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울뿐인 귀족 신분에 집착하는 벼락부자 ‘쥬르댕’의 욕망을 이용하기 위해 감언이설로 꼬드기는 개인 교사와 귀족의 태도는 그의 어리석음을 극대화한다. 특히, 하녀 ‘니꼴’의 솔직한 시선을 통해 한층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 인터파크 티켓
분명 우스꽝스럽고 경박스러운 코미디이지만 마음 편히 볼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던가? 사실 이 불편함의 정체를 명쾌하게 서술할 자신이 없다. 웃음이 터져 나온 장면도 있었고, 발을 까딱거리며 리듬을 탄 구간도 있었고, 철저하게 유도된 박수를 치기도 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조롱받고 이용당하는 부르주아의 한심한 모습을 바라보며 그다지 유쾌하거나 혹은 성찰하는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 생이 아름다운 극단
그 까닭은 아마도 함께 수업을 듣는 귀족 지망생처럼 상정되다가도 ‘쥬르댕’을 실컷 비웃고 끝나버리기 때문인 것 같다. 가면도 드레스도 없이 민낯을 드러내고 앉아있는 동안 애매한 거북함이 느껴졌을 뿐이다. 소위 말하는 고급 취향으로 분류되는 문화생활을 즐기는 것 역시 맹목적 동경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봐 의심스러웠다. 마치 ‘쥬르댕’이 음악과 무용을 배우려고 애썼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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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철학은 오랫동안 쌓아온 교양을 요구하는 상류층의 전유물로 인식되곤 했다. 돈으로 품위와 학식을 갖추려는 ‘쥬르댕’을 한심하게 바라보고 있지만 막상 고급과 저급을 나누고 지위를 바탕으로 배제적 문화를 향유하는 귀족들을 지적하려는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신분 상승에 욕심 내지 않는 ‘쥬르댕 부인’이 현실적인 인물로 비추어지면서 출신의 한계를 받아들이라는 꾸짖음이 옳은 처사로 들리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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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군다나 ‘쥬르댕’의 허영심과 대조적인 ‘뤼씰르’의 진심, ‘끌레옹뜨’의 인품, ‘니꼴’의 당당함, ‘코비엘르’의 영리함은 크게 부각 되지 않아서 물질만능주의보다 다른 가치가 더욱 소중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처럼 정작 주목해야 할 것에는 가까이 다가서지 못한 채 마무리되었다는 점이 제법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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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몰리에르(Molière, 1622-1673)가 희곡 <서민 귀족>에 가짜 터키인을 등장시키고 엉터리 복장과 언어를 사용한 배경은 루이 14세가 터키(현 튀르키예)와 굴욕적인 외교 사건을 겪은 뒤 희화화하는 발레를 주문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사전 정보가 없는 상태로 보았을 때 다소 눈살이 찌푸려지는 설정이었기에 젊은 남녀가 사랑을 이루어낸 장면이 그다지 아름답게 와닿지 않았다. 물론 원작을 충실하게 재현한 부분이지만 상상력을 덧대어 각색하는 편이 더 설득력 있는 접근이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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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자극을 보며 기대했던 것은 현실의 부조리함을 은근하게 꼬집으며 의아함을 유발하는 효과였다. 그런데 성찰보다는 유머에 치중한 듯한 인상이 강하고, 정작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부분에 소홀하다. 신분제 따위야 진작에 철폐되었으나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계급이 남아 있는 사회 구조, 재벌과 금수저를 향한 무의식적인 선망 등을 날카롭게 돌아볼 기회가 넉넉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한 사람을 무시하는 데에 그치는 동조가 상당히 낯 뜨거워지는 아쉬움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