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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규 May 31. 2018

반대의 미학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사회

그날의 졸업식은 평범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드디어 졸업이야,’ ‘졸업을 하긴 하는구나,’ 등의 속 모를 각자의 감상에 젖은 학생들의 표정이며, 그 모습을 대견스레 바라보는 학부모들과 교직원들의 눈빛. 그리고 이제 곧 연단에서 축사를 전할 졸업식 초청 연사의 화려한 이력까지, 모두 ‘무난한’ 졸업식의 요건을 채우고 있었다.


2018년도 졸업식에서


그러나 졸업 축사의 시작과 함께, 그 평범한 흐름은 무참히 깨져버리고 말았다. 이날의 초청 연사인 제이 찰스 존슨 (Jeh Charles Johnson)은 미국 민주당 소속의 정치인이자 검사 출신 변호사이며, 오바마 정부 시절 제 4대 국토안보부 장관 자리까지 역임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82년도 학번 콜럼비아 로스쿨 졸업생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국토안보부 장관으로 재임했을 시절 관장한 불법 이민자 강제추방 정책에 반대해온 몇몇 학생들이 자리에서 일제히 일어나 연단을 등지고 뒤돌아선 채로 일종의 시위를 시작한 것이었다.


네댓 명쯤으로 보이는 학생들 중에는 내가 잘 아는 친구의 얼굴도 보였다. 졸업 후 텍사스 주로 돌아가 국경에서 핍박받는 이민자들을 위해 일하고 싶다고 말하던 평소에는 얌전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친구였다. 익숙한 그 친구의 얼굴에서 초청 연사의 얼굴로 시선을 옮기자 무겁게 경직된 그의 표정이 보였다. 목소리에서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평정을 되찾고 담담한 표정으로 축사를 이어갔다.


"학생 여러분들의 이러한 의사표현도 미국에서 누릴 수 있는 여러분의 권리이자 특권입니다."


미국 수정 헌법 제1조와 표현의 자유


연사는 결코 뛰어난 웅변가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축사의 내용이 특별히 감동적이거나 호소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축사의 내용은 그전까지 이어져왔던 졸업식의 진행과 다르지 않게 지극히 예측 가능하고, 무난하며, 평범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 축사가 내 마음에 길이 남을 것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 축사를, 더 나아가 이 졸업식을 특별하게 만들어준 그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무언가가 무엇이었는지는 시간이 조금 흐른 지금에 와서야 더욱 확실해졌는데, 그것은 아마도 지금까지도 내 뇌리에 또렷이 각인되어있는 ‘담담한 표정의 얼굴’들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지금 돌이켜봐도 그들은 무척 담담하고 침착했다. 연사를 등지고 서는 행위로써 자신들의 의사를 전달하고자 했던 졸업생들의 얼굴들도, 그리고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축사를 이어나가던 연사의 얼굴도, 모두 고요하리만큼 담담해 보였다. 어느 한쪽도 언성을 높이거나 소동을 일으키지 않았다. 하지만 그 담담한 표면 아래 보이지 않는 곳에는 격렬한 소용돌이와 거센 불길의 소리 없는 합주가 이어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만큼 이 시위는 학생들에게 분명 힘겨운 투쟁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보이콧하고 있는 이 행사는 어찌 되었든 학우들과 함께 한 3년간의 여정의 마무리이자 그들의 친지 가족들까지 모인 축제였다. 그리고 그들이 공개적으로 거부하고 나선 이 연사는 그들을 3년 동안 믿고 지도해준 교직원들 중 몇몇이 고심하여 선정하고 초청한 인물이었다. 그 학생들이라고 어찌 불편하고 부담되지 않았겠는가? 눈 한번 질끈 감고 넘어가면 이 모든 중압감에서 해방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힘든 건 초청연사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에게 이 행사는 졸업 후 몇십 년 뒤, 모교에서, 그것도 졸업식 초청연사로 초대받은 명예로운 자리었다. 까마득한 후배들에게 환영받고, 박수받으며 입장하고 싶었을 것은 당연하다. 그런 무대에서 그는 본인이 일생 동안 가장 명예스럽게 생각해온 공직자로서의 업적을 공개적으로 공격당했다. 공공정책, 그것도 미국이라는 거대하고 다양한 이익과 욕망이 존재하는 국가의 정책이라는 게 그리 일차원적이지 않음을, 그리고 그것이 결코 한 사람의 개인적인 신념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몰라주는 학생들이 야속하고 원망스러웠을 수도 있다. 학생들을 비난하고, 축사를 중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서로 대척점에 서있는 무언가가 충돌할 때, 그것이 사상이든, 정책이든, 법이든, 아니면 개개인의 언행이든, 어느 한쪽도 상처 없이 넘어갈 수는 없다. 특히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내면의 갈등을 극복하는 것과 동시에 남들의 시선의 무게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도, 그리고 그것을 견디고 축사를 전달한 연사도, 이 충돌로 인해 어느 정도는 상처를 입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끝까지 담담하고 용감했다. 상처 입었다고 상대방을 비난하고 소통 자체를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이것이 그들이 그 상처를 성장과 소통과 화합의 필수 불가결한 과정으로 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반대되고 대립되는 견해로 인해 상처받는걸 두려워한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공통된 현상을 보면,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지역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도 양극화되어있는 우리 사회가 의견 차이로 인해 상처받는걸 극도로 두려워하고 기피하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절충과 화합이 이루어지고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전에 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이슈에 대해 대립한다. 미국만 하더라도 인종에 대한 문제, 이민자에 대한 문제, 여성에 대한 문제, 그리고 현재 북핵 정책에 대한 문제까지 다방면의 이슈에 대한 무수히 많은 의견들이 기존 언론 매체들 뿐만 아니라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SNS 플랫폼을 통해서도 하루에도 수백만 번씩 충돌한다. 문제는 이러한 반대되는 의견들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다. 나의 생각과 다른 의견은 단순히 틀리기만 한 게 아니라, 비윤리적이고, 토론할 가치가 없는 이단적인 생각으로 전락시켜버린다. 이런 식의 비판과 대립 속에서 우리의 목소리와 언어는 점점 날이 서는 반면, 우리의 사고와 논리는 점점 무뎌지고 만다.


칸트(좌)   헤겔 (중)   마르크스 (우)
포퍼 (좌)   니체 (우)


사실 인류 역사의 모든 위대한 발상은, 다른 어떠한 위대한 사상에 반박하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창조되었다. 헤겔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은 칸트 철학의 한계성을 극복하고자 노력했으며, 카를 마르크스 (Karl Marx)는 헤겔의 변증법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의 독일 관념론에 반박하면서 새로운 관점인 유물론을 창시했다. 칼 포퍼 (Karl Popper)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 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은 그러한 헤겔과 마르크스 모두를 비판하기 위해 쓰인 저서이다. 또한 니체 (Friedrich Wilhelm Nietzsche)는 어떠한가. 그는 기존의 거의 모든 사상가들과 논쟁하며 모든 권위와 질서에 반박함으로써 근대철학을 전복시켰다.


이들의 대립과 반대가 이토록 위대한 결과로 이어지고, 그와 정반대로 현재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그 수많은 대립과 반대는 조잡한 분열의 씨앗을 잉태하는데서 그치는 그 결정적 차이는 무엇일까? 우선 반대함으로써 위대한 업적을 이룬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본인들이 반박하고 비판하고자 하는 상대의 의견과 그 쟁점들을 먼저 완벽히 소화하는데에서부터 출발했다는 것이다. 소화하는것이 온전히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상대의 견해를 우선 신중하게 읽고, 그 말을 주의 깊게 들으며, 그 표정을 유심히 봐야 한다. 이렇듯 우리도 다양한 의견들, 우리의 생각과 다른 생각들로 인해 받을 상처를 두려워 하지말고, 그것들을 오히려 폭넓게 경험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만, 작게는 개인적인 성장, 그리고 크게는 사회적 통합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전 미국 국무부 장관 헨리 키신저와 콘돌리자 라이스, 전 하버드 대학교 총장 래리 서머스, 인권 운동가 아얀 히르시 알리, 영화감독 마이클 무어, 보수 성향의 퓰리쳐상 수상자인 칼럼니스트 조지 윌, 진보 성향의 퓰리처상 수상자인 칼럼니스트 애너 퀸들런은 놀랍게도 요즘 미국 대학들의 졸업 연사로 초청되었다가 학생들의 거센 반대로 결국 취소되어 졸업생들에게 발언할 기회조차 박탈당한 유명인사들의 리스트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더 편협해지고 분열되어가고 있는지를 대변해주는 암울한 현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졸업식에서 목격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기 때문에 담담할 수 있었던 그 대립의 풍경은 나에게 매우 감명 깊게 다가왔다. 이 희망적인 장면은 마치 학교가 졸업식을 통해 에게 주는 '마지막 수업'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러한 감상에 한껏 젖어갈 때쯤, 꽤 오랜 시간 서있었던 것 같은 초청연사와 학생들이 마침내 본인들의 자리에 착석했다. 그들의 표정이 전보다 한껏 더 편안해 보인 건 나 혼자만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졸업을 하는 나와  주위에서의 세계가 전에 없이 두근거리며 맥박 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리고 이러한 단상들과 함께, 나는 마침내 재학생에서 졸업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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