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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우리는 구닥다리 가족입니다

by 엘슈가

아이만 다섯. 큰언니와 나의 터울은 10년. 10년째 아이를 낳은 집이 있다. 우리 집이다. 어렸을 때는 잘 몰랐다. 다 우리 집 같은 줄 알았다. 70년대의 아주 끄트머리에 태어난 나는 핵가족화되어갈 무렵의 유년시절을 보냈다. 친구들 중에는 형제가 둘, 많아야 셋이었다. 그런데 우리 집은 태어나보니 오 남매였다. 독수리 오 형제도 아니고 오 남매라니.


그러면 아버지가 다정해야 할 텐데, 그래야 맞을 텐데 아버지는 무뚝뚝한 편이었다. 아빠 바라기인 엄마만 늘 애가 탔다. 엄마는 다시 태어나도 아빠랑 결혼하겠다는 대사를 시도때도없이 읊으셨다. 캐릭터로 치자면 마냥 여린 철부지 캐릭터.


아이가 많은 집 아이들은 서로 닮았으려니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린 달랐다. 각자 개성이 강해도 너무 강했다. 그 중에 최고봉은 막내다. 어렸을 때부터 다락방에 처박혀 내려오지를 않아서 쫓아 올라가면 몇시간째 책만 보고 있더란다. 언제부터인가 언니 오빠랑 놀지를 않는 외골수에 아무도 공부를 시키지 않았는데 알아서 밤새도록 공부를 했단다. 애늙은이 같다는 소리를 귀가 아프도록 들으며 자란 애이기도 했다. 하필 그런 막내가 나였다.


바로 위 그러니까 넷째 딸은 어떠했나? 순진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막내 동생에게 늘 지고 당하기 일쑤인 언니였다. 커서는 안 그렇다지만 어릴 때는 그렇게 순할 수가 없었다.


둘째는 아들이었는데 밖으로 도는 아들이었다. 가족보다 친구들을 더 좋아했다. 그래도 아무리 늦어도 집에는 꼭 들어왔다. 수다쟁이인 지금을 보면 믿기 어렵지만 형제들과 말을 잘 섞지 않았다. 사춘기였나보다.


문제는 첫째 딸. 순진하고 여린 엄마를 가까이에서 보며 자라서인지 엄마가 의지를 해서인지 늘 처진 어깨를 해서 다녔다. 엄마를 대신해 동생들을 챙겨야 했던 때가 많았던 첫째였다. 명석했지만 내리 네 명의 동생이 있었기에 과는 당시 취직이 잘되는 회계학과, 대학은 집 근처 대학을 갔다. 셋째 딸 성향도 맏이와 비슷했다.


조카는 또 어떤가? 얘 또한 이상했다. 한참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니며 사는 즐거움을 맛볼 시기에 돌연 "나 할아버지랑 살아볼래" 선언을 한 거다. 나와 25년의 터울이 지는 조카였다. 다 알 순 없어도 이렇게 미지수이기도 쉽지 않을텐데 평소 말이 없는 편인 조카는 묵묵 부답이다. "왜 할아버지랑 살아 보겠다는 거야?" 이유를 물어도 웃기만 할 뿐 별 말이 없었다. 이 상황에서 답답한 건, 일어나는 현상의 이유를 알고 싶어하는 성향인 나 뿐이었던가.




무뚝뚝하고 말이 없는 아버지를 닮아서일까? 우리는 서로에 대한 사랑을 세심하게 말로 표현하는 법을 몰랐다. 좋을 때도 그냥 좋네, 힘들 때도 조금 힘드네, 반가울때도 왔어? 두리뭉실 말해 버릇했다. 그걸 듣고 자란 나는 우리 집에는 딱 그 정도의 사랑만 있는 줄 알았다. 점입가경으로 내 나이 사춘기 때 아버지는 빚 보증을 잘못 서 나날이 가난해졌고 마음이 심약했던 엄마는 누워있는 날들이 점점 많아졌다.


십 대와 이십 대 때 나는 왜 우리 집은 남들만 못할까? 생각하며 남들보다 못 가진 걸 만회해 보려 아득바득 살았다. 지방에서 생면부지 서울로 올라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는데 자꾸만 내 나이의 엄마 아빠가 겹쳐졌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그때의 엄마도, 아빠도 최선이었음을.


우리가 보낸 그 시간은 아무리 간을 해도 싱거운 국이 아닌 진한 아카시아 꿀처럼 꾸덕한 사랑이 흘러넘쳤던 시간이었음을. 서울 사람들처럼 기교 있게 표현은 못 해도 이 구닥다리 가족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세상에서 가장 세련된 사랑이었음을.


이 구닥다리 가족 이야기를 쓰고 싶어서 나는 여러 차례 노트를 펼쳤었다. 몇 해 전 하늘나라로 소풍 가신 엄마가 떠올라 노트를 덮기 급급했다. 후드득 무언가가 떨어지기 시작하는데에는 장사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기록해보려고 한다. 그들이 나에게 준 사랑을. 그 기억이 더 희미해지기 전에. 꾹꾹 눌러써서 다시 선명해질 수만 있다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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