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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크라테스 May 14. 2019

내 연애의 디폴트 값은 공개연애

스웨덴에서 경험한 공개 연애와 혼전 동거에 관하여


많은 사람을 만나본 것은 아니지만, 늘 이성을 만날 때 나는 굳이 부모님께 말하지 않았다. 데이트가 있을 때는 친구를 만난다고 둘러댈 뿐이었다. 하지만 지난 남자 친구와의 연애는 엄마와 동생에게 적극적으로 알렸다. 연애를 시작하자마자 가족에게 '공개연애'를 선언한 것이다. 만난 지 얼마 안 되어 카카오톡과 전화로 남자 친구를 소개하고, 함께 찍은 사진을 보내고, 내가 왜 이 사람을 좋아하고 어떻게 만나게 되었고, 지금 어떤 감정으로 만나고 있는지 소상히 엄마에게 이야기했다. 가족 간의 사소한 대화와 심리적인 연결, 유대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빠가 하늘나라로 가시면서 내게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더 이상 미성년자가 아닌 성인으로서 독립적인 삶을 살기 위해 나는 엄마에게 걱정을 끼치는 대신 믿음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최초로 공개연애를 선언했다.


장문의 카톡 편지를 읽은 엄마는 며칠간 답장이 없었다. 가슴이 콩닥콩닥 댔다. '괜히 말했나? 너무 성급했나? 비밀 연애가 편한데 왜 굳이 말했을까?' 오만가지 걱정과 후회가 머리를 스쳤다. 그리고 3일 후, 엄마는 전화로 내가 이런 적이 없어서 당황스럽기도 하고 의아해서 답장을 선뜻 못했지만 이야기해줘서 고맙다며, 남자 친구와 좋은 시간을 보내라는 말과 함께 다음에 만나보고 싶다는 인사를 건넸다. 나의 이성 친구를 내 가족에게 소개하는 이 일은 굉장히 낯설고 조심스러운 일이었지만, 관계를 공표하니 나와 그의 연애는 더욱 떳떳하고, 자유롭고, 자연스러워졌다. 순간순간의 감정과 행복에 충실하며 그와 우리 가족은 함께 여행을 하기도 하고, 집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살아온 환경도, 언어도, 문화도 다른 서로였지만 각자의 노력 덕분에 우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 시절 가족에게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마음을 졸였지만, 내게 가장 소중했던 사람들이 연결되는 일은 생각보다 더 삶을 충만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함께 여행한 베트남


그런데, 내겐 어렵기만 했던 일이 스웨덴에 사는 동안 친구들의 연애를 지켜보면서 파트너를 가족에게 소개해주는 일이 굉장히 자연스러운 일임을 많이 느꼈다. 스웨덴뿐 아니라 다른 서구권 국가에서 온 많은 친구들이 남자 친구와 함께 사는 경우도 많았다. 결혼도 안 했는데 동거를 하는 셈이었다. 혼전 동거라니 한국에서는 눈총을 받을 일일 수도 있지만 그들에겐 이 일이 굉장히 자연스러운 일이자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일이었다. 좋은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각자가 서로를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중요한데, 친구들은 함께 살면 파트너가 어떤 사람인지, 어디서 갈등을 빚고 어떻게 해결하는지 등 두 사람이 더욱 가까워진다고 했다.


스웨덴에서는 18세(우리나라 19세 또는 20세)가 되면 자연스레 대부분의 학생들이 일을 하거나 대학을 가면서 독립을 시작해. 친구와 같이 살거나 많은 학생들이 파트너가 있을 경우 함께 살아. 경제적으로 집 값을 나눠내기 때문에 아낄 수 있기도 하지만, 사실 그 보다도 함께 살면서 서로를 더 알아가고 이해해나가는 형태로 동거를 생각하는 거지. 단순히 데이트하는 거랑 함께 살면서 겪는 문제는 다르잖아(Micka)

스웨덴에서는 결혼을 전제하지 않더라도 파트너와 나의 가족이 만나는 경우는 흔해. 우리의 명절인 크리스마스나 미드 섬머, 또는 생일과 같이 특별한 날 만나기도 하고, 가족 식사에 초대하는 경우도 흔해. 이런 만남을 통해서 나의 가족과 내 파트너가 잘 어울리는지도 보고, 내 파트너도 나를 둘러싼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아. 오랫동안 다른 삶을 살아온 우리가 서로를 알아갈 수 있는 시간을 가지는 거지(Ida)


보수적인 유교사회에서 자라온 내게 동거를 하거나 상대의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친구들의 연애 형태는 새로움을 넘어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 새로움이 낯설거나 거부감이 들기보다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일은 인생에서 굉장히 중요한 일이지 않나. 더군다나 수십 년을 남남으로 살아온 서로가 견고한 만남을 지속하기 위해 상대와 나의 가치관부터 사소한 생활 방식까지 궁합을 보는 것은 당연했다. 함께 사는 것은 서로를 가장 가까이서 경험하는 일이었으며 각자의 우주가 아닌 '공동의 우주'를 디자인해나가는 일이었다. 동거를 하지 않더라도, 파트너를 가족에게 소개하고 함께할 시간을 많이 만드는 일도 불편하기보다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일이었다.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하고도 가까운 사람을, 내 평생 가장 가까운 존재인 가족에게 소개해주는 일은 서로의 세계를 열고 더 깊이 탐구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두 번의 만남이나 상견례를 통해 어찌 우리가 화목한 가족이 될 수 있을지 알 수 있을까. 한국에서는 가족과 나의 파트너가 거의 만나지 않는다는 말에 눈이 휘둥그레진 스웨덴 친구의 표정이 아직까지 생생하다.


도미닉, 너는 과일 알레르기가 있으니까 머핀 구울 때 블루베리를 안 넣었어.

스웨덴에서 만난 독일 친구 커플 아네뜨와 도미닉 집에 놀러 갔을 때 도미닉이 집에 도착하자, 블루베리가 들지 않은 머핀을 건네며 아네뜨의 어머니가 말했다. 딸 커플의 집에 놀러 온 아네뜨의 어머니는 딸의 남자 친구의 취향과 식습관에 대해서까지 소상히 알고 있었다. 딸의 남자 친구가 아닌 아들과 엄마 사이 같았던 그 상황은 내게 신선한 충격이자 감동이었다. 연애란 나와 상대 단지 두 사람의 세계를 구축하는 일이라 생각했던 내게, 스웨덴에서 만난 친구들의 열린 연애는 진정한 연애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게 했다. 상대방의 가족을 만나는 일은 사랑하는 사람의 삶의 역사를 여행하며 한층 더 상대를 깊게 이해하는 일이자, 상처를 보듬어 주기도 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이해하기 위한 통로가 되었다.


'결혼할 사이도 아닌데...', '괜히 부모님한테 소개해드렸다가...', '만나는 사람 없어요~' 연애를 숨기기에만 급급했던 내게, 스웨덴에서 경험한 열린 연애는 나만의 '연애의 정석'을 만들어갈 용기를 주었다. 나는 앞으로 더 적극적으로 내 연애를 알리고, 파트너를 나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소개하며 내 삶의 엑기스를 나눌 것이다. 가장 가까운 존재인 가족들에게 나의 가장 가까운 연인을 소개하는 일이 그렇게 두려운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지켜야 하는 사생활을 존중하면서도 사생활을 감추지 않는 개인주의의 서구 사회가 가족 공동체를 중시하는 우리나라보다 오히려 가족 간의 소통이나 유대관계가 더욱 활발하다고 느낀 지난 2년이었다.


우리는 무엇이 그토록 겁나거나 불편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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