들은 “앙상블은 뮤지컬의 꽃이다”, “앙상블이 없으면 공연이 돌아가지 않는다”라는 말씀을 해 주시면서 앙상블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알려주셨는데 말이다.
실제로 이들이 하는 일들은 무척이나 중요하고 힘들었다. 주조연 배우들이 앞에서 환한 조명을 받으며 연기하고 노래할 때 어두운 조명 안에서 끊임없이 그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격한 춤을 추며 극을 화려하게 만들어주는 동시에 웅장한 합창소리로 관객들을 압도하기도 한다. 옷도 엄청 갈아입는다. 다음 장면을 위해 빠르게 의상을 갈아입는 걸 ‘퀵’이라고 부르는데 단 한 번의 공연도 빠지지 않고 이 모든 것들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 앙상블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의 좋은 대우는 받지 못했다. 일단 가장 중요한 페이 문제는 심각했다. 연습 시작 3월부터 7월 말까지 총 5개월 동안 일요일을 제외하고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총 10시간, 극장에 들어가기 일주일 전은 아침 10시부터 밤 10시까지 거의 12시간의 연습에 참여해야 했다.
공연이 시작되고 나서는 월요일을 제외한 평일은 매일 4시부터 11시까지 극장에 머물러야 하고 주말에는 10시부터 10시까지 12시간 내내 극장 안에만 있어야 한다. 마티네 공연이라는 것도 있어서 수요일 또한 주말과 같은 스케줄로 실행해야만 했다. 고로 월요일을 제외하고는 자기 시간이 거의 없는 것이다.
그런 스케줄에 연습 페이는 없었으며 오직 식비만 지급되는 상황이었다. 나름 우리나라에서 이름만 대면 알만한 유명한 대극장 뮤지컬이었는데도 말이다. 5개월 동안 내가 받기로 한 총금액은 5,200,000원이었다. 이 금액을 5개월로 나누면 한 달에 겨우 1,000,000원이 겨우 넘는다. 노동 시간과 강도는 이미 기준치를 훨씬 넘었는데 말이다. 게다가 그중 1,300,000원의 돈은 아직도 미입금 상태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공연 홍보를 위해 유일한 휴일이었던 월요일에 여러 방송사에서 진행하는 방송이나 홈쇼핑에도 나갔다. 휴일의 반을 반납하고 얻은 것은 겨우 한 회차 페이의 금액과 피로함 뿐이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결정권은 없었다. 휴일에 일하는 경우 휴일 수당을 주는 것이 당연하지만 우리 중 아무도 그에 대한 항의를 하지 않고 그저 제작사가 지시하는 데로 따라다녔다.
푹 빠져서 미칠 정도로 좋아했던 뮤지컬이었지만 이런 상황이 닥치니 문득 회의감이 들었다.
‘내가 뭐하자고 여기까지 왔을까?’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란 걸까?’
‘이런 삶이 지속된다면 나는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과연 우리나라의 공연 업계만 이런 건지 문득 궁금해져 자료를 찾아보았다. 그렇게 찾은 자료는 아래와 같다. 아래는 뮤지컬의 고장과도 같은 런던과 뉴욕의 미니멈 주급 현황이다.
미국의 브로드웨이의 경우, 배우 노동조합이 있기 때문에 가입된 사람들은 최저 페이를 보장받을 수 있다고 한다. 최저 시급이 보장될 뿐만 아니라 브로드웨이의 경우 어떤 경우에 얼마를 더 지급받을 수 있는지까지 명확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공연 내에서 무대 장치 전환 한 번 할 때마다 추가되는 금액, 스윙이나 언더스터디의 경우 추가되는 금액이 표로 상세히 나와있다.
물론 저곳들은 우리나라의 뮤지컬 시장보다는 훨씬 규모가 크기에 비슷한 주급을 바라거나 저 정도의 구체적임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최저시급 보장과 임금체불에 관한 것은 보장되어야 할 것 아닌가. 우리나라의 경우 추가 수당에 대한 개념이 정리되어 있지 않고 최저 페이가 보장되지도 않는다. 그리고 주급이 아닌 회당 페이를 합친 금액이 연습기간부터 공연이 끝날 때까지 서너 차례에 걸쳐 지급이 된다.
나의 경우 회당 페이가 55,000원이었는데 주 9회 공연을 했고 그렇게 되었을 때 내가 받을 주급은 고작 495,000 원이다. 영국 런던에서 1100석 이상의 대극장에서 공연을 하면 최저 주급이 1,000,000 원, 브로드웨이어서 공연을 할 경우 2,180,000원의 주급을 받지만 1,246석 규모의 대극장에서 공연했던 나는 그 최저 주급의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페이를 받았다. 심지어 티켓 가격은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데도 말이다.
아마 내가 제일 적은 돈을 받았을 것이다. 일단 첫 공연이고 나이도 가장 어렸으니까. 나는 내 나이와 경험에 비해 받는 돈이 많은 편이라며 스스로 합리화시켰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다른 앙상블 선배들이 받는 페이도 궁금해지기 시작했지만 서로의 페이를 밝히지 않는 것이 계약 규칙이기도 했고 사람들 또한 그에 대해 말하는 것을 꺼려했기에 나는 정확한 금액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공연이 끊기면 당장 생계를 이어나가기 어려운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여유로워 보이지 않았다. 공연을 하지 않을 때면 전공과 상관없는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공연 일 외에 다른 일까지 병행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렇다면 1,200석 규모의 객석을 채우는 관객들의 돈은 다 어디로 가는 걸까? 설령 표가 팔리지 않는다고 해도 계약조건을 지키지 않고 페이 미지급을 해도 되는건가? 그리고 또 다시 무리하면서까지 다른 공연을 계속 올려야하나?
가끔 그런 기사들을 본다. 페이 미지급 상태에서 돌려막기로 다른 공연을 계속 올리는 제작사들. 회당 페이 3,000만 원을 받는 스타 배우들과 최저 시급도 받지 못하는 앙상블들과 스텝들. 개막 며칠을 남겨두고 엎어지는 공연들. 빚더미에 앉아 자살을 택했던 어느 제작사 대표. 이런 기형적이고 열악한 구조들은 아직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과연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어디서부터 해결을 해야 하는 걸까.
“좋아서 하는 건데 나 같으면 페이 없어도 하겠다.”
“하고 싶어도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감사해야지.”
내가 여기에서 받는 대우와 페이 이야기를 꺼냈을 때 종종 이런 말들을 듣곤 한다. 좋아하는 것을 하고 남들이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것을 하고 있으니 그저 감사하라는 말은 너무나도 폭력적인 것 아닌가. 이 상황이 과연 마땅한 것이란 말인가? 이것은 노동이다. 최저 임금이 보장되지 않는 이상 착취로 변해버리지만 말이다. 흔히 말하는 열정 페이라는 말이 딱 맞아떨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힘이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겪은 상황을 글로 적어 알리는 것뿐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상황을 인지하고 관심과 바꾸려는 의지를 가진다면 상황은 나아질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비단 뮤지컬뿐만이 아니다. 영화, 미술, 패션, 음악 등 많은 예술 직업군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바꾸기 위해선 누군가는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제 모두가 알아야 할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