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 관한 글을 자주 쓰지 못하는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4년전 돌아가신 엄마에 대해 아직도 침착해지기 어렵기 때문이고, 그래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기가 어렵고, 그렇게되면 좋은 글이 나오기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논리적 이유라면,
두번째는 엄마를 사랑한다는 말이 너무나 당연해서 이것을 글로 적는 게 맞는지 의문일 때가 많았다. 하지만 이것은 핑계다. 첫번째 이유로 난 엄마에 대한 글을 쓰고 싶어도 아직 쓰지 못한다. 그럼에도 엄마 하면 가장 강렬하게 떠오르는 기억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엄마가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로 보자기에 싼 고봉밥과 반찬을 가져온 어느 점심 시간에 관한 기억이다.
당시 나는 학교에 가지 못할 정도로 몸이 아팠고, 학교는 가야한다며 우겨서 등교를 했을 것이다. 나이 많은 엄마는 늘 나에게 지는 사람이었다. 아이가 우기니 어쩔 수 없이 학교는 보냈는데, 도시락을 챙겨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리셨을 것이다. 왜인지 아직도 이유는 모르겠는데 엄마는 집에서 손님이 오셨을때나 꺼내는 뚜껑 있는 사기 밥그릇에 밥을 고봉으로 담고, 언니들의 보온도시락 반찬통에 정성스레 김을 넣은 계란말이와 도시락 반찬으로는 귀한 불고기 같은 반찬을 담아 직접 들고 오셨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이런 풍경이 낯선지라 친구들은 고봉밥과 엄마를 번갈아 쳐다보며 눈이 휘둥그레지거나 자기들끼리 킥킥대며 웃었다.
또래 아이들의 엄마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엄마, 꾸미지 않은 모습으로 헐레벌떡 왔을 엄마가 부끄럽고 창피했다. 고작해야 나는 2학년 아니면 3학년 정도 아이였다. 툴툴거리며 밥도 안먹고 그냥 그렇게 점심 시간이 흘렀다. 엄마는 밥이 남은 도시락을 들고 집으로 가셨다.
아이가 다섯이나 되는 집의 막내를 엄마는 유독 아꼈다. 정확한 이유를 말씀하신 적은 없었지만 그건 언니 오빠 뿐 아니라 나도 느낄 때가 많았다. 엄마 돌아가시고 엄마를 추억할때면, 막내가 어렷을때부터 엄마를 참 많이 닮았고 점점 더 닮아간다는 이야기 속에 단서가 있을까.
그날은 분명 엄마가 창피했지만, 그 기억은 두고두고 미화되었다. 자칫 깨질 수도 있는 사기 밥그릇과, 잠금 장치가 없는 덮개가 보자기 사이로 흘러 깨지면 어떡하나 노심초사하며 따듯한 밥을 먹이려고 예정에 없이 학교에 왔을 엄마를 생각하면 내가 특별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동네 아주머니들과 모여서 수다하면서 살림의 시름을 잊었던 엄마는 천상 이야기꾼이었고, 학교 다니기 전까지 혼자 있을 나를 모임마다 데리고 다녔다. 그래서인지 엄마는 내가 글짓기로 상을 받아올 때마다 과한 칭찬으로 기쁜 마음을 드러내곤 하셨다. 언니 오빠들은 그 점을 귀엽게도 못마땅했지만 우리 다섯 중 작가가 나온다면 막내 너일거라고, 그게 당연하다고 모여서 말하곤 했다.
돌아돌아 마흔 넘어 나도 글을 쓸수 있는 시간, 일삼의 틈이 생겼다. 그 틈은 시간이 흘러 자연스레 생긴 틈이 아니라 그 시간을 얻기위해 많은 시간을 고군분투해서 얻어낸, 지금도 그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여전히 투쟁중인 그런 시간이다.
왜 그런 틈을 만들고 싶었나 생각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그날 엄마의 고봉밥이 있다. 엄마를 닮아, 엄마처럼 다른 사람들을 웃게 해주는 막내는 지금도 글을 쓰는 사람으로 남았다고, 앞으로도 즐겁게 글 쓰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고, 언젠가 엄마를 꿈에서 만나면 그 동안 쌓인 이야기를 낱낱이 다 말할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