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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Nov 05. 2018

내 능력보다 더 주목받는 내 구두 값

"상무님이 오늘 신고 온 구두가 얼마짜린 줄 알아?"



 내가 아직 신입사원이던 시절의 이야기다. 상품본부 MD들의 대대적인 해외출장을 앞두고 있던 어느 날, 전 부문 부문장들이 참관하는 사전 미팅이 열리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갓 입사한 사원 신분으로 직접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바로 지척에서 W상무님을 뵐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W상무님은 신입사원 연수 시절부터 나의 동경의 대상으로, 각 부문 부문장들 중 유일한 홍일점이셨는데, XY로 점철되어 있는 무리 중에 가장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이 인상적인 분이셨다. 흔히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여성에게 붙는 '여풍당당'이란 시혜적인 수식어가 아니라 '위풍당당'이라는 말 그 자체가 의인화된 모습이셨으니까. 


  그동안 내가 친구들과 어떤 여성이 <멋있다>고 칭할 때는 그의 얼굴이나 옷 스타일, 또는 몸매 때문에 그런 감탄사를 내뱉었지만, 난생처음으로 여성의 당당한 화법과 흐트러짐 없는 중후한 분위기가 <멋있게> 느껴졌던 것이다. 한껏 화려한 메이크업을 하지 않아도, 성적 매력이 부각되는 옷을 입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 계속 함박웃음을 짓거나 맞장구쳐주는 리액션을 해주지 않은 여자도 '사회적 지위' 하나만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 최초의 인물이었다.


 생각해보니 그동안 나를 포함한 세간의 사람들은 여성의 '예쁜 외모', '애교스러운 말투', '사근사근한 태도'에 매력 있다는 수식어를 붙였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누구도 여성을 상대로 '중후한 매력이 있다'라고 칭찬하는 소리를 들어본 기억이 없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왜 그런 걸까? '중후함'은 지극히 남성적이고 마초적인 형용사이기 때문에? 프랑스처럼 한국 표준말 대사전에도 여성 남성 명사와 형용사가 나뉘어 있기라도 한 걸까? 궁금증에 네이버와 구글 검색창에 중후함이란 형용사를 검색해 보았다. 


 중후하다 重厚-- [ 중ː후하다 ]  듣기  (활용형: 중후함)

 1. 태도 따위가 정중하고 무게가 있다

 2. 작품이나 분위기가 엄숙하고 무게가 있다 

 3. 학식이 깊고 덕망이 두텁다


 사전적 정의 어디에도 '남성 형용사'라는 사족이 붙어있지 않았지만, 각종 포털 사이트마다 '중후한 매력'이라는 검색어에는 이미지 탭 가득 남배우들의 기사와 사진들만 넘쳐나고 있었다. 반면 '동안 매력'이라는 검색어에는 완벽한 성비 반전이 일어났다. 


 '화무십일홍은 다 옛말이다! 딸처럼, 이모처럼 보이는 엄마. 젊줌마처럼 보이는 늙줌마' 콘셉이 각광받는 기형적인 사회 속에서 여성도 주름을 가리지 않고, 집단 구성원들 향해 서비스 노동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무게감 있는 분위기만으로 충분히 매력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신 롤모델과도 같은 분이셨던 셈이다. 


그렇게 며칠이 흘러 회의 날 아침이 밝았다. 

간부급 아래 직원들이 모두 착석한 뒤 상무 이상의 임원급들이 한두 명씩 회의실로 걸어 들어올 때였다. W 상무님께서 사원들 자리를 지나쳐 지나간 뒤로 여러 가지 소음이 터져 나오는 것이 들려왔다.


 "저 구두가 Y브랜드 F/W 신상인데 저 한 켤레가 너 월급보다 비쌀 거다. 남편이 국제변호사인 건 알고 있지? 굳이 맞벌이 안 해도 될 텐데..."


 "화장이랑 헤어를 샵에서 매번 받고 온다는 얘기가 있던데?"


 "그럼 새벽마다 살롱 다니시는 거래?"


 "야~부지런도 하시네 ㅋㅋ 그 정성으로 부문애들 야근이나 좀 그만 시키시지.."


 "얼굴이 어쩜 저렇게 팽팽해? 나이도 드실 만큼 드시지 않았어? 관리 빡시게 받나 보네"


 이상하게도 그 누구도 다른 남자 상무님들에겐 왈가왈부하지 않는 요소들이 W 상무님에게만은 잣대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다른 상무님들의 헤어스타일이 오늘은 어떤지, 손목에 찬 시계가 얼마 짜린지, 오늘 신고 온 구두가 어느 브랜드의 얼마 짜린지 궁금해하지 않았으니까. 또 그들의 반려자분들이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얼마의 수익을 올리는지에 대해 입방아를 찧지 않았으니까.  


w상무님이 담당하는 부서 하위 소속팀으로 발령이 났던 남동기에게 들었던 얘기들이 플래시백처럼 이어 재생되기 시작했다.


 "남자 임원들 사이에서 똥줄 빠싹 타는 거 같더라. 미친 X처럼 주말 출근해가면서 독하게 일에만 매달린다니까."


 주말 출근을 불사하는 기획팀 남팀장은 살신성인 워커 홀릭이고, 주말을 반납하는 상무님은 미친 x이 되는 회사라는 곳. 


 남자 동기와 선후배를 통해 듣는 w상무님에 대한 이미지는 깍두기, 명품 중독자, 각종 시술에 돈 가져다 받치는 과 소비러, 어떻게든 아등바등 남자들 사이에 껴서 한몫 잡고 싶어 하는 억척스러운 아줌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도 상무님을 먼 지척에서 마주칠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오늘은 어떤 착장을 하셨지? 오늘은 얼마짜리 구두를 신으셨을까?'가 되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주변 사람들의 tmi(too much information) 입방아에 영향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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