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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레브 Mar 12. 2024

미국 박사생활이 만든 심리적변화

어느 날, 지도교수가 물었다.

"첫 논문 쓰는 거 어떻게 느끼니?"

How do you feel ...?












느...낌? 느으끼임?

그게 뭐더라?







































그래서 결국 "아무 느낌 없어."라고 대답했다.

Feel? 그게 뭐예요?




















첫 논문을 얼마 전에 마무리 지었다.

나름 걱정을 한 건지 어쩐지 지도교수가 유달리 '논문 쓰는 거 어떻게 느끼니?' 기분이 어때?라고 종종 물어봤다.

이게 개인적인 특성인지, 한국 직장인으로서 훈련을 받아서 그런 건지.

난 일을 할 때 내 기분이나 느낌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하는 거지.


데드라인이 있으니까 매일 할 분량을 쪼개서 그날 그날 할 일을 하는 거지.

그날 분량을 했으면 기분 좋고 못 했으면 좀 찝찝한데 내일 분량을 수정하고.

별생각 없이 눈앞에 있는 일을 하는 것.


처음 박사생활을 할 때는 감이 없으니까 불안했다. 

할 일은 많은데 시간은 턱없이 모자라고 머릿속에는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복잡하고. 

뭔가 계속 뒤쳐지고 중요한 일정을 놓칠까봐 스트레스를 너무 받았다.


그래서 예전에 회사에서 하던 습관을 다시 해보기로 했다.

아무리 바빠도 출근해서 5분 정도는 가만히 앉아서 플래너에 한주, 한 달 할 일을 정리하고 그날 하루에 꼭 처리해야 하는 건 뭔지, 좀 기다려도 되는 일은, 아니면 빨리 처리할 수 있는 건 뭔지 확인하는 루틴.

이게 업무처리에도 도움이 되었지만 멘털 관리에 큰 도움이 되었다.


큰 업무도 잘게 쪼개서 정리해 놓으면 큰 건 하나가 아니라 단계별 할 일로 보이니까 할만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너무 부담이 큰 일은 생각만 해도 스트레스 받으니까 자꾸 미루는 습관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실체가 있는 종이에 글로 생각을 정리해서 실체를 만들어 놓으면 좋았다.

연구에서도 밝혀진 내용이라고 함. 


유학 준비하면서도 스터디 플래너 덕을 봤었다.

그래서 유학 생활 적응이 너무 힘들 때 생각한 게 종이 플래너.

사실 몇년 동안 디지털 플래너만 사용했었는데, 생산성에는 몰라도 멘탈관리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거 알지 않는가? 공부하는 사람들은 문구류 쇼핑하거나 플래너 작성하는데 시간을 쓰는 건 양심의 가책이 덜 하다는것. 이것도 일종의 공부준비하는 거니까. 나만 그런가?


그리고 잘게 쪼개진 단기 태스크를 처리하다 보면 아무리 큰 업무도 어느새 80%, 90% 완료 상태가 되어 있다. 아무리 큰 일이라도 정신적으로 처리하는 게 쉬워진다.

여기서 느낄 기분이란 '브레인 덤프 Brain dump'라고 뇌 속에 다소 추상적으로 엉켜있는 스트레스를 종이에 글로 옮겨서 물체화하고 완료 후 박박 지우는 개운함이다.

 

이게 실체가 없는 '일'이라는 거에 의미를 부여하면, 예를 들어, 이 논문이 잘 통과될 거야 라는 긍정적인 것부터 이 논문을 보고 교수가 실망하면 어쩌나, 이걸 통과할 수 있을까 등의 생각  도움이 안 되더라.

좋은 생각은 잘해야 된다는 부담이 커지고, 나쁜 생각은 우울해져서 방해되고. 

'기분'이라는 걸 생각하는 순간 왠지 열면 안 되는 판도라의 상자 같은 느낌이었다.


이것도 연구에서 나온 건데, 사람은 뇌의 인지 에너지가 모자라면 흑백 논리에 빠진다고 한다. 지금 좋지 않으니 계속해서 나쁜일만 생길 것이라고 믿게 된다고 한다. 이때 '왜 내가 이런 기분이지?' 혹은 '내가 왜 이렇게 지치지?'라는 질문을 하면 자기 비난적 성향을 띠기 쉽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들은 안 그런데 나만 힘든가 봐, 처럼. 논문을 예로 들면, 남들은 술술 쓰는데 내가 바보라 (늙어서) 나만 힘들구나, 이런 거지 같은 논문을 써봤자.. 에이. 뭐 이렇게 되기 쉽다.


그래서 처음에 이야기한 대로 내 지도교수가 '첫 논문 쓰는 기분이 어때?'라고 물어볼 때마다, 신경 써주시는 건 너무 고마웠지만

'아무 느낌도 가지지 않아'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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