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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람 Aug 30. 2021

출구 없는 방황

영화 <엑시트> 리뷰

케이블 티비에서 엑시트를 하길래 초반부만 눈여겨 보았다. 재밌었다. 일단 영화 속 유독가스는 취업난으로 인해 불안한 청춘들의 자기반영이라고 느꼈다.


.....물론 이런 해석에는 언제나 한계가 있는데, 감독이 현실 속 취업난을 표현하기 위해서 재난영화라는 형식을 차용했다는 식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도 유독가스와 취업난은 구별할 수 있다. 하지만 엑시트가 만들어짐으로써 취업난에 대한 감각이 재난에 대한 공포로 전이되었다는 해석은 가능하지 않을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엑시트, 더 나아가 영화 그 자체는, 현실과 전적으로 무관한 것이다.


즉 엑시트에는 현실이 반영되기는커녕, 오직 현실로부터 벗어나려는 (두 남녀 주인공의) 발버둥만 있다. 그런데 이것은 엑시트라는 대중영화의 한계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엑시트의 흥행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이다. 만일 이 영화가 현실을 적나라하게 표현했다면 (취업난을 다룬 대부분의) 다큐 영화들처럼 엑시트는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는 현실을 왜곡시키고 굴절시킴으로써 우리가 현실 그 자체와 직접 대면하는 것을 회피할 수 있게 해준다. 영화가 지닌 주술적인 측면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대중영화 감독은 관객에게 영화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이 (이미) 원하던 현실을 제시한다. 그것은 (적나라한 현실과 대비된다는 점에서)일종의 환상이자 꿈이다. 하지만 관객은 그것을 '있음직한' 현실로 이해하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멋대로) 짜맞추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영화적 편집은 이런 방식으로 작동한다.


(감독 뿐만이 아니라) 관객도 편집과정에 참여한다. 씬과 씬, 쇼트와 쇼트들은 사실상 서로 무관하다. 하지만 감독은 이 무관한 것들을 잘라내고 이어붙임으로써 하나의 영화를 완성해낸다. 영화를 보는 관객도 이와 비슷한 것을 해낸다고 볼 수 있을까? 하지만 감독의 편집을 1차 편집, 관객의 그것을 2차 편집이라고 부를 때, 이들은 각각 다른 차원에서 이뤄진다.


1차 편집과 2차 편집의 관계는 (라캉이 말한) '비관계'이다. 즉 1차 편집과 2차 편집은 서로 전적으로 무관한 시간대에 이뤄진다. "성관계는 없다." 하지만 (엑시트와 같은 대중영화들에서)2차 편집이 이미 1차 편집의 전제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앞서 말했듯이 대중영화에 대한 감독의 재능은 대중들이 감당할 만한 수준으로 적당히 현실을 왜곡시키는 능력에 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다소 저열하지만 예를 하나 들어보자.


여기 파트너를 성적으로 만족시킬 수 있다고 믿는 한 남성이 있다. 하지만 이 남성과 파트너의 성적 환상은 각각 다른 차원에서 작동하고 있다. 즉 파트너가 실제로 향유하는 것은 (그 남성의 테크닉이나 지속시간이 아니라) 자신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믿는 그 남성의 아둔한 환상 그 자체이다. 따라서 파트너는 남성의 향유를 향유했던 것이다....


정확히 같은 메커니즘이 대중영화 감독과 관객 사이에서도 통용된다면 어떨까? 대중이 실제로 지불하는 것은 티켓값이 아니라 감독 자신의 아둔함이라면? 하지만 관객이 지불해야 하는 대가는 생각보다 크다. 관객은 잃는 것은 그들이 속한 현실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즉 엑시트를 통해 바라본 취업난은 재난의 일종으로 비춰질 뿐이다.


이렇게 본다면, 취업난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생한 우연한 사고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유독가스가 언젠가는 대기 중으로 흩어지고, 남녀 주인공(조정석, 윤아)들이 일상으로 복귀했던 것처럼, 언젠가는 위기상황도 끝나게 될 터이다..... 하지만 이것이 날조된 꿈이라면? 작금의 취업난이 자본주의에서 발생한 단순한 사고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면? 취업난이야말로 자본주의의 구성적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속된다면?


 따라서 리얼리즘에 대한 해석은 달리 이뤄져야 한다. 우리가 어떤 작품을 우리가 리얼하다고 부를 때이든, 성적인 오르가즘에 도달할 때이든, 리얼함은 정확히 이 지점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즉 예술 작품의 리얼리즘은 작품 내부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관객들이 원하는 현실, 적당한 수준에서 감당해낼 수 있는 현실이기에 리얼하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우리가 리얼리티가 아니라 리얼 그 자체(라캉이 실재라고 칭했던 것)에 대해 진정으로 숙고해본다면 엑시트는  리얼하지 않다. 하지만 재차 질문해본다. 과연 그것이 이 영화의 한계인가? 답은 역시나 '아니다'이다. 다시 반복하지만, 현실을 재현하지 못했다는 것이 엑시트의 문제점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나는 이 영화가 실재와의 대면을 회피했다고 주장한다. 라캉이 말한 실재란 무엇인가? 그것은 현실과 가상을 매개하는 틈(증상)이다. 통속 예술가와 1급 예술가를 구별하는 기준은 이러한 실재에 굴복했느냐, 아니면 과감하게 증상 내부를 관통해서 지나갔느냐이다. 그리고 어떤 위대한 예술가가 실재를 가로질렀다면 현실은 가상에 의해 전유된다. 오직 이러한 방식으로 예술은 현실을 재생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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