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통해 본 파리남녀의 동상이몽 연애고민
영화에는 다양한 장르가 있고, 요즘의 관객들은 멜로에서 호러까지 모든 장르의 영화에 익숙하지만 각 나라별, 문화권 별로 특별히 '잘 되는' 장르 또한 분명 존재한다. 미국에서 인기있는 액션 영화는 프랑스에서는 그닥 인기가 없고, 우리나라에서 특별히 사랑받는 뮤지컬 영화도 프랑스에서는 그닥이다. 반면 프랑스에서 사랑받는 것은 코미디 영화다. 프랑스의 코미디 영화는 왠만해서 망하지 않는다고 할 정도다. 그 중에서도 슬랩스틱 코미디 보다는 블랙 코미디나 로맨틱 코미디가 인기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로맨틱 코미디가 여성들을 위한 장르인 것과 달리, 프랑스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은 남자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감정을 주요 소재로 다루는 연애와 사랑 이야기가 비단 여성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일반적인 남자들의 일상에서도 내내 중요한 고민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오늘날 여성들의 로맨틱 코미디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부분 연애에 별 소질 없는 30대 여성이 어느 날 꿈꾸던 ‘왕자님’을 만나고, 우여곡절 끝에 사랑을 확인한다는 기본적인 패턴의 변주라고 한다면, 프랑스 남자들의 로맨틱 코미디의 패턴 또한 주인공이 ‘진정한 사랑’을 만나고 깨달아 가는 과정인 것은 비슷하다. 하지만, 여성들이 주인공인 로맨틱 코미디가 결국엔 « 결혼을 할 수 있을까 » 혹은 « 내게 다시 사랑이 올까 » 의 불안감에서 시작되어 그 갈등이 해소되는 과정이라면, 남자들이 주인공인 프랑스의 로맨틱 코미디는 « 정말 결혼을 해야 하나? » 의 문제에 갈등하고, ‘아버지’로 대변되는 기성세대의 라이프스타일과 본인의 미래를 견주며 번민하는 기나긴 과정들이라고 할 수 있다. 정리하면, 여성은 결혼을 하고 싶어 고민하고, 남성은 결혼을 하고 싶지가 않아 문제인거다.
이 영화 속 번민하는 남주들은 대부분 나름의 소박한 직업을 가지고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살고 있으며, 무게감 없는 ‘쿨’한 연애를 지속하고 있다. 그러다가 ‘누군가’를 만나고 그럭저럭 안정된 관계가 되면서 문제가 시작된다. 빨리 아이를 갖고 안정된 가정을 이루려는 여자친구와 일상적인 갈등들이 생기고, 그러면서 여자친구가 꿈꾸는 안정적인 삶으로 들어가지 않으려는 저항을 하거나 (영화 Ma vie en l’air), 결혼을 앞두고 혹은 결혼을 진행하면서 기존의 라이프 스타일을 버려야 한다는 갑갑함에 다른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그리고 이들의 고민은 대부분 결국 ‘구원의 여성’을 만나면서 해결된다. 어느날 갑자기 등장한 이 ‘구원의 여성’들은 남자들로 하여금 가정을 갖고 싶도록 마음을 바꾸게 할 만큼 커다란 위력을 갖는데, 그녀들은 대체적으로 이전의 여성들과는 다르게 결혼을 꿈꾸지 않고 독립적이며 자유롭고 연애에 ‘쿨’ 하다는 특징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 결혼을하고도 싱글로 남는 법 (원제:Prête-moi ta main) » 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샤를롯 갱스부르와 알랑샤바 주연의 영화도 그런 경우다. 주인공 남자는 영화 초반, «올해 43살, 독신이고, 나는 이에 만족한다. 아주 만족한다 »고 당당히 선언하며 결혼하라는 주변의 성화를 잠재우기 위해 ‘계약연애’를 계획한다. 그 상대는 직장동료의 여동생으로 독신주의자에 혼자서 아이를 입양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독립적인 여성이다. 향수를 만드는 조향사라는 직업만큼 섬세한 그와 남자는 필요 없다고 말하는 씩씩하고 털털한 여자는 처음부터 티격태격 하지만, 그는 물론 그녀를 사랑하게 되고 함께 살기를 원하며 끝난다.
어쩌면 아버지 처럼 살고 싶지 않았던 이 남자들이 최대한 ‘어머니’의 이미지와 동떨어진 여성에게서 다른 인생의 가능성과 희망을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은 결국 아버지와 비슷한 인생의 시스템으로 똑같이 걸어 들어가게 되고, 그런 스스로를 바라보며 이를 자조하기도 한다.
프랑스의 천재 가수라고 칭송 받는 벤자망 비올레(Benjamin Biolay) 가 주연한, 우리나라에는 « 베첼러 데이즈 아 오버 » 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원제:Pourquoi tu pleures ?) 영화는 결혼을 앞둔 한 남자의 « 메리지 블루 »를 다루고 있다. 영화는 결혼식을 며칠 앞두고 해외에서부터 몰려온 처가의 가족들을 챙기고 행사를 준비하면서 혼란스러워하는 남자를 보여주며 시작된다. 그는 점점 결혼식은 커녕 결혼에 대해서도 아무런 확신도 없어 보인다. 설상가상으로 약혼녀도 사라졌다. 그녀도 나름의 생각할 시간, 결정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 둘은 서로를 사랑한다고 속삭이면서도 그렇게 각자의 공간에서 또한 결혼을 회의하는데, 영화는 주로 남자의 의식의 흐름을 쫓는다. 남자는 바에서 매력적인 젊은 여가수에 매료되어 함께 밤을 보내게 되고, 그 결혼 전의 며칠 동안 그녀를 찾아가 위로를 구한다. 그녀는 그가 두고 떠나야 하는 가볍고 자유로운 ‘독신으로의 삶’을 상징할 것이다.
남자는 밤마다 몰려와 이삿짐을 싸주고, 결혼식을 챙겨주는 친구 중 한 명 에게 너는 결혼을 왜 했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친구는 어이없다는 듯 가만히 보다가 말한다.
« 당연히 여자친구가 원하니까 했지! 다른 사람들처럼! »
여가수와의 관계를 현장에서 목격했던 남자의 누나는 결혼 전날 « 정말 중요한 건, 내가 다른 여자를 계속 좋아할 수도 있다는 거야 »라고 말하는 남동생에게 대답한다.
« 그건, 늘, 가능한 일이야. 넌 매일매일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지. 하지만 정말 힘든 건, 그러면서도 관계를 지켜내는 거야 »
이들의 결혼에 대한, 정착과 안정에 대한 두려움은 인생이 무거워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 유혹하고 유혹되면서 살아있음을 느꼈던 젊음의 시간이 이젠 저물 수도 있다는, 아버지가 그랬듯 나도 이제 사회가 만들어 놓은 시스템 속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에 대한 저항일 것이다. 그 마음이 이해가 되는 한편으로, 어쩌면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 있는일들을 이들이 너무 크게 부풀려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던 시대에는 없었던 두려움이 각자의 ‘선택’에 맡겨놓으니 부풀어 올라 엄청난 일이 되었다.
38세의 직장인 파리지엔 카롤린은 5년을 넘게 사귄 남자친구와 작년에 헤어졌다. 그녀가 지금까지 살면서 가졌던 ‘진지한’관계로는 네 번째 남자였고, 그는 여전히 그녀의 ‘베프’로 남아있다. 둘의 헤어짐은 미래에 대한 불확신과 견해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므로 그녀가 새로운 관계에서 찾는 것은 당연히 이 부분이다. 전 남친과의 관계에서 너무 ‘누나’같이 끌어주는 역할을 해야 했던 것이 힘들었다며, 이제는 본인을 끌어줄 사람을 원한다는 그녀의 바램이 쉽게 이뤄질 거라고는 물론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어딜가도 빠지지 않는 미모에 세련된 분위기의 그녀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이 이렇게 어려울 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하나, 둘 가정을 이루고 부모가 되기 시작하는 주변 친구들을 보면서 그녀는 점점 더 조급해졌고, 결국 전에는 쳐다 보지도 않던 인터넷 만남 사이트에도 가입 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예쁘고, 똑똑하고,능력 있고, 센스있으며 게다가 착하기까지 한, 내 눈엔 너무 완벽한 그녀인데, 그녀의 새로운 연애는 왜 이렇게 힘든 걸까?
문제는 그녀와 ‘미래에 대한 견해’ 가 맞아 떨어지는 남자가 많지 않다는데 있다. 소위 상위 몇 프로만 가입할 수 있다는 ‘프리미엄’만남 업체에서도 그녀는 그 ‘단순한’조건을 충족시키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 그녀가 만나는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만, 그들은 ‘당분간’ 너무 진지한 만남은 원치 않는다거나 진지한 연애는 몰라도 아이를 갖거나 가정을 꾸리는 일은 ‘당분간’ 상상도 하지 않을 작정인 사람들이라는 거다. 그 ‘당분간’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 중에는 40대 중반의 남자들도 많다는 것이 그녀에겐 절망이다. 그녀는 그들이 원하는 ‘캐쥬얼한’ 만남이야 말로 이제 그만 하고 싶다. 결혼은 모르겠지만, 마흔이 되기 전에 반드시 아이를 갖고 싶기 때문이다.
또 다른 친구 마릴리즈의 경우도 비슷하다. 그녀가 7년을 사귀고 동거했던 그녀의 전 남자친구 마크와 헤어지게 된 것은 지난 해 마크가 홍콩으로 갑작스레 발령이 나면서였다. 그때까지 구체적으로 나눠보지 않았던, 계속 미뤄두기만 했던 미래에 대한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 상황이 그렇게 온 거다. 그는 우선 홍콩으로 떠났고, 자리를 잡은 후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휴직을 하고, 중국어도 배우며 홍콩에서의 일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주씩 파리와 홍콩을 오가며 관계는 이어졌다. 그녀로서는 인생의 커다란 변화를 결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미래를 약속하지 않았다. 그는 « 앞으로 어떻게 될 지는 장담 못하지만, 현재로서는 함께 있고 싶어 »라고 말했고, 그녀는 그렇게 그를 떠났다. 사랑했지만 서른 일곱의 그녀는 ‘현재만’을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표지사진 : 영화 러브 인 비즈니스클레스 (Amour et Turbulences) / Alexandre Castagnetti/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