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간 우리를 속인 건 유니콘이 아니라 나레티브였다

12조 원이 증발한 인도네시아에서 배우는 해외 진출의 진짜 공부

똑같은 나레티브의 30년, 그리고 12조 원의 증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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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이 넘게, 내가 이 업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인도네시아에 관해 미디어에서 본 나레티브는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

"2억 8천만 명의 인구, 전 세계 4위 시장. 가장 젊은 소비자층. 디지털 경제로의 전환 시 폭발적인 잠재력."

이 문장을 1990년대에도, 2000년대에도, 2010년대에도 똑같이 들었다. 그리고 2020년대 초까지도 우리는 여전히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며 자카르타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런데 물이 빠지고 보니, 우리가 목격한 건 유니콘이 아니라 뿔을 붙인 말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뿔조차 종이로 만든 가짜였다.

2021년 94억 달러(약 13조 원)였던 스타트업 펀딩이 2024년 4.4억 달러(약 6천억 원)로 쪼그라들었다. 95%가 공중 분해된 것이다.

이건 단순한 경기 침체가 아니다. 집단적 환상의 붕괴이자, 신뢰의 증발입니다.


자본시장의 미성숙, 변비에 걸린 동남아


내가 동남아 스타트업 생태계의 치명적 문제를 설명할 때 드는 비유가 있다.

'갑자기 과식한 변비 환자'

동남아 capital market의 미성숙함 때문이다. 퇴로가 막혀있는 시장에 외부에서 VC 자금이 갑자기 확 들어온 바람에, 먹은 걸 소화해 밑으로 내보내지도 못하고, 기껏 받아온 음식을 되돌려 주기도 아깝고, 그냥 시간만 보내고 있다.

자본시장이라는 게 신뢰가 뒷받침되어야 하는 겁니다. 신용 사회가 되기 위해선 치러야 할 비용과 시간이 상당하다. 동남아에서 싱가포르를 제외하고 이게 과연 가능할까?


숫자가 말해주는 빙하기의 실체


2021년은 축제였다. 모두가 유니콘을 꿈꾸던 시절이었죠. 하지만 2025년 지금, 잔치는 끝났다.

펀딩 금액 95% 급감

2024년 4분기 성사된 딜은 단 13건으로 6년 만의 최저치를 기록했습니다. 초기 투자(Seed~Series A)만 간신히 숨이 붙어있고, 레이트 (후기) 스테이지 투자는 사실상 멸종 상태이다.


유니콘들의 처참한 몰락

'국민 기업'이라 불리던 유니콘들의 추락은 더 극적이다. 상장 당시 엄청난 기대를 모았던 Bukalapak과 GoTo의 주가는 공모가 대비 80% 이상 폭락했다.

Bukalapak은 결국 15년 만에 핵심 사업인 이커머스 서비스를 종료했고, GoTo는 자신들의 심장인 Tokopedia를 경쟁사 틱톡에 넘겼다.

워렌 버핏의 말처럼, 물이 빠지니 누가 발가벗고 수영하고 있었는지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선한 가면 뒤에 숨은 '역대급' 사기극


가장 뼈아픈 건, 이들이 내세운 '소셜 미션'이 사기를 위한 가면이었다는 점이다. 농어촌을 살리고 서민 금융을 돕겠다던 기업들이, 실상은 가장 부도덕했다.


양식업 유니콘 eFishery의 배신

10년 전, 자카르타 출장 중이었다. 세나얀의 한 호텔 로비에 젊은 창업자가 나를 찾아왔다. eFishery의 CEO Gibran Huzaifah였다. 자금 조달이 목적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전혀 관심이 가는 모델이 아니었다. 더 중요한 건 창업자에게서 그 어떤 conviction도 느낄 없었다. 그냥 카피한 하나의 비즈니스 아이디어를 설명하는 젊은이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몇 년 후, 내가 회장을 잘 아는 네덜란드의 전 세계 1위 해양 양식업 투자 펀드 Aqua-Spark가 이 회사에 투자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어느새 유니콘이 되어 있었다.


'내가 뭘 놓쳤나?'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30년 투자 및 금융을 했다고 자만한 사람의 실수였나. 글로벌 1위 펀드가 투자했다면 내가 못 본 무언가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2018년부터 6년간 이중장부를 써왔다. 매출을 실제보다 5배나 부풀렸고, 그 규모만 6억 달러(약 8천억 원)에 달한다. 어촌 소득을 늘려준다며 칭송받던 회사였다. 소프트뱅크, 테마섹 같은 글로벌 큰손들과 세계 4대 회계법인조차 6년 동안 까맣게 속았다.

10년 전 호텔 로비에서 느꼈던 내 직감이 틀리지 않았던 거다. 전문가들의 실사(Due Diligence)는 대체 뭘 했던 걸까?


CEO가 인터폴 수배자로, Investree

핀테크 유니콘 Investree의 CEO는 회사 자금을 개인 계좌로 빼돌리다 적발되어 해임됐다. 그는 카타르로 도주해 인터폴 적색 수배 명단에 올랐다가 결국 구속 송환되는 굴욕을 겪었다.


농민을 울린 TaniFund와 장관의 추락

농촌 P2P 대출 기업 TaniFund는 64%라는 살인적인 부실률을 기록하며 투자자 돈 140억 원을 날리고 경영진이 구속됐다. 심지어 '인도네시아의 영웅'으로 불리던 Gojek 창업자이자 전 교육부 장관 나디엠 마카림(Nadiem Makarim)마저 부패 혐의로 체포되며 인도네시아 테크 신화는 산산조각 났다.


'성장 스토리 세일즈'들의 시대는 끝났다


지금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우리에게 명확한 시그널을 보낸다.

"묻지마 투자의 시대는 끝났다."

2021년 투자 광풍 당시, VC들은 딜을 뺏길까 봐 실사를 건너뛰거나 대충 했다. 비상장 기업이라 공시 의무도 없으니, 내부에서 썩어 문드러지는 걸 아무도 몰랐던 거다. 그 대가를 지금 혹독하게 치르고 있다.


다시, 기본(Fundamentals)으로


이제 시장은 냉정해졌다. "매출이 얼마인가?"보다 "진짜인가?"를 먼저 묻는다.

동남아 VC들은 이제서야 기업 거버넌스를 강화하는 'Maturation Map'을 도입하며 무너진 신뢰를 다시 쌓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자금이 없는 게 아니다. Dry powder(투자자의 화력)는 여전히 있다. 믿을 수 있는 곳이 없을 뿐이다.


30년의 나레티브를 넘어서


30년 동안 똑같은 이야기를 듣고, 똑같은 PPT를 보고, 똑같은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결과는 매번 실망이었다.


이제는 질문을 바꿔야 한다.

"인구가 많다"는 게 왜 기회인가? "젊은 소비자층"이 있다는 게 왜 성장을 보장하나? "디지털 전환의 잠재력"이 있다는 건 누가 어떻게 검증하고 보장하나?

덩치만 키운 가짜 유니콘들이 무너진 자리에, 이제야말로 진짜 기본기를 갖춘 알짜배기들이 자라날 틈이 생긴 건 아닐까?

아니면 우리는 또다시 10년 후에도 똑같은 나레티브를 또 다른 시장에서 반복하게 될까?


한국 기업들에게 던지는 질문


해외 진출과 투자를 고민하는 한국 기업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이 보고 있는 성장 지표는 진짜인가? 실사를 했다면, 그 실사는 진짜 제대로 했나? 아니면 그냥 '하는 척'하는 의례적인 절차로 빅4에게 책임을 넘겼나?


"2억 8천만 인구의 시장"이라는 PPT 한 장에 현혹되어,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진 않는가?


신뢰 없는 시장에 뛰어드는 것은 투자가 아니라 도박이다.


내공 없이 규모만 쫓는 것은 성장이 아니라 착시이고 자살이다.


이제는 미디어에서 소셜미디어에서 본 '성장 스토리 세일즈' 대신에 현지 시장을 100배 더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


숫자가 아니라 본질을, 나레티브가 아니라 팩트를, 가능성이 아니라 실체를 봐야 한다.


당신의 해외 진출 전략은 30년 된 나레티브를 넘어서 정말 현지화해서 성공할 준비가 되셨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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