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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락방 Sep 22. 2020

《코로나 사피엔스》

마음의 질서를 찾자

《코로나 사피엔스》, 최재천 외 지음, 인풀루엔셜(주), 2020

몇 해 전에 들었던 정희진 쌤 강연에서 정희진 쌤은 본인에게 필요한 모든 지식은  책으로부터 얻는다는 말씀을 하셨더랬다. 나는 책을 좋아하고 책으로부터 얻는 게 무척 많다고 자부하면서도, 필요한 모든 지식을  책으로부터 얻는다는 게 가능할까, 더 많이 읽는다면 결국 그렇게 될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의심했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어쩌면 책으로부터 모든 지식을 얻는 것은 가능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책으로 만들어져 나오는 속도가 있으니, 또 그 책을 내가  읽어야 하는 시간도 필요하니, 모든 지식을 제때에 얻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 필요한 지식을 얻는 것은  가능하겠구나. 


나는 코로나 19 이후의 삶에 대해서 처음부터 불안해하지도 않았고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마스크도 벗을 것이고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예전처럼' 비행기를 타고 내가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한 시간은 고작 한두 달 정도였는데, 지금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도 코로나는 종식되지 않고  있고, 그 사이에 나는 계획했던 여행을 취소해야 했다. 너무 가고 싶은 마음에 아직 9월 계획을 취소하지 못하고 비행기와 호텔에  예약이 잡혀있는 상태인데, 지금은 6월 초이고 9월까지는 세 달 남았으니,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내심 바라고 있었다. 지금도  바라고 있다. 그러다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됐고, 이 책에서 여행에 대한 언급이 있다는 친구의 얘기를 듣고는 얼른 사서  읽었다. 내 생각보다 길어지는 이 코로나 사태에 대해서 좀 더 알아야 하겠기에. 



처음  등장하는 최재천 박사의 이야기들로 아주 중요하고 당연한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자연과 화해해야 한다는 것. 사실 화해라기보다는  자연을 더 이상 침략하지도 공격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것이 맞겠다. 최재천 박사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옮겨진 것은 '우리가  전례 없이 야생동물들을 건드려대기 때문' (p.25)이라고 말한다. 박쥐가 우리한테 부러 와서 옮겼느냐, 아니다, 우리가 박쥐를  잘못 건드린 거다, 라는 것. 결국 인간이 자꾸 숲으로, 야생으로 들어가서 들쑤시기 때문에, 건드리지 않았다면 옮기지 않았을  바이러스들이 인간에게 찾아왔다는 거다. 어렴풋하게 알고 있는 것을 확실하게 정리해주니 코로나가 종식된 이후라도 우리는 더 이상  예전처럼 살던 방식을 유지해서는 안 되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거다.



그리고  홍기빈은 여행에 대해 언급한다. 뭐라고 말할지 듣고 싶었지만 듣기 싫은 그런 양가적 감정으로, 알아야 하지만 알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여행에 대한 홍기빈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는 우리가 대체 왜 해외여행을 그렇게 다녀야 하느나며, 내 안의 욕망을  다스리자고 얘기한다. 홍기빈의 얘기를 읽고 또 읽으면서,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그 무엇보다 내 욕망에 스스로 질서를 부여하는  일이겠구나, 싶다. 내 마음을 다스려야지. 실상 내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는 건 내가 굳이 책을 읽지 않아도 아는 거였다.  가고 싶지만 갈 수 없는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대체 뭐란 말인가. 지금은 갈 수 없다고 나를 다스리는 것 밖에 더 있겠는가.  그러나 내가 이렇게 생각했다고 해서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아주 자주, 얼른 정리되어 날아가고 싶다고, 요이땅만 하라고,  그러면 바로 앞으로 튀어가겠다고, 의욕 충만한 상태였던 거다. 그러나 이렇게 누군가 활자로 얘기해서 정리해주니, 좀 더 단단하게  질서를 잡자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리고 꼭 가야만 하는 건 아니라는 것을 내가 나에게 좀 더  자주 부드럽게 말해줘야겠구나. 이렇게 쓰면서도 그런데 너무 속상해. 하...




이번  코로나 상황을 보면서 미국에 대해 가장 놀랐다. 너무나 급속하게 확진자가 생기고 사망자도 늘어나는 것에 너무 몰라서, 도대체  미국이, 우리가 알고 있는 선진국인 미국이 도대체 왜 이렇게 대책 없이 무너져가고 있는가, 생각한 거다. 게다가 뉴스 화면상에서 보는  미국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예방에 참여하는 것 같지도 않은 거다. 게다가 최근에는 백인 경찰이 흑인을 사망케 하는 사건도  일어나 미국 전역이 들끓었다. 한마디로 지금의 미국은 총체적 난국인 것 같았다. 치료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분노한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미국의 지도자에 대해 생각했다. 만약 지도자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렇다면 미국은  지금과 달라졌을까. 다른 지도자였다면 코로나가 확산될 때에 그리고 백인 경찰이 '또' 흑인을 사망케 한 일에 대해, 다른 지도자는  어떻게 대처했을까,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이것은 지도자의 문제인 걸까. 곳곳이 들쑤셔진 미국은 그렇다면 안정이 찾아오긴  할까, 언제 찾아올까, 에 대해서 좀 충격적인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김누리'가 말하는 미국에 충격받은 한국인중에는  이렇게, 내가 있었다.



미국은 사실 내게는 어릴 적부터 가고픈 나라였다. 선망의  대상이랄까. 내가 보았던 영화, 내가 읽었던 책, 내가 들었던 음악에 미국이 있었다. 센트럴 파크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내가  살면서 꼭 가봐야 할, 가보고 싶은 곳이 되어 있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내 손으로 돈을 벌고 나서 미국에 여러 차례  다녀온 뒤에도 뉴욕이란 도시에 대한 열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는 현실적이 되어 '언젠가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여기는 내가  살 수는 없는 곳이구나'로 바뀌게 되긴 했지만, 그래도 어김없이 언제든 또 찾아가고 또 방문하고 싶은 곳이었다. 그런 곳이  이렇게 처참하게 엉망이 되는 걸 보는 건 충격이었는데, 어쩌면 (이 책의 정관용 표현대로) 엉망이 '되는'게 아니라 엉망이었던 모습을 내가 미처 보지 않았던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나는 그곳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여기에 사는 사람이었으니까. 내가 미국에 '여행'차 갔을  때에는 단순히 여행자의 모드로 그곳을 보았지, 거주자의 눈으로 그곳을 보진 못했을 테니까.



그러고 보면 반미정서가 가장 적은 나라가 한국이라는 말은 맞는 것 같다. 내가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으면서 그런 나라의 사람이라는 것이 씁쓸하다. 우리에겐 어떤 시간들이 있었던 걸까. 


얼마 전에도 미국에 저항하는 나라, 에 대해서 친구랑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테헤란에서 롤리타를 읽다에 대한 감상에서 얘기하게 된 건데, 그때 나는 친구에게 '모신 하미드'의 《주저하는 근본주의자》의 인용문을 들려주었더랬다.



다음날 저녁은 우리가 마닐라에서 보내는 마지막이어야 했어요. 나는 방에서 짐을 싸고 있었어요. 텔레비전을 켰을 때 처음에는 영화가  나오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계속 보니까, 영화가 아니고 뉴스더라고요. 뉴욕 월드트레이드센터 쌍둥이 건물이 하나둘 무너지더군요.  그때, 나는 미소를 지었어요. 그래요, 혐오스럽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의 첫 반응은 놀랍게도 즐거움이었어요.


(중략)


하지만 그 순간, 나는 그 공격의 희생자들을 생각한 게 아니에요. 텔레비전에서는 어떤 허구 인물이 죽으면 마음이 많이 움직이죠.  여러 일화를 통해 내게 친숙해진 인물이 죽으니까 그런 거죠. 그런데 그 순간은 그게 아니었어요. 나는 그 모든 것의 상징성에  빠져들었던 거죠. 누군가가 그렇게 가시적으로 미국의 무릎을 꿇렸다는 사실에 그랬던 거죠. -주저하는 근본주의자, 모신 하미드, p.66-67



파키스탄  사람인 주인공이 미국에서 공부하고 미국 여자를 사랑하고 미국에서 직장을 잡고 살지만, 그러나 미국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에 대해  쓴 소설이다. 그는 이 거대한 미국,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살지만 사실은 그 누구보다 배타적인 미국을 무릎 꿇게 한 상징성에 대해  즐거워한다. 주인공도 이런 자신의 감정에 대해 혹여나 사람들이 혐오감을 느끼지 않을까 싶어 저어하긴 하지만, 그러니까, 어떻게  미국한테, 이렇게 거대한 나라를 어떻게, 감히, 무릎 꿇릴 생각을 했을까, 에 대해 생각한 거다. 

미국은 나에게, 이슬람 사람들에게, 유럽 사람들에게, 아시아 사람들에게,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어떤 나라였던 걸까.  




미국에  친구들이 있다. 다른 나라에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이 멀리 있다는 것이 나에게 그동안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정말 그렇게 만나기도 했으니까. 그들이 내가 있는 곳으로 오기도 하고 우리의  중간지점인 다른 나라에서 만나기도 했었으니까. 나는 별 걱정 없이 이런 삶이 언제든 가능할 거라고 믿었다. 그러니까 내 '의지'와  '시간'과 '돈'만 있다면, 아무리 먼 곳에 당신이 있어도 우리가 언제든 만날 수 있다, 고 나는 생각해왔다. 그러나 코로나  때문에, 산불 때문에, 태풍 때문에, 지진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그런 삶을 살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에 있는 친구를  만나러 가는 일은 내게 가능해질까? 가능하다면 그건 언제쯤일까? 그리고 그렇게 내 욕심을 채우려고 하는 일은, 정말  괜. 찮. 은. 걸. 까?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을 내가 만나겠다는 것이, 또 다른 식으로 결국은 자연과 인간을 공격하게 하는 건  아닐까. 이제 사랑하는 사람들과 만나는 일에도 나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야 하는 것일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다면 그런데, 우리는  만날 수 있을까? 



이 책의 여섯 학자 들은 모두 우리가 '예전처럼' 살게될 순  없을 거라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가 살게 될 삶은 어떤 모습일까. 우리에게 잠재력이 있으니 희망을 갖자고 말하는데, 나  역시 이모든 상황이 안정될 것이고 우리가 적응할 또다른 삶의 모습에 우리는 결국 익숙해질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서도 순간순간  우울해진다. 새로운 것에 적응해야 하는 것도 두렵고 간절히 원하는 것을 뒤로 밀어두어야 하는 것도 두렵다. 무엇보다 이 두려움이  오래 지속될까 두렵다. 마음의 질서를 찾자고, 반복해 속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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