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의 탄생
신이 있다면 나는 그 신이 되고 싶지 않다.
세상의 비극이 내 가슴을 찢을 것이기 때문이다.
- 쇼펜하우어
나는 태어날 때부터 어느 대천사의 이름으로 불렸다. 매주 토요일 성당에 끌려가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 지폐를 보라색 천이 씌워진 바구니에 담았다. 한 줄에 대여섯 명이 앉을 수 있는 긴 나무 의자는 무릎을 꿇을 수 있는 보조 장치가 달려 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수백 명의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내 탓이라며 가슴을 퍽퍽 쳐댔다. 죄인들의 합창이었다.
나는 죄인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잘못한 것이 무어라고 스스로 죄를 뒤집어 씌운다는 말인가? 평소에도 이유 없이 미움받는 불쌍한 나에게, 없는 죄까지 뉘우치라는 건 부당한 일이다.
돈을 갖다 바치면서 기꺼이 죄인 대접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신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성당에 입장한 후, 죄를 고백하는 순간 외에는 말을 할 수 없다. 입을 꾹 다물고 1시간 동안 앉아 있으려니, 악마가 귓가에 속삭이는 듯했다. 내 안에 악마가 있는 건지, 이곳이 악마의 소굴인지 헷갈린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조금도 불쌍해 보이지 않고, 십자가에 박혀 신부를 조정하는 것 같다. 예수의 꼭두각시인 신부는 비과학적이고 모순투성이의 성서(가톨릭교의 성경) 구절을 외우며, 도둑질하지 말라고 전한다. 헌금은 도둑질 아닌가. 무슨 권리로 매주 꼬마들의 코 묻은 돈을 털어가는가.
토요일마다 돈을 갖다 바치면서 죄인 취급받는 내가 한없이 불쌍했다. 성당을 벗어나도 거실엔 성모 마리아가 두 손을 모은 채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다. 온 사방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걸려있다. 모자가 합동으로 우리 집안을 감시하고 있다. 침대에 누워 옆을 바라보면 항상 걸려 있는 가시관을 쓴 예수의 모습에 진절머리가 났다.
우연히 성당을 친구들과 같이 다니게 되면서, 나만 성당이 싫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심지어 셋이 같이 헌금을 모아 오락실에 가서 실컷 게임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음 한편이 항상 편치 않았다. 일탈을 즐기면 즐길수록 더 큰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마치 악마의 유혹에 넘어간 배신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나는 죄책감 속에 살고 싶지 않았다. 모든 신자는 적어도 1년에 한 번 고해성사를 받아야 한다. 불투명한 유리 뒤에 정체 모를 신부에게 나의 검은 비밀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 고해성사 후에는 죄가 씻기고 개운해지기는커녕,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가 나의 배신을 만천하에 까발릴 수 있다는 두려움이 머리를 아프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