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고?
“그렇습니까?
처음 듣는 소리였다. 박 대표도 그런지 되묻는 목소리에 의아함이 묻어났다.
“아, 내가 미리 이야기한다는 걸 깜빡했구만.”
김 부장은 품 속을 뒤적이더니 명함을 한 장 꺼내 박 대표에게 내밀었다. 하루는 태블릿을 내려다보는 척 눈동자를 돌려 그쪽을 보았다.
명함은 겉치레를 중요시하는 그의 성격이 다분히 반영된 듯한 디자인이었다. 화려하다 못해 번쩍거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정작 가독성은 형편없어 자세히 보지 않으면 회사 이름마저 읽기 어려웠다.
“그럼 이전에 다니시던 회사는…”
“사표 냈네. 얼마 안 됐어. 한 달도 안 되었을테니.”
“사표요?”
박 대표가 놀란 듯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무슨 일이라…”
하루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순간 김 부장의 눈길이 아주 잠깐 그녀에게 머물렀다 떨어졌다.
그가 묘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그냥 좀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려서 말이야. 이야기하자면 기네.”
‘휘말렸다’라…
하루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새삼 그가 달리 보였다.
평범하게 무능하고 여자 밝히는 아저씨인 줄 알았는데 이제보니 특출나게 나쁜 놈이었다. 잘못을 순순히 인정하는 건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저런 말을 내뱉다니. 얼굴 철판이 얼마나 두꺼운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인간으로서의 완성도로 따지면 양 끄트머리에 있을 두 사람이 어떻게 서로를 알게 된 걸까?
“아무튼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후배님. 많이 도와주시게나. 업계에서 손꼽히는 성공신화의 주인공이 대학 동문이라니 아주 든든하구만, 든든해. 허허!”
“아닙니다 선배님. 아직 갈 길이 한참입니다.”
이런 망할!
그놈의 학연은 여기서도 말썽이다. 같은 시기에 학교를 다닌 것도 아닐텐데 이런 정반대의 인간군상을 엮을만큼 강한 인연이란 말인가!
하루의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동안 김 부장, 아니 김상현 대표는 온갖 데이터와 수식이 적힌 서류뭉치를 내밀고는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말이야, 응? 내가 이번에 미국 어디야, 로스엔젤레스에 아는 형님을 뵈러 갔는데 말이야. 그 분이 거기 말리부 해안가 쪽에서 건축 사업을 하신다잖아. 그게 꽤 벌이가 괜찮다고 하시더라고. 옥스퍼드 나온 양반인데, 나랑 고등학교 동창이라 예전부터…”
정황상 박 대표로부터 투자를 받으러 온 모양이다. 그렇지만 사업 설명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장황한데다 영양가 없는 내용이 되풀이될 뿐이었다. 사업 이야기가 조금 나올라치면 자꾸 본인 자랑으로 흘러갔다.
하루에게도 그렇게 보일 정도였으니 박 대표는 오죽했을까. 미팅이 길어질수록 그의 얼굴이 실시간으로 굳어갔다. 시계를 몇 번이나 곁눈질하기도 했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이런, 내가 바쁘신 분을 너무 오래 붙잡았구만. 이러면 안되는데.“
드디어 끝인걸까.
하루와 박 대표의 얼굴에 동시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유리잔에 남은 얼음을 털어넣어 우물거리며 김 부장이 말했다.
“그건 그렇고 박 대표, 지난번에 내가 어디까지 이야기 했더라?”
“어떤 것 말씀이시죠?”
“왜, 먼젓번에 만났을 때 어이없는 일 당했다고 했었잖아요. 회식 자리에서.”
‘당했다'?
김 부장의 눈은 어느새 이쪽을 보고 있었다. 하루는 그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쳤다.
해보자는 거냐.
마음 속에서 불꽃이 치솟았다. 애써 올리고 있었던 입꼬리가 내려갔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뺨이라도 후려갈기고 싶었지만 박 대표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입술만 짓씹는 그녀를 보던 김 부장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관자놀이를 짚으며 복잡한 표정을 짓던 박 대표가 입을 열었다.
“기억났습니다. 신입사원이 뭔가를 끼얹었다고 하셨던가요?”
“기억하네요? 이거 이야기가 빠르겠구만.”
이 인간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고…!
“저기, 말씀 중에 합니다만-”
“괜찮아요. 어차피 그쪽 이야기니까.”
하루가 멈칫하자 김 부장의 눈이 처음으로 이쪽을 보았다. 순간 하루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렇죠? 이하루 양?”
정적이 흘렀다. 아주 잠깐, 그러나 꽤 깊게.
박 대표의 눈길이 김 부장에게 머물렀다 떨어졌다. 잠시 생각하는 표정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제 비서와 아는 사이십니까?”
“알다마다요. 아주 잘 알지요. 그렇지 않나, 이 사원?”
김 부장을 쏘아보는 하루의 눈빛이 흔들렸다.
맞다. 알고있다. 아주 잘 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다.
한 달이 지난 지금도 종종 그 날의 꿈을 꾼다.
동료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주문벨이 연신 시끄럽게 울린다. 김 부장의 두꺼비같은 손이 연신 어깨와 손등에 얹어진다.
하지만 몸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후회하는 건 아니다. 수백 번 시간을 되돌린다 해도 똑같이 행동할 생각이다. 아마 잡채보다 더한 것도 집어던지리라.
하지만 여전히 무서웠다.
‘그런데 하루 씨, 왜 일을 크게 만드려고 해?’
어떻게 해도 변하지 않을, 동료들의 모습이.
잘못은 저 사람에게 있다. 먼저 선을 넘은 것도, 입에 담기 힘든 욕을 퍼부은 것도 저 인간이 저지른 일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내게 가만히 있으라 말한다.
저 남자는 저렇게 웃고 있는데 나는 왜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걸까.
가만히 있었어야 했던 걸까. 정말로…
‘왜 조용히 있지를 못해?’
정말로 내 잘못이었던 걸까.
“세상에 말이야 박 대표, 직장생활 고달픈 거야 누구나 그렇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화가 난다고 상사 얼굴에 음식을 끼얹는다는 게, 그게 될 일인가 그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미 하얗게 변해버린 머릿속에서는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는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해, 응? 자네 직원들도 그러나?”
그저, 눈앞이 흐려지기만 했을 뿐.
박 대표가 대답하지 않자 김 부장이 이죽이며 덧붙였다.
“아무튼 조심해. 밥 먹다 느닷없이 비서한테 잡채로 얻어맞고 싶지 않다면.”
이 새끼가 진짜…!
눈물이 떨어지려는 눈을 질끈 감았다. 가슴이 미친듯이 두근거리고 숨이 가빠져왔다. 등에서 식은땀이 솟아났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진 하루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을 때였다.
“그쯤 해두시죠.”
어.
하루는 천천히 박 대표를 돌아보았다. 김 부장도 마찬가지였다. 적잖이 놀랐는지 입을 벌린 그대로 굳어버렸다.
카페 배경음악이 멎자 박 대표가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일단 끝까지 들어나볼까 했는데 더 이상은 못 참겠군요. 제발 만나서 이야기만 들어달라고 사정사정을 하길래 어쩔 수 없이 시간을 잡았더니 한다는 소리가…부끄럽지도 않습니까?”
“뭐, 뭐야?”
“어쩐지 소문이 심상치 않더라니. 보아하니 사표도 그 일 때문에 내셨던 거군요? 그렇게 자랑스럽게 떠벌릴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부장님이랑 엮이지 말라는 소리를 최근 몇 번이나 들었는지 알기나 하십니까?”
“그게 무슨…! 어떤 놈이 그래!”
“언성 높히지 마세요. 그러시라고 만들어놓은 곳 아닙니다.”
“이 사람 이거 이거…”
김 부장의 미간이 주름이 깊어졌다. 마음같아서는 멱살이라도 올려붙이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는 모양이었다.
혀를 차며 넥타이를 풀어헤치는 그에게 박 대표가 말했다.
“전 적어도 부장님께서 예의는 아시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불미스러운 소문이 돌길래 직접 만나서 여쭤볼 생각이었고요. 하지만 오늘 보이신 모습으로 보아 아무래도 제가 잘못 판단한 것 같네요. 실망이 큽니다.”
“거 좀 전부터 무슨 소문 타령이야!”
“그 정도 일이 알려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전 다 예상하고 출국하신 줄 알았는데요. 회식자리에서 만취해서 여직원 성추행하다 망신당하신 것 말입니다.”
쨍그랑.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카페 직원이 쟁반을 떨어뜨리는 소리였다. 근처에 앉아있던 사람들도 연신 이쪽을 곁눈질하며 빠르게 노트북 타자를 때렸다.
“왜 그 부분만 쏙 빼놓고 말씀하신 거죠? 게다가 저지당하니까 할 말 못 할 말 다 하셨다고 들었는데요. 대체 그게 무슨 추잡한 짓입니까?”
“이 사람아. 그때도 말했지만 그건 술김에 별 생각없이 한 거고-”
“부장, 아니 김상현 선배님.”
박 대표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잠시 틈을 두고 그가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
“다른 사람한테 생각없이 행동하지 마세요. 취하셨을 때는 특히.”
김 부장의 입이 다물어졌다. 얼굴은 막 터지기 시작한 폭탄처럼 새빨갰다. 망신을 주려다 되려 당해버리니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참기 힘든 건 이쪽이었다.
“시간이 다 되었군요. 그만 가 보겠습니다.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서요. 그쪽과 알고 지냈던 건 없던 일로 하죠.”
“자네…”
부장님이 선배, 선배가 그쪽이 되는데는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박 대표가 일어나자 김 부장이 핏발 선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후회할 걸세. 내가 전화 몇 통만 돌리면-”
“압니다. 전부터 인맥 관리 하나는 기가 막혔다고 들었으니까요. 학벌 빼고는 별 연결 고리도 없던 저와 애써 커넥션을 유지하신 것도 그 일환이었을 테지요.”
박 대표가 씹어뱉듯 말했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 끝입니다. 어디 마음대로 한 번 해보시죠. 거래처가 될 수도 있는 회사의 직원을 까내리는 사람과는 말도 섞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박 대표는 계단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루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김 부장을 내려다보다 이내 박 대표의 뒤를 따라갔다.
등 뒤에서 험한 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 ◆ ◇
“저, 대표님.”
사무실로 올라가는 계단이 유난히 길었다. 박 대표가 돌아보자 하루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뭐가 죄송하다는 겁니까. 잘못이 있는 건 저쪽인데.”
박 대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전부터 맞지 않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계속 벼르고 있었는데 더 이상 참기 힘들더라고요. 기러기 아빠 푸념 들어주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하지만 그 사람, 발이 굉장히 넓은 것 같던데요.”
실제로 하루는 종종 그가 무슨무슨 기업의 대표다 임원이다 하는 사람들과 약속을 잡았다고 자랑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윗선과의 기름칠 능력도 수준급이었다. 정작 본인은 출중하게 못난 탓에 썩은 동아줄 취급이었지만.
사표도 아마 그 연줄을 믿고 쓴 것이리라. 하루가 불안해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박 대표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 문제 없을 겁니다. 이미 여론이 돌아선데다 직위를 잃어버린 이상 그 인맥이라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까요. 결과로 먹고사는 이 바닥에서는 더더욱.”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동안 저런 사람 밑에서 고생 많으셨습니다. 물론 앞으로는 다른 의미로 고생 꽤 하시겠지만요. 같이 한 번 달려봅시다.”
고개를 끄덕이며 하루는 생각했다.
깐깐하다고 불평했던 거 취소. 세상에 이렇게 훌륭한 상사가 또 있을까.
“그나저나 잡채라니 그래도 잘 참으셨네요. 저 같았으면 더한 것도 집어던졌을텐데. 고기 불판 없었나요?”
“에이 그건 좀 심하잖아요. 물론 있긴 했지만…”
“이왕 할 거 확실히 하는 편이 좋겠죠. 무슨 일이든지.”
박 대표는 종종 맞는 말을 엉뚱한 상황에서 쓰는 습관이 있었다. 하루가 킥킥대자 박 대표의 눈이 시계로 향했다.
“그건 그렇고 벌써 퇴근시간이네요. 올라가셔서 정리하고 바로 퇴근하세요. 이번 주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저, 대표님.”
운을 뗀 하루의 입술이 다물어졌다. 그녀답지 않게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이유야 단순했다.
“초밥, 좋아하세요? 망원 쪽에 맛있는 집 알고 있는데.”
해본 적 없었으니까. 이런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