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여행지는 발리
발리는 참 묘한 곳이다. “별로였어”라는 사람도 있고, “매년 간다”는 사람도 있다. 그들이 왜 발리를 사랑하는지 궁금하다. 그들이 왜 발리를 사랑하는지, 나는 그 이유를 직접 확인하러 가기로 했다. 반면, 엄마는 내가 발리 간다고 하자 ‘마약, 사기, 쓰나미’ 뉴스며 유튜브며 잔뜩 보내왔다. 수백 번은 조심하라고 했다.
동남아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 혹은 ‘발리 좋다더라’는 말만 믿고 간 사람들은 기대만큼 실망도 컸다는 얘기를 종종 했다. 귀가 닳도록 들은 이야기덕분에 기대치가 낮아서 일까, ‘좋으면 좋은 거고, 별로면 그런가 보다.’라는 마음이었다
올해의 시작과 함께, 행운처럼 항공권이 찾아왔다. 현금을 제외하면 여행자에게 이만한 선물이 또 있을까? 이왕이면 과감하게 떠나보자 마음먹고, 평소 예산 때문에 망설였던 노선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발리, 몽골, 코타키나발루. 그중 ‘발리’라는 이름이 유독 크게 들어왔다.
발리 하면 떠오르는 건 서핑, 요가, 그리고 화산. 불의 고리에 위치한 그곳에 대해 많이 아는 건 없지만, 지인 중 서퍼와 요기니들이 1~2년에 한 번은 가곤 했다.
여행을 준비하며 몇 가지 난관에 부딪혔다.
첫 번째, 발리는 3박 4일로 다녀올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일정이 길어졌고, 그만큼 할 일도 많았다. 며칠째 서너 시간씩만 자며 여행 전 해야 할 일들을 마무리했다. 잠은 그 어떤 것보다 사람을 온화하게 만든다. 이성적으로 만들고, 생각할 시간을 주며, 긍정적으로 만든다. (그다음은 탄수화물.)
두 번째, 발리가 인도네시아에 있다고 해서 ‘동남아 가격’을 기대하면 오산이었다.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든다. 게다가 지불하는 비용 대비 일처리가 매끄럽지 않다. 여행 비자, 관광세 등 처음부터 돈 들어갈 곳이 많았다. 투어 예약의 경우 스쿠버다이빙이 괌보다 비쌌다. 비용이야 어쩔 수 없다 치지만, 비자 발급 과정에서 오류가 났는데 해결이 안 됐다. 메일을 보내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
세 번째, 출발 3일 전 화산 폭발로 항공기가 회항·취소됐다는 뉴스를 접했다. 이게 가장 컸다. SNS를 통해 소식을 찾았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출발 3일 전의 그 뉴스는 출발 전까지 마음을 편치 않게 했다. 솔직히 가기 싫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발리에서 서핑숍을 운영하는 지인의 한마디.
“북한이 오물 풍선 쐈다고 한국 사람들이 계엄령 아니잖아요? 그런 느낌이에요. 그냥… 일상이죠.”
그 말이 신기하게도 나를 진정시켰다. 외국 친구들이 ‘북한 뉴스’에 긴장하는 것처럼, 나 역시 이번 여행에 괜한 공포를 덧씌우고 있었던 건 아닐까.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이 여행을 시작하기로 했다. 출발 전날, 피로와 예민함이 극에 달해 ‘가지 말까’까지 생각했으니, 진정이 되었다고하나 기대는 이미 바닥이었다.
기내에서 이 예민함을 곱씹다 보니, 스무 살 무렵 처음 떠난 해외 배낭여행이 떠올랐다. 한 달 동안 낯선 나라
에서 지냈던 그때는 짐보다 마음의 준비가 더 필요했다. 그 후로는 늘 가던 곳만 찾으며, 설렘보다 익숙함과 편안함을 선택했다. 아직 인생의 반도 살지 않았지만, 여행에서 긴장이나 설렘은 점점 줄고 익숙함이 자리를 차지했다. 문득 과거 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차피 인생엔 긴장해야 할 순간이 이렇게나 많은데, 굳이 쉬러 가서까지 긴장할 필요가 있을까. 그래서인지 나는 한곳에 오래 머물고, 같은 곳을 여러 번 찾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책 한 권을 들고 비행기에 올랐다. 괌 노선보다 넓고 신식 항공기였다. 새로운 곳이지만, 늘 이용하는 항공사라 그런지 주황색 유니폼만 봐도 정이 가고 안정감이 있다. 7시간 넘게 서서 일하는 승무원들을 보면 늘 마음이 짠하다. 나보다 어린 친구들이 맨손으로 화장실을 닦고, 미소로 “들어가셔도 됩니다”라고 말해주고, 모르는 걸 물어보면 아는 대로 다 설명해주는 것들 모두. 그래서 이번에도 인사를 전했다.
“고생 많으세요. 항상 잘 이용하고 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자리로 돌아가니, 조금 전 그 승무원이 쪽지를 건넨다. 쪽지를 읽다 보니, 나이가 들어서인지 그 작은 따뜻함에 괜히 눈시울이 붉어졌다.
기상, 커피, 헬스장 혹은 공원, 회사, 집, 업무, 취침. 딱딱하게 굳은 하루 루틴에 트리메부틴말레산염(위장운동약 성분)이 들어가 위장·소장·대장이 차례로 연동운동을 하는 것 같았다. 감정이 말랑말랑해진 기분이었다.
들고 간 책은 한 달 전쯤 샀는데, 기내에서 모두 읽었다. 시간이 없어 읽지 못했던 책을 한 번에 읽으니 이해도 잘 되고 내용의 아웃라인이 그려져서 더 좋았다. 세이노의 가르침 중 ‘책은 한 번에 읽어라’는 말이 떠올랐다.
말 한마디, 작은 성취만으로도 모든 게 긍정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시작이 좋다. 작은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여행하자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