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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세뇌
by Ellie Jun 02. 2018

좋은 사람을 만나서,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아


 "예전엔 말이야, 너도 알다시피 나 엄청 예민하고 까탈스럽고 부정적이고 그랬잖아? 근데 A를 만나고 나서부터는 내가 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 평균적으로 기분도 좋고 또 사사건건 불평하는 것도 많이 좋아졌어."

 카페의 유리 창에 송골송골 비가 맺혀들고 있는 여름 오후였다. 뿌옇게 김이 서린 아이스커피의 얼음조각을 빨대로 휘휘 저으며 지인 B의 이야기를 듣던 나는 새삼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다시 쳐다보았다. 새로운 남자친구가 생기고 100일이 좀 넘었다는 그녀는 확실히 몇 달 전보다 환한 낯빛을 하고 있었다.

 "그래? 잘 됐다. 너 지난 학기 내내 엄청 우울해했잖아."

 "그냥 모든 게 똑같은 데 누군가와 함께 하게 된 것만으로 세상의 모든 게 우호적으로 보이는 게 너무 신기한 거 있지. 이건 마치.. 그래, 구원이라도 받은 것만 같아."

 아드득. 입안에 털어 넣었던 얼음을 깨물자 금으로 때웠던 어금니가 속부터 찌르르 울렸다.

  그 뒤로 진행된 우리 대화의 90%는 그녀의 남자친구에 관련된 이야기였다. 그녀와 헤어질 즈음에는 누군가 지나가다가 우산 끝으로 나를 툭- 치면, 쏟아지는 물방울처럼 후두두 쉼 없이 읊조릴 수 있을 만큼 A의 신상정보를 꿰뚫게 되었다. 그의 이름, 나이, 사는 곳, 성장 배경, 학교, 어떻게 둘이 만나게 되었는지, 어디를 함께 다녔는지, 말버릇은 무엇인지.. 그의 취침시간까지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내내 장마처럼 축축 늘어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그녀를 오랜만에 만난 것은 그녀의 남자친구가 어떤 농담을 좋아하는지, 그가 지난 학기 과대표를 맡은 이야기가 궁금해서가 아니었다. 그녀와 종일 이야기를 했지만, 어쩐지 그녀의 남자친구와 만나 실컷 수다를 떨고 온 기분이었다.  

 다시 그녀에게 연락이 닿게 된 것은 계절이 한번 더 바뀌었을 때였다. 오랜만에 술을 마시자고 권하기에 우리는 그녀의 학교 근처 조촐한 술집에서 초저녁에 만남을 가지게 되었다.

 "다 끝났어. 나쁜 새끼. 이렇게 헤어지면 그동안 우리가 했던 약속들은 다 어떻게 되는 건데..?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모든 게 다 엉망진창이라고. 요새는 술맛 외에는 아무 맛도 못 느껴."

 우리의 만남은 마치 셜록 홈즈와 코난 도일의 접선같았다. 그녀가 상황을 던져주면 함께 머리를 맞대고 거기서 A가 어떻게 대답을 했는지, 반응을 했는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를 토대로 지난한 추리를 이어가야 했으니까.
 그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왜 그 포인트에서 미간을 찌푸렸지? 내가 잘 못한 거 맞지, 응?

 "숨 쉬는 게 숨 쉬는 것 같지가 않아. 빈 껍데기 같아 모든 게."

 탁-. 그녀는 텅빈 잔을 테이블에 떨구며 눈물 방울도 함께 떨궜다.

 그녀에게 일상의 권태를 잠시 잊게 해주었던 구원자가 떠났다. 그렇게 그녀의 천국은 너무나도 간단하게 황무지로 변해버렸다. 생명이 가득했던 초원엔 부서지는 모래만이 가득 찬 채로.

 "이번엔 네가 너한테 사다리를 내려 줘 봐. 그럼 적어도 중간에 걷어차이진 않을 거 아냐."

 남들이 가꿔주는 마음의 정원은 대게 이런 것들로 이뤄진다. 정신적인 지지, 상황에 맞는 조언, 또는 자신이 먼저 겪었던 것에 대한 정보 공유..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딱 거기까지만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다리를 잠시 빌려줄 수는 있어도, 그녀가 평생 오를 수 있는 사다리를 24시간 365일 붙어서 수리해주고 손봐줄 수 없다는 이야기다.






 좋은 사람을 만나서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거라면, 나쁜 사람을 만나면 더 불행한 사람이 된다는 이야기겠지.

 그러니까, 남에게 구원 같은 걸 기대해서 엉뚱하게 본인 인생을 로맨틱과는 거리가 먼 스릴러나 호러 쪽 장르를 타게 만들지는 말자.
 
 원래 구원은 원래 셀프라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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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사랑 세뇌
소속 직업에세이스트
스토리 셀러. 2030대 삶과 사랑의 영역에서 '네 탓, 남 탓'을 하고 있는 사회 구조를 삐뚜름하게 바라보는 글 타래를 엮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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