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위기는 시작도 하지 않았다
저는 야구를 무척 좋아합니다. 특별히 어느 팀을 좋아해서 야구를 즐긴다기보단 야구라는 스포츠 자체를 좋아한다는 표현이 맞을 거 같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데이터 분석도 세이버메트릭스를 접하면서 시작했으니 인연이 제법 얽혔군요.
Premier 12에서 한국 야구대표팀이 슈퍼라운드 진출에 실패했습니다. 야구팬의 한 사람으로서 씁쓸합니다. WBC, 올림픽에 이어 이번 Premier12까지 '한국야구가 이것밖에 안 되던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거든요. 일본과 대만이 가볍게 나서는 아시안게임과 나이 제한을 둔 APBC와 달리, 글로벌 수준에서 제대로 붙어보니 격차는 분명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부상 선수가 많아서? 세대교체 중이라? 대진이 좋지 않아서? 현지 구장 적응에 실패해서? 아닙니다. 소위 말하는 수준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오늘의 수준을 두고 '가장 잘했었다'라고 말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거죠.
이번 한국 야구대표팀은 철저히 과거 성공 경험에 매달렸습니다. 대만과의 승부를 앞두고 "코칭스태프와 전력 분석 결과 대만팀 스윙 유형이 밑으로 던지면 잘 못 칠 것 같아서 언더핸드로 정했다"라는 감독의 발언이 대표적이죠. 대만이 언더핸드에 생소해하던 시절은 최소 20년 전입니다. 지금 대만은 자국 리그에 팀당 최소 1명의 언더핸드가 있고 그 투수들의 공을 제일 잘 치는 좌타자들을 한국전에 내세웠습니다. 철저히 체인지업만 노려 들어 올리는 스윙을 가져갔고 2회 2 피홈런 6 실점으로 이어졌습니다. 일본전은 어땠나요. 일본이 구대성-봉중근-김광현에 약했다는 이미지를 복붙 해서 좌완투수를 선발로 내세웠습니다. 채 2이닝도 버티지 못했지요.
물론 한창 강하던 시절의 대표팀 수준에 비하면 투타 모두 만족스럽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야구공은 둥글고 단판승부라 승률을 높일 변수는 차고 넘칩니다. 부족한 전력이라면 준비는 더 정교하고 세밀해야 했지만 한없이 무디고 안일했습니다. 전반적인 준비와 운영을 보면 리더진의 수준이 처참했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충분히 더 잘할 수 있었거든요.
야구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비즈니스나 우리 일상도 그렇겠죠. 수많은 전략과 접근 방식이 생기고 사라집니다. 끊임없이 배우고 공부하지 않으면 따라갈 수 없습니다. 좋았던 과거의 기억이나 전통적인 접근법만으로는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공부하지 않는 지도자에게 승리는 쉽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남을 가르친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공부하지 않는 코치는 자신만 낙후되는 게 아니라 그가 속한 팀의 선수들까지 함께 후퇴하게 만듭니다. 수많은 기술이 발전했고, 덕분에 과학적인 접근, 숫자와 데이터로 기록을 보고, 영상을 녹화해서 여러 차례 돌려 보거나 영상의 화질이 좋아 작은 움직임까지 다 잡아내는 환경에서 공부하지 않는 지도자는 팀을 위해서라도 물러나야 합니다.” -덕 래타-
지도자들의 문제는 그래도 의지만 있으면 비교적 단기간에 해결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얘기가 다릅니다. 단기간에, 그것도 해결될 문제가 아니거든요. 아래 표는 인기종목의 아마 선수 등록 현황입니다. 종목 할거 없이 얇은 선수층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나마 축구는 사정이 낫군요.
2024년 교육 기본통계를 보면 유치원·초중고 학생 수는 563만 명입니다. 2014년 700만 명이 넘던 것에 비하면 10년 새 140만 명가량이 줄었습니다. 특히 초등학생만 1년 새 13만 명이 감소했다는 점이 문제의 심각성을 더합니다. 이 추세대로면 앞으로 10년 뒤 서울 초중고생은 지금의 절반 이하로 줄어들게 됩니다. 이 정도면 망했다는 표현이 과하지 않습니다. 참고로 올해 합계출생률은 0.6명대가 확정적입니다. 전 세계 최하위권입니다.
가뜩이나 얇은 선수층에 인구소멸까지 겹치면 유소년 야구는 궤멸할지도 모릅니다. 줄어드는 선수층에 인기스포츠라고 예외겠습니까. 한 자녀 가정이 대세일 텐데 프로가 되기 위해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치열한 경쟁을 거쳐야 하는 좁은 길을 자녀에게 권할 확률, 얼마나 될까요. 등록선수가 없어 대회참가를 포기하고 기권패를 막기 위해 부상 선수도 코트 한편에 세워둘 수밖에 없었다는 여자농구의 사례가 야구에도 벌어지지 말란 법은 없습니다.
생각해야 할 부분은 또 있습니다. 바로 야구가 예체능이란 사실이지요. 예체능 분야는 개인의 재능보다 부모의 경제력이 성패를 좌우합니다. 혹시 재능이 있더라도 돈이 없으면 꿈을 키우기 어려운, 부모의 경제력이 가장 큰 재능입니다.
야구가 참 비쌉니다. 한 달 회비로 100만 원은 기본이고 간식비(대략 3~40만 원)는 별도로 내야 합니다. 여기에 사설 레슨장을 다니려면 월 100만 원은 각오해야 합니다. 프로 선수 출신에게 레슨을 받으려면 시간당 10만 원은 기본이죠. 그나마 글러브 같은 장비는 한 번 사면 오래 쓸 수 있긴 하지만 툭하면 부러지는 나무방망이는 하나에 15~20만 원, 10만 원은 훌쩍 넘는 스파이크도 금방 닳아버립니다. 겨우내 해외 전지훈련이라도 나간다면 목돈 나갈 각오를 해야 합니다. 부모의 경제력이 따라주지 못하는 가정의 학생들은 야구부 소속으로 활동하는 것조차 어려운 게 현실입니다.
학생수도 줄어드는데 진입 및 유지비용까지 높습니다. 점점 심해지는 양극화 추세를 생각해 본다면 이 비용은 점점 올라가겠죠. 지금은 프로 가려면 3억은 써야 한다는데 5년 뒤, 10년 뒤엔 과연 몇 억까지 써야 할까요.
올해 크보는 1000만 관중을 유치하며 사상 최고의 한 해를 보냈습니다. 팬데믹 사태 이후 늘어가던 인기가 올해 만개를 한 거죠. 경기 외적으로는 크보 역사에 남을 성장세를 보였지만 정작 리그의 질 자체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올림픽과 WBC를 거치면서 대외 경쟁력에서도 물음표를 남겼습니다. 이번 Premier 12에선 그 물음표, 느낌표로 바꾸긴 했습니다. 이쯤 되면 참사가 아닌 실력이라고 말이죠.
여러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얇은 선수층에 인기가 몰리면서 벌어진 배부름 논란, 트렌드에 뒤떨어진 게으른 지도자, 가속화되는 인구소멸, 여전히 비싼 진입비용 등등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야구팬의 한 사람으로서 당장은 속상하고 분하며 부끄럽습니다. 진짜 위기는 시작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두렵기도 합니다.
과거의 영광을 바로 되찾기는 어렵겠지만, 새로운 영광의 시대를 위한 위대한 도전에 나서길 바랍니다.
너무 늦지 않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