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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어학연수] Orange Juice

by 다락방

오늘 아침엔 달리기를 하러 나갔다.

기온은 30도, 아홉시가 넘은 시간이라 해가 쨍쨍하게 내리쬐고 있었고 뜨거운 햇볕을 고스란히 받으며 천천히 달렸다. 싱가폴에 오고나서 나는 내 달리기가 자꾸 더 안좋아지는 것 같아 좀 스트레스였다. 속도도 현저히 느리고 게다가 5km 도 채 달리지 못한 채로 많이 힘들어진거다. 올해 초에 12km 를 달린 기록이 있고, 또 10km 마라톤에 나간 적도 있는데, 도대체 왜 지금은 5km 도 달리지 못하고 힘들어하는걸까. 게다가 페이스도 항상 8분이 넘어갔다. 이렇게 느리게 달리는데도 힘들고 심박수도 높았다. 남들은 달리면 달릴수록 페이스도 빨라지고 또 달리는 거리도 더 늘어나는데, 도대체 나는 왜 퇴보하는걸까. 그래서 달리기를 포기할까 하는 생각도 했다. 더 나아지지도 않고 뒤로 가는 실력이라면, 도대체 내가 달리는 이유가 무어람?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달리는 이유는 더 잘 달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달리기 하는 감각을 잊지 않기 위해서이고, 또 운동 그 자체를 위해서라고 다시 한번 되새기곤 했다. 그렇다해도 느리게 달리면서 힘들다는건 사실 좀 의욕이 떨어지게 만들었다. 이런 고민을 할라치면 여동생은 싱가폴의 날씨 얘기를 했다. 이렇게 뜨겁고 더울 때는 몸이 영향을 받아서 잘 달려지지 않는거라고 했다. 나는 동생의 그 말이 나를 위로하고자 하는 말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나는 어쩌면 여동생의 말이 나를 위로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사실에 근거한건 아닐까, 라는 생각을 불현듯 하게 됐다. 오늘 아침에 달리는데 역시나 속도가 느린데도 심박수가 높고 또 너무 힘들어서 간신히 간신히 5km를 달려낸거다. 달리기한지 이제 2년이 다 되어가는데, 사실 매일 10km 정도는 우습게 달려야하는게 아닌가, 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달리기는 또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건강하게 살려고 달리기 하는데 이렇게 우울할 일이 뭐야. 그러다 여동생의 말이 생각나, 정말 날씨 탓인건지, 이게 단순한 위로인건 아닌지, 혹시 나의 단순한 핑계는 아닌지 궁금해서 챗지피티에게 물어보았다. 챗지피티는 이런 답을 했다.

챗지피티는 이렇게 말했다.

아, 더운 날씨는 그저 핑계가 아니었구나. 정말 내가 잘 달리지 못하는 원인이 되는거였어.

이걸 여동생에게 말했는데 여동생이 자기가 진작에 말하지 않았냐며, 더운 날씨 자체가 이미 몸에 스트레스라고, 체온 조절이 힘들기 때문이라고, 새벽 달리기나 일몰후 달리기가 방법이라는 거다. 자신이 생물교사인데 왜 자신의 말을 무시하냐며, 이미 심장이 스트레스 받고 있는데 계속 달리기까지 하면 심장이 아주 힘들어하고, 체온 계속 올라가니까 그것도 잡아줘야 해서 몸이 진짜 스트레스 받는다는거다.


달리고 집에 와 거울을 보니 얼굴이 진짜 시뻘개져 있었다. 원래 달리기 한 후에 얼굴이 벌개지기는 하지만, 와 오늘 빨간건 그동안 빨간 건 아무것도 아니게 보일만큼 대단히 불타오르는데?


내 성격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이 '네가 하는데 내가 왜 못하냐!' 이다.

이런 점은 나를 여러가지에 도전을 하게 하고 또 성취감을 느끼게 하지만, 내 육체와 멘탈을 역경속으로 몰아넣기도 한다. 예를들면, 일전에 전현무가 파김치 담그는 걸 보고 '전현무도 하는데 내가 왜 못하냐' 며 나는 파김치 담그기를 시도했고, 지금은 내가 담근 파김치만 먹는 사람이 되었다. 이번에 달리면서도 여동생이 더운 날씨탓이라고 했을 때, '아프리카 사람들도 달리는데, 싱가폴의 다른 사람들도 달리는데 내가 왜 못달리냐'는 정신이 발동해 달렸다가 자꾸만 느리고 힘들어서 우울했던거였다. 그런데 여동생은 내게 '언니는 싱가폴에서 태어나 자란 싱가포리언이 아니잖아' 라고 말했다. 하아- 내가 그걸 잊고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 아니라 이곳의 날씨가 마치 아무것도 아닌듯 할 수 없는 거였다. 내 몸은 사계절 있는 대한민국에 셋팅되어 있는데.. 내심 더운 나라가 달리기를 즐기기에 더 좋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의 내게 달리기는 힘들고 잘 안되는 운동이 되었다. 그래서 자꾸만 우울해지려고 하는데, 그래도 이제 그게 내 탓이 아니라 날씨 영향이라고 생각하니 조금 나아지는 기분이다.


그렇게 수차례 달리기를 포기할까 하면서도 계속 달렸던 데에는, 나에게 하는 다짐 외에도 사실 다른 동기가 하나 더 있다. 이 동기는 정말 중요하다. 오늘도 너무 뜨겁고 잘 안달려지고 힘들어서 그만 달릴까, 하다가도, 그러면 오렌지쥬스를 맛있게 먹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해서 기어코 5km 를 달려낸거다.


그렇다, 오렌지 쥬스!


싱가폴에서 이 오렌지쥬스는 가성비 끝판왕이다. 2달러인데 그자리에서 오렌지를 착즙해준다. 설탕이나 다른 기타 물질이 포함되지 않은건 물론이다. 이게 집에서 만들어 먹으려고 하면 일단 휴롬부터 들여야 하고 오렌지를 사야하는데, 그렇다해서 항상 신선한 오렌지를 먹을 수 있는건 아니다. 오렌지 한 봉지 사면, 그걸 다 먹는데 시간이 걸릴테니까. 게다가 음식물 쓰레기도 내가 처리해야하겠지.

그러나 싱가폴에서 이 오렌지 착즙수스는 내 수고를 들일 필요가 없이 단돈 2달러에 바로 신선하게 마실 수 있다. 그리고 더운 날씨에 땀 흘리며 달리고나서 마시는 오렌지주스는 진짜 세상에 둘도없는 맛이다. 너무 좋아서 이 시간이 기다려질만큼. 그래서 오늘도 달리기 그만할까 하다가도, 안돼 오렌지쥬스 마시자, 하면서 달릴 수 있었다.


이 오렌지 착즙주스 자판기는 싱가폴의 어디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다. 길거리에서도 볼 수 있고 쇼핑몰에서도 볼 수 있으며, 우리 학교에도 있고 또 우리집 아파트 들어가는 현관에도 있다. 어디에나 있고 누구든 쉽게 마실 수 있다. 학교에서도 쉬는시간에 나가서 이거 가져오는 학생들이 제법 있다. 나는 학교에서 마시지는 않지만, 달리고나면 마치 의식처럼 이걸 마시곤 한다. 너무 맛있어. 만약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이 오렌지쥬스가 제일 생각날 것 같다. 나는 달리고난 후 마시는 이 오렌지쥬스가 너무나 꿀맛이라 마시는데, 여동생은 내가 달린 후에 오렌지쥬스 먹는게 항산화 작용에 좋다고 했다. 그게 뭔데? 좋은거야? 물었더니, 응, 좋은거야, 라고 여동생은 답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생물교사인 여동생이 좋은거라고 말했으니 좋은거겠지. 절대적으로 믿어야 한다. 하여간 나는 몸에 좋자고 마신건 아니었고, 땀 흘린 뒤에 마시면 너무나 맛있어서 마신건데 그게 건강에도 좋다니 너무나 땡큐인 것입니다. 제 살 길 제가 찾는 편..


그렇게 오늘도 달렸고, 그렇게 오늘도 우울했지만, 그런데 이제는 더이상 달리기 속도나 그 강도 때문에 우울해하지는 않기로 했다. 샤라라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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