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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규 May 17. 2019

거창함에 다다르기 위한 소소함

사회정의로 가는 길

나는 거창하고 복잡한 것보다는 소소하거나 단순한 걸 더 선호하는 편이다. 그래서 각종 장신구나 포스터가 덕지덕지 달려있는 소위 '힙'하다는 레스토랑보다는 너덜거리는 간판 하나만 달랑 걸려있는 노포가 더 좋다. 각종 토핑들 한데 섞여있는 슈프림 피자보다는 신선한 토마토와 모차렐라, 그리고 바질만 깔끔하게 올라간 마르게리타 피자가 내 취향에 더 가깝다. 화려한 앤티크보다는 군더더기 없는 모던 디자인을 더 좋아하고, 복잡한 패턴 셔츠보다는 무난한 단색 셔츠에 더 끌린다.


이렇듯 언제나 소박하고 단순한 것들에 끌리는 나지만, 어쩌다 직장에서만큼은 꽤나 거창한 이름을 가진 부서에 몸담게 되었다. 그 이름하여 '사회정의부(Social Justice Division)'. 마치 정의의 여신인 유스티티아가 글자 위에서 칼춤이라도 추고 있을 법한 거창한 이름이다. 공정한 법 집행을 통해 사회정의를 구현하자는 의미에서 이렇게 거창한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 부서의 존재 이유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사회정의'란 것은 대체 무엇일까? 사실 나는 이 어려운 질문을 로스쿨 일 학년 때 이미 한번 받은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수업에서 영혼이 반쯤 빠져나간 얼굴로 신나게 멍을 때리다 이 질문을 기습적으로 받았었다. 질문을 받자마자 빠져나간 영혼이 돌아오기는커녕 남아있던 영혼마저 가출해버려 엄청나게 버벅거렸던 기억이 있다. 그 당시 나는 '사회'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고, 무엇보다 '정의'가 무엇인지도 확실치 않았다. 그 둘을 함께 붙여놓은 단어인 '사회정의'가 무엇인지는 당연히 몰랐다. 그때 땀을 뻘뻘 흘리며 난처해하던 날 안쓰럽게 바라보던 다른 학생 하나가 손을 들어 대신 설명해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난 수업 내내 계속 버벅거렸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때 그렇게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하며 배워서 그런지 사회정의의 의미는 아직도 꽤 선명하게 남아있는 편이다.


사회정의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존 롤스(John Rawls)다. 우리에게는 『정의론』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는 롤스는 40년 동안 '정의'라는 주제만 파고든 학자로도 유명하다. 물론 롤스가 사회정의라는 개념 자체를 새롭게 창시한 건 아니다. 사실 사회정의는 꽤나 긴 역사를 갖고 있는 개념이다. 프랑스혁명 때부터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긴 했지만 플라톤이 살았던 고대 그리스 시절에도 관념적으로나마 존재했었다. 하지만 사회정의를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롤스를 꼽는 이유는 그가 사회정의란 개념을 현대적으로 구체화시킨 정치철학자이기 때문이다. 마치 임요한이 그저 인기 있는 '게임'에 불과했던 스타크래프트를 'e스포츠'의 경지로 끌어올렸듯이, 롤스 역시 사회정의의 개념을 현대적으로 발전시켜 이론화했다고 볼 수 있.


존 롤스 (John Rawls)


이런 업적 때문인지 롤스는 20세기 최고의 정치철학자로 꼽힌다. 실제로 영국의 철학자 조너선 울프(Jonathan Wolff)는 "20세기의 두 번째로 중요한 정치철학자에 대한 논란은 있을 수 있겠으나 가장 중요한 정치철학자에 대한 논란은 있을 수 없다. 그 사람은 바로 롤스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게다가 27세에 이미 하버드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는 점, 그리고 하버드에서 정의에 관한 수업을 오랜 시간 동안 진행해왔다는 점에서는 한때 우리나라에 '정의 열풍'을 몰고 온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의 선배 격 인물이라고도 볼 수 있다. 심지어 마이클 샌델 교수가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도 롤스의 『정의론』을 주제로 쓴 논문을 발표하고 나서부터다. 그만큼 도덕철학과 정치철학, 그중에서도 특히 '정의' 분야에서의 롤스의 영향력은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설명이 길어졌는데, 아무튼 롤스는 사회정의에 대해 "모든 이에게 자유를 완벽하게 누리게 할 수 있어야 하며, 빈곤한 사람들의 복지를 우선으로 배려해야 하며, 결과의 불평등은 존재할지언정 기회 자체는 균등하게 주어져야 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즉, 사회적으로 합의한 절차에 따라 사회 구성원들 모두에게 자유권, 행복 추구권, 평등권 등의 기본권들을 '공정'하게 보장하는 것이 사회정의라는 것이다.


이렇듯 롤스가 말하는 사회정의의 핵심은 바로  '공정함'이다. 그는 "진리가 사상체계에 있어서 최고의 덕(德)이듯이 사회 제도에 관한 최고의 덕은 공정(公正)이다"라고 말했다. 덧붙여 불공정한 법과 제도는 그것이 아무리 효율적이고 잘 정리되었다 할지라도 개정되거나 폐기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여기서 롤스가 강조하는 공정함을 무조건적인 평등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다양하고도 모순적인 인간사회는 그 구성원들의 천부적인 재능과 노력 역시 어느 정도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축구를 좋아한다고 모두가 손흥민처럼 챔피언스 리그에서 뛸 수 있는 건 아니고, 법을 공부한다고 모두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Ruth Bader Ginsburg)처럼 연방대법관이 될 수 있는 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롤스 역시 이러한 개인 간의 차이를 인정했다. 그래서 그는 '결과'의 평등이 아닌 '기회'의 평등을 강조한 것이다. 공 좀 찬다고 모두가 손흥민이 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축구화를 살 돈이나 '인맥 축구'에 휘둘리지 않는 제도는 마련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법 좀 공부했다고 모두가 긴즈버그가 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터무니없이 높은 로스쿨 학비를 낮추거나 장학제도를 확장해서라도 법조인이 될 수 있는 진입장벽을 낮춰야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남자든 여자든, 부자든 가난하든, 흑인이든 동양인이든, 일단 모두가 동일한 기회를 가질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사회정의의 기본이라는 이야기다.


참 좋은 말인 거 같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공정한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사회 구성원들 모두가 인간다운 삶을 꿈꿀 수 있는 사회라니, 이런 사회에 반대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아직 롤스가 말하는 공정한 사회를 건설하지 못한 걸까? 왜 '사회정의 구현'이라는 목표를 맞닥뜨리면 덜컥 겁부터 먹게 되는 걸까?


흔히들 공정한 사회로 가는 길의 가장 큰 걸림돌이 인간의 이기심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태생적으로 이기적인 존재들이니 그런 우리가 만든 사회 역시 공평한 기회와 공정한 분배보다는 약육강식 승자독식의 논리가 지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는 데에는 그럴만한 근거가 있다.


공정함이 가장 빈번하게 강조되는 분야인 스포츠를 예로 들어보자. 스포츠에서는 공정성, 즉, '페어플레이 정신'이 언제나 엄중하게 요구된다. 선수들의 순결한 피와 정직한 땀이 흩뿌려지는 운동장이 더럽혀져서는 안 된다는 믿음에서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스포츠에서 정말로 완전무결한 공정성을 바라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의심스럽다. 물론 우리는 심판이 조금이라도 상대편에게 유리한 판정을 내리면 불같이 화를 낸다. 그런 판정이 두세 번 반복되기라도 할시에는 이건 공정하지 못하다며 아예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든다. 하지만 실상 우리가 화를 내는 이유는 그 결과가 공정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내가 응원하는 팀이, 그리고 내 기분이 피해를 입었다고 느껴서다.


진정 공정함을 바랐다면 본인이 응원하는 팀이 유리한 판정에 혜택을 받게 되었을 때도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음, 저건 불공정한 판정이군. 심판이 꼭 판정을 번복했으면 좋겠어"라고 말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거의 없다. 이런 경우에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심판 판정도 시합의 일부"라는 스포츠계의 금과옥조(金科玉條)와도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반색한다. 이처럼 대놓고 기뻐할 정도로 뻔뻔하지 못한 사람들은 '심판의 재량' 따위를 운운하며 자기 자신마저 속이려 든다.


경기를 보는 관객뿐만이 아니다. 스포츠계를 주름잡는 인사들 역시 마찬가지다. 제프 블라터(Sepp Blatter) 국제 축구연맹(FIFA) 전 회장을 포함한 수많은 축구계 주요 인사들은 “오심도 경기의 일부”라며 비디오 판독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여왔다. 더욱더 공정하고 예측 가능한 최신 기술 도입에 반대하는 이들의 주장은 한결같았다. 바로 비디오 판독 기술이 심판의 권위를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권위는 정확한 판정을 전제로 할 때에만 비로소 세워지는 것이다. 들쑥날쑥하고 자의적인 판정에서 나오는 건 '권위'가 아니라 '권력'이다. 안타깝게도 이런식의 주장을 했던 주요 인사들 모두가 부패 스캔들에 휘말리는 걸 바라보며 '땀의 대가'와 "페어플레이 정신'을 강조하는 스포츠계 역시 공정성보다는 권력에 휘둘린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경험적으로 너무나도 잘 알게 되었다. 


이렇듯 우리들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은 '얼마나 공정한가'이기보다는 '얼마나 나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가'인 경우가 많다. 너무 뻔뻔하고 이율배반적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수도 있지 인간은 원래 이율배반적인 존재다. 게다가 이러한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뒷받침해주는 사례나 연구 결과는 인천 앞바다에 떠다니는 담배꽁초들만큼이나 차고 넘친다.


키티 제노비스(Kitty Genovese)

그중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뉴요커들을 포함한 전 세계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준 '키티 제노비스(Kitty Genovese) 사건'이다. 1964년도에 발생한 이 사건은 키티 제노비스라는 28세 여성이 새벽 3시경에 술집에서 야간 당번을 마치고 귀가하던 도중, 뉴욕 퀸스의 주택가에 위치한 자신의 아파트 앞에서 괴한으로부터 노상강도를 당하다 끝내 살해당한 사건이다. 당시 뉴욕타임스의 보도에 의하면 제노비스는 무려 35분 동안 괴한에 격렬히 저항하며 큰 소리로 도움을 요청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그 소리를 듣고 깬 38명이나 되는 그녀의 이웃들 중 그 누구도 그녀를 구출하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말이 쉽지 이런 상황에 선뜻 개입한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영화 <베테랑>에 나오는 아트박스 사장이 아니다. "칼빵 있네?" 하면서 선빵을 날릴 용기는 마동석 정도의 팔뚝이 있어야 나오는 거다. 당장 눈앞에 중학생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어도 그 수가 세 명 이상이면 섣불리 나서기가 꺼려진다. 혼자냐는 말에 "어, 아직 싱글이야"라는 식의 드립을 칠 여유 따위는 없다. 그랬다간 그나마 하나라도 있는 목숨마저 날아갈지도 모른다. 그렇게 보면 새벽 3시에, 그것도 흉기를 든 괴한과 맞서 싸우기 위해 집을 뛰쳐나가지 않았다고 이웃들을 싸잡아 욕하는 건 조금은 가혹한 처사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애초에 이 사건의 핵심은 이웃들이 괴한과 맞서 싸워 피해 여성을 구하지 않았다는 게 아니었다. 사람들이 분개한 이유는 이들이 신고조차 않았다는 것이었다. 창밖으로 일어나는 끔찍한 범행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는 와중에도 말이다. 결국 경찰이 뒤늦게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했을 땐 제노비스가 죽은 지 이미 20분이나 지난 시점이었다고 한다.


뉴욕타임스는 사건에 대해 <살인을 목격하고도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38명>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을 뽑아 톱기사로 내보냈. 이 기사가 미국 사회에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왔음은 물론이다. 사람들은 인간의 이기적 본성에 경악했다. 목격자가 많을수록 책임감은 줄어든다는 '제노비스 신드롬', 혹은 '방관자 효과'라는 심리학 용어들이 생겨났고, 신고전화는 911로 일원화됐다. 제노비스 사건 취재를 지휘한 A.M. 로젠탈(A.M. Rosenthal)은 승승장구해 훗날 뉴욕타임스의 편집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인간의 이기심과 냉정함, 그리고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을 논할 때 빠짐없이 회자되는 대표 사례로 자리 잡았다.


그 후,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라는 의견은 20세기 후반기 내내 우리 사회를 지배해왔다. 심리학에선 서로를 찢어 죽이는 침팬지들의 포악성을 주목하며 인간의 본성이 90퍼센트 침팬지에 가깝다는 발표를 냈다. 경제학에선 신고전학파들이기심을 인간의 보편적 본성으로 상정했고, 정치적 이념인 신자유주의 역시 인간의 이기적 본성에 입각해 시장만능주의를 주창했다. 1976년도에는 사회진화론적 관점으로 인간의 이기심을 관찰한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발표되어 전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사회정의부에서 근무하는 나 역시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사회정의부는 인권 침해, 차별, 노동 착취, 부동산 사기, 그리고 의료 사기와 같은 생활 범죄들을 집중적으로 수사하는 부서다. 그렇다 보니 우발적 범죄가 아닌 계획적 범죄를 주로 다루게 된다. 아시다시피 사기나 인신매매와 같은 것들은 화가 나고 욱해서 우발적으로 저지르는 범죄가 아니다. 그보다는 탐욕과 이기심, 그리고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의 부재에 의해 벌어지는 범죄들이다. 이러한 극도의 이기심을 매주 목격하면서도 인간은 순수하고 이타적인 존재라는 믿음지하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인간 본성에 대한 불신이 늘 나쁜 것만도 아니다. 애초에 인류가 피땀 흘려 이룩한 민주주의란 제도 역시 인간의 이기심을 기본 전제로 깔고 출발한다. 그래서 각종 제도적 장치들과 권력 분권을 통한 견제와 균형으로 인간의 탐욕을 억제하려는 것이다. 인간은 불안전한 존재라는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했기에 합리적인 대응안도 가능했던 것이다.


문제는 요즘 들어 인간에 대한 불신이 '합리적 대응'이 아닌 '냉소주의적 비관'으로만 발현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원래 이기적이라는 인식에만 사로잡혀 '태생적 결함'이나 '구조적 문제'만 운운하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희망'이나 '이타심', 혹은 '공감'과 같은 단어들을 쓰는 건 너무 거창하거나, 촌스럽거나, 혹은 시대에 뒤쳐진 게 되어버렸다. 이런 단어들을 쓰면 심지어 위선자라는 공격을 받기까지 한다.


하지만 인간 본성에 대한 희망을 가질만한 이유는 비관할 이유만큼이나 차고 넘친다. 인간과 유전자적 차이가 크게 없다는 원숭이들은 때때로 서로를 죽이는 잔인성을 보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먹이를 집을 때마다 우리 안의 다른 원숭이들에게 전기 충격이 가해진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차라리 굶어 죽는 쪽을 택했다는 행동 시험 결과가 있다. 침팬지와 같은 영장류인 보노보 역시 낯선 동료에게 호의적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위에 밝힌 '키티 제노비스 사건' 역시 뉴욕타임스와 보도와 실제 상황에는 많이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최근 밝혀졌다. 그 내용에 따르면 실제로 범행을 목격한 사람은 6명에 불과했고, 그것조차 새벽에 비명소리를 듣고 깬 것이라 범행 과정을 제대로 본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그중 두 명은 경찰에 분명히 신고를 했고, 심지어 한 명은 거리로 직접 뛰쳐나가 앰뷸런스가 올 때까지 피해자를 보호했다는 것이다. 결국 뉴욕타임스는 2016년에 오보를 인정하는 사과 기사를 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회정의부가 돌아갈 수 있는 것 역시 일반 시민들의 자발적인 신고 덕분이다. 우리 부서에 제보되는 사건들 중 대다수는 피해자 본인이 직접 신고하는 경우지만, 건 가운데 두세 건은 제삼자에 의한 신고거나 내부고발건이다. 즉, 자신이 직접 피해를 입지 않았더라도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신고한 사건이 20-30퍼센트나 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렇게 제삼자나 내부고발자가 신고를 했을 경우, 사실 확인을 위해 수시로 연락 및 출석 요구를 받는 귀찮은 상황이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결국 사회정의부가 사회정의를 추구해야 하는 건 인간의 이기심 때문이지만, 사회정의를 추구할 수 있는 건 인간의 이타심 때문인 것이다.


영화 <러브 액츄얼리>에서 "사랑은 사실, 어디에나 있다"라고 말했듯이, 인간의 이타심 역시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다. 이기심이 인간의 본성이듯이, 이타심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 그걸 못 보고 인간의 이기심에만 주목하며 인간사회에 대해 비관하는 건 이기적인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꼴 밖에 안된다. 키티 제노비스의 남동생인 빌 제노비스는 자기 누나의 살인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된 뒤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머릿속 헛소리를 현실처럼 만들어내면 사람들은 그걸 머릿속에서 되풀이하며 그럴 만하다고 믿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보면 그게 진짜 우리 삶의 일부가 돼버립니다.”


사회정의를 꿈꿨던 롤스 역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참혹한 살육의 현장을 목격했음에도 인간의 선함을 끝까지 믿었던 사람이었다. 스스로를 '현실적 이상주의자'라 부르는 낙관주의자이기도 했다. 게다가 실제로도 무척이나 따뜻하고 배려가 넘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하버드 대학 교수 채용 면접에서 응시자가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햇빛 때문에 눈도 못 뜨고 난처해 하자 롤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쪽으로 이동해 그 빛을 몸소 막아주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어쩌면 사회정의라는 거창한 목표를 이루기 위한 첫걸음은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론 인간 내면의 이타심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런 믿음을 갖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기 위해선 햇빛 때문에 곤란을 겪는 사람을 위해 몸소 햇빛을 가려주었던 롤스와 같은 사람들의, 그리고 "사회정의란 무엇인가?"란 질문 때문에 곤란을 겪고 있던 나를 위해 손을 들어 대신 대답해주었던 학생과 같은 사람들의 소소한 배려와 친절에 더욱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소소한 이타심사실,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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