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여름은 무슨 색인가요? 누군가는 싱그러운 풀잎의 초록을, 누군가는 능소화의 다홍을, 누군가는 해변의 파랑을 떠올리는 계절이다. 눅눅하게 번진 수채화가 될 수도 있고 선명한 빛깔의 유화가 될 수도 있는 계절이다. 그러나 어떤 이에게는 마냥 가볍고 청량한 계절이 아니다. 그저 혹독한 기다림의 연속이다. 이를테면 온 집안을 뒤덮은 곰팡이, 에어컨 없는 방, 마르지 않는 빨랫감, 그리고 오갈 데 없이 지겹게 붙어 앉아서 보내는 휴가철로부터의. 여름을 기억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각자의 팔레트를 가지고 한 폭의 캔버스를 채울 테니까. 나의 여름은 보랏빛이다. 작열하는 태양과 일렁이는 물결, 그 사이 어딘가에는 보라색으로 멍든 마음이 있다. 최악의 겨울을 피하기 위한 차악의 여름. 남들과 다른 감상을 뱉어낼 때면 이방인이 된 기분을 느낀다.
나의 sweet-spot은 이곳에 없다. 아무도 찾지 않는 곳, 모든 자극이 차단된 곳, 한 톨의 먼지도 용납할 수 없는 곳. 아마 그래서 나 또한 들어서지 못하는 모양이다. 최적 각성 수준에 이르렀을 때 사람은 가장 편안하고 생산적인 상태가 된다. 지나치게 예민한 사람한테는 평범한 일상적 사건 또한 극도의 긴장감을 유발할지도 모른다. 언제나 과도함에 머물러 있는 나에게 평안함과 여유로움은 말 그대로 이상적인 소리에 불과하다. 나이가 들수록 자연이 좋아진다는 말을 비웃던 때가 있었다. 평생을 도심 한복판에서 바쁘고 치열하게 살고 싶을 줄로만 알았다. 숲은 빼곡하고 호수는 잔잔하다. 그곳에 남몰래 괴로운 마음을 숨겨두고는 한다. 나뭇가지 사이로 날아가고 저 멀리까지 떠내려가길 바라면서.
삿포로에 갈까요. 이 말은 당신을 좋아한다는 뜻입니다. (이병률,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그러나 눈이 오면 갇혀버린다는 그곳에 눈사람이 되어 사라질 각오로 찾아가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여름밤의 한강, 겨울 아침의 눈밭이 전혀 반갑지 않을 때마다 낭만을 좇는 이들을 부러워하게 된다. 숙명처럼 길을 헤매는 자에게 돌아갈 곳이란 없다. 혹은 제 손으로 없애버렸다거나. 하염없이 걷다가 문득 머무르는 순간만 존재할 뿐이다.
가까스로 닿은 여름은 익숙하고도 낯설다. 밤보다 낮이 긴 계절, 달리 말해 밤이 짧은, 햇살이 따갑고 나뭇잎이 무성한 계절. 이 계절의 풍경을 이루는 것은 공기와 빛, 끈적임과 풀 내음 같은 감각이기에, 쉬이 언어로 붙잡을 수 없다. 사실 모든 계절의 무수한 풍경은 언어화 되기 전에 저 멀리 사라진다. 풍경은 흘러가고, 언어는 멈춰 있다. 이런 때마다 떠올리는 것은 한 폭의 그림이다. 언어가 닿을 수 없는 계절, 언어가 담을 수 없는 풍경을 그린 그림. 거기에는 풍경이 심상으로 전환되던 때의 순간이 새겨져 있다 애써 노력하지 않고도, ‘그린다’는 행위는 그 자체로 순간을 지속시키곤 한다.
; 풍경을 잇기, 연결 하기, 틈을 벌리기 (모희)
이운은 한때 노마드(nomad)를 꿈꾸며 여행했던 곳들의 풍경을 재구성하여 그린다. 그가 풍경과 맺는 관계는 오래도록 바라보는 행위로부터 비롯된다. 늘 예고 없이 마음에 다가오는 풍경을 맞이할 때면, 그는 하염없이 그곳을 바라보았다. 풀과 나무, 하늘과 같은 평범한 풍경의 면면이 생경하게 다가올 때까지. 이 틈을 찾아내는 것은 풍경으로부터 차오르는 것들을 차곡차곡 쌓은 뒤 다시 덜어내는 과정을 반복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이운이 그리는 풍경은 일종의 방공호이기도 하다. 먼 타국의 유목민 가족과 머물렀던 마을, 황량한 사막에서 발견한 작은 꽃이 마음에 위안을 주었듯, 그는 자신이 그리는 풍경이 누군가가 걸어 들어와 쉴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 실제로 그림은 흐릿한 윤곽과 열은 농도의 붓질로 다른 시선이 들어올 수 있는 여지를 열어 둔다. 간간이 등장하는 인물조차 풍경의 일부가 되어 그림에 녹아 들어 있다. 마치 넓은 행간을 두고 긴 호흡으로 읽어 내려가는 시처럼, 이운의 풍경은 이 벌어진 공간의 빈 틈으로 관객을 불러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