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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슈가 Oct 29. 2020

쇼핑몰 일할 때 오렌지 자몽티가 꼭 필요한 이유

다들 하나씩 있지 않나요?

'오늘은 점심 약속이 있으니 먹고 돌아와 sns로 공지 하나 올리고, 택배 작업을 해야지. 한 2시간 정도 걸릴 것 같으니 마치면 5시쯤 되겠네. 그럼 그때...(흐흣)'


회사를 다니는 남편의 주 5일 패턴은 비슷하지만 회사를 다니지 않고 일하는 나의 주 5일 패턴은 매일매일이 하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듯 버라이어티 하다. 언제 시작해서 어떤 일부터 하고 언제 끝내고 퇴근할지의 계획이 오롯이 내 머릿속에서 나오고 그렇게 실행하고 있다. 마지막 회사를 다닐 때 한동안 홍보팀에 배정받아 일을 했었다. 스타트 업으로 출발해 대기업 반열에 오른 IT/소프트웨어 기업 홍보팀에서 일한다는 것은 일반 직원보다 1시간 일찍 출근, 모든 종이신문과 인터넷신문을 스캔하듯이 본 뒤 핵심만 골라내서 이메일로 정리해서 대표이사 및 임원진에게 발송하는 일의 관리를 담당하기도 했었다. 도무지 숨통이 트일래야 트일 수 없는 날들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내 맘대로다. 온라인에 작은 쇼핑몰을 운영하면서 얻은(?) 장점들 중 큰 장점이었다. 아침에 남편과 린이를 회사와 학교로 출근(?) 시킨 뒤 대강의 액션 플랜을 짠다. 브랜드와 협업 차 올려야 하는 리뷰 포스팅의 기한이 다가와 구상해둔 블로그 포스팅을 쓰며 다용도실에 이불 빨래를 돌리는 게 하등 이상할 것 없는 일상. 나는 내 할 일을 하고 사이사이 집안일이 돌아가게끔(?)해 두면 집안일은 집안일 대로 돌아가는 효율적인 주부 사장님의 삶. 누군가의 구미에 맞는 뉴스만 골라 정해진 시간에 보고하지 않아도 되는 일상. 내 마음대로 한들 누가 뭐라고 할 거야? 난 그 사실이 썩 맘에 들었다.


그런데, 1인 기업 쇼핑몰 운영자의 일상에도 어느 정도는 '룰'이 필요했다. 업데이트 약속을 지킨다든지, 내 sns 플랫폼에 올린 약속은 반드시 지키려 노력한다든지, 나를 믿고 찾아준 고객들의 의견에 귀 기울이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든지, 하다못해 내가 피팅 모델이 될 수 있으니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든지.


왜 지켜야 하는지?라고 한다면, 보는 눈들이 다 '본부장이고 상무라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나는 공짜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수익을 창출하는 일이기에 내 멋대로 하는 것이 아닌 룰을 정하고 그 룰을 내가 스스로 지켜나가는 것이 단기적으로도 중장기적으로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KPI가 있는 것도 아니고 팀제도 아닌지라, 가끔씩 심하게 현타가 오기도 한다. 날씨가 흐려서 일을 하기 싫었다거나 날씨가 좋아서 일 안 하고 놀러 나가고 싶은 날들도 있는 것이다. 일정이 꼬여서 내가 선언한 데드라인을 지키지 못한 날도 있었다.


그래서 내가 마련한 장치가 있는데 무엇이냐면... 바로 할 일 리스트를 80% 이상 완료하면 나에게 상을 주는 습관을 만든 것이다. 80%면 좀 여유로운 데드라인일까? 반대로 힘든 데드라인이려나? 후훗. 문득 나와 같이 혼자 일을 하는 동종업계 분들에게 물어보고 싶어 지는 순간이다.


나에게 주는 상은 어떤 것이냐 하면 작아도 기분 좋아지는 그런 것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최애 음료 1회 음용하기'다. 물론 내타커(=내가 탄 커피)가 아닌 남타커(=남이 타 준 커피)다. 어차피 원두도 땅에서 그냥 나는 게 아닌데 꼭 남타커야 할 필요가 있나?라고 물으신다면 '네'라고 답하겠다. 여기서 커피는 그냥 커피가 아니다.


일을 대강 마무리하고 집을 나와 카페까지 걸어가는 그 길. 몸을 움직이며 가는 길에 이어폰으로 나오는 두어 곡 노래를 들으며 따라 부르는 일. 은행잎이 얼마나 따뜻한 노란색으로 물들었는지, 낙엽은 이제 막 떨어지기 시작했는지 거의 다 떨어졌는지 계절을 살피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해소되는 감정들이 있었다. 말을 잘 듣지 않는 거래처와 지루한 협상 후 든 감정이라든지, 회사 동료까지는 아니지만 업계에서 알고 지낸 느슨한 동료 관계에서 나는 이만큼 생각해줬는데 그 친구는 아니었나 봐 하는 서운한 마음들, 또 한창 바쁠 때 받은 전화에서 고객님에게만 혜택을 안내해준다면서 이번에 선물로 공기청정기를 주는데 다만 TV 한대를 더 개통해서 보라는(TV를 사줄 것도 아니면서) 통신사 직원의 맥락을 알 수 없는 친절함과 하이 텐션까지. 커피 한잔을 사러 나갔다 오면 다 해소되곤 하는 것이었다.


온라인에 작은 상점을 운영해온지 8~9년째. 나는 오후 커피를 사러 나갔다 오는 이 시간들이 너무 좋았다고 고백한다. 그 시간이 있었기에 내가 오래 이 일을 유지해 올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동네에 크고 작은 커피집들이 생겨나고 없어지는 수많은 날들 동안 나는 굳건히 내 자리를 지켜왔다고. 또 반대로 오랫동안 한자리에서 동네를 지키는 커피집을 보면 그렇게 마음이 든든할 수 없었다고. 또 이 최애 커피를 마시는 시간이 있었기에 퇴근 후, 하원 후 돌아온 식구들에게 찌든 모습을 보이는 엄마이기보다는 어느 정도 화사한 미소를 장착하고 식구들을 맞이할 수 있었다고. 이것이 그 시간을 흐뭇하게 회상하는 이유들이다.


커피를 좋아하지만 하루 한잔밖에 허락되지 않는 몸을 타고난(?) 나는 대개 오전에 그 커피를 마신다. 집에서 드립으로 내려마시거나 세상에서 제일 작은 카페를 이용하기도 하고 가끔 달달한 게 당기는 날이면 지체 없이 맥심을 탁 털어 넣어 휘휘 저어 마신다.


그러면 오후에는 커피 말고 다른 것을 마시고 싶은데 마땅한 대안이 없었다. tea를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마시고 나면 조금 든든했으면 좋겠는데 tea는 마시는 순간부터 배가 고파 오더라... 스무디나 에이드, 모카나 바닐라 등의 단어가 들어간 다른 음료들은 내겐 너무 달고 너무 시고 한마디로 너무 자극적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내 영혼을 감싸줄 커피 아닌 다른 음료를 찾았다! 바로 '오렌지 자몽티'다. 이 음료를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설레고 콩닥거린다.


커피 아닌 마음에 드는 마음의 안식이 되는 음료를 찾아냈다는 것이 반가웠다. 한동안 정착하며 마셔오고 있지만 다행히도 아직 질리지 않았다. 내 영혼의 안식을 주는 이 음료는 달달한 오렌지 과즙 베이스에 커다란 자몽 한 조각이 통 크게 척 올려져 있다. 마시는 동안 알알이 터지는 자몽과 오렌지 알갱이는 어떻고... 이 따뜻하고 향긋하고 달달 새콤한 음료를 마시고 나면 속도 든든해지는 게 기분이 참 좋아진다.



이 오렌지 자몽티는 단순한 과즙음료가 아니었다. 지루하고 루틴한 일들을 비로소 끝냈음을 알리는 종지부와도 같았으며 오늘 하루에 해야 할 일을 잘했다고 내가 나에게 주는 상과도 같았다.


어떤 날은 몸살이 슬금슬금 오려는지 온 몸이 찌뿌둥하고 컨디션이 엉망이었는데 문득 띵! 하고 머릿속에 오렌지 자몽티가 떠올랐다. 생각하니 군침마저 돌았다. 그냥 따뜻하게 해놓고 한잠 자는 것이 나으려나? 아냐 그 따뜻한 오렌지 자몽티를 한모금 들이키면 이 병이 나을 것 같은데 나갔다 올까? 고민하기를 30분. 여전히 내 머릿속에는 ‘오렌지 자몽티’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고요? 나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손에 잡히는대로 주섬주섬 옷을 걸치고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투썸으로 달려갔다. 주문하는 곳으로 곧장 향한 나는 직원을 향해 외치고 있었다. '오렌지, 오렌지 자몽티되나요? 그것 한잔을 마시면 오려는 감기몸살도 다 나을 것 같아서요. 제가 힘든 일을 마치고 와서 마시는 그 오렌지 자몽티가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니 만들어 주실 수 있죠? 오렌지 자몽티 따뜻하게 레귤러 사이즈로요!" 간절한 내 눈빛은 이 손님 왜이러나 얼떨떨해 하는 직원을 향하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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