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기록을 대신하면 내게 남는 것은?

기록의 효율보다 소중한 것

by 어디

세상이 변하는 속도가 아찔할 정도입니다. 이제 AI는 우리 삶의 전반을 보조하는 것을 넘어, 가장 사적인 영역인 ‘기록’의 자리까지 넘보고 있습니다. 말 한마디면 흩어진 일상을 그럴듯한 문장으로 요약해 주고, 내일을 위한 조언까지 덧붙여주는 시대. 기술적으로는 참 편리하고 완벽한 세상입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손으로 일기를 씁니다. 화면 위의 매끄러운 커서 대신 사각거리는 만년필을 쥐고 종이 위를 느리게 지나갑니다. 왜인지, 오늘은 그 이유를 적어보려 합니다.


기록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의 산물입니다

만약 기록의 가치가 오직 '남겨진 결과물'에만 있다면, AI는 더할 나위 없는 파트너일 것입니다. 인간보다 빠르고, 정확하며, 훨씬 정돈된 문서를 만들어내니까요. 나중에 읽을 정보를 저장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이보다 효율적인 도구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에게 기록이란 ‘쓰는 행위’ 그 자체에 의미가 있습니다. 펜을 쥐고 오늘 하루 중 어떤 소재를 골라낼지 고민하고, 적절한 단어를 찾기 위해 멈춰 서는 그 지루한 과정 속에서 나의 생각은 비로소 정리가 됩니다. 그 과정이 생략된 채 결과물만 남는다면, 그것은 나의 ‘삶’이 아니라 그저 정교하게 가공된 ‘데이터’에 불과할 것입니다.


매끄러운 문장이 놓치는 솔직함에 대하여

AI가 쓴 글은 참 매끄럽습니다. 오타도 없고 비문도 없죠. 하지만 기록의 가장 솔직한 진심은 사실 ‘지운 흔적’이나 ‘엉킨 문장’ 사이에 숨어 있습니다. 내가 직접 쓰면 그 순간의 머뭇거림, 떨리는 손끝의 감정이 종이 위에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AI는 그 모든 '인간적인 소음'을 말끔하게 소거해 버리죠. AI는 우리가 감정을 담아 의도적으로 틀린 맞춤법이나, 나만이 아는 시적인 허용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내가 직접 쓸 때는 문장을 이어가다 예상치 못한 ‘나’를 발견하곤 하는데, 이미 주어진 정보 안에서만 움직이는 AI는 그런 우연한 발견의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AI, 배척이 아닌 '영리한 보조자'로

그렇다고 해서 AI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AI는 시간을 아껴주는 유능한 도구이고, 때로는 나의 기록들을 객관적으로 분석해 주는 차가운 거울이 되어주기도 합니다. 중요한 건 주객이 전도되지 않는 지혜입니다. AI를 맹신하거나 배척하기보다, 기록의 ‘주체’는 끝까지 나로 남겨두는 것. AI는 나라는 사람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보조자로 곁에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역설적으로 더 부지런히 손글씨를 써 내려가야 합니다. 훗날 AI에게 들려줄, 가장 나다운 진짜 이야기들을 위해서라도요.


오늘도 저는 만년필을 듭니다. AI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나의 서툰 문장들이 종이 위에서 소란스럽게 생겨납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이 문장들은 오롯이 나의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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