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는 어디에나 있다. 그리고 어디에도 없다. 유명한 무명이라는 역설, 이것은 뱅크시 본인과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개념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드러나지 않음으로써 과감하게 드러낼 수 있다니. 뱅크시가 거리의 예술가라는 것은 곧 누구나 뱅크시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공공장소에 새긴 흔적은 보이지 않는 이들의 소리 없는 외침과도 같다.
도시가 권력화됨에 따라 그 반대편에 존재하는 것들이 함께 늘어난다. 모두 같은 도시를 공유하고 있지만 그곳에서의 경험은 명백히 차등적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 함께 살고 있는 숨겨진 존재들이 있다. 사라져가는 역사성, 밀려나는 거주자들, 부유하는 타자들이 그러하다. 시간이 담겨 있는 낡은 건물과 오래된 간판은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미명 아래 허용되지 않는다. 열악한 도심 공간을 재개발하면 비싼 임대료 때문에 다른 지역으로 쫓겨나야만 한다. 노동자와 소비자로 정리되는 현대사회의 인구 개념에서 무쓸모함으로 분류된 낙오자들이 떠다닌다. 이들은 뱅크시 도상학에서 쥐로 묘사되는 억압 받고 소외된 존재들이다. (박영현, 2014) 즉, 낙후 지역이 활성화되어 새로운 계층이 유입될수록 도시 빈민들은 서 있을 자리를 잃는다. 문래동, 가로수길, 이태원과 같은 소위 ‘핫플레이스’ 골목들이 겪고 있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다. 그 많던 원주민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이제 어디로 가야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자본주의, 약육강식, 적자생존. 너무 당연해진 나머지 일상에서 무신경하게 스쳐 지나가는 원리이다. 그러나 가시화되면 불쾌하고 찝찝해지는 논리이기도 하다. 예술은 은유의 미학이자 직설의 미학이다.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을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상정할수록 비싼 값이 매겨진다. 이것 또한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자본가들을 비판하는 작품을 찬양하며 사들이는 쪽은 다시 자본가들, 무산계급으로서는 평생에 걸쳐도 만져볼 수 없는 금액을 턱턱 지불하면서. 현대사회에 돈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이념이다. 아도르노의 말마따나 상업성에 종속되지 않은 예술이라는 개념은 환상에 불과하다. 소비 구조를 지적하고자 하는 작품들마저 향유에서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술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때 그곳을 훔쳐보는 자를 지금 이곳으로 끌어당기는 추동이 되어야 한다. 지워진 이들의 삶을 눈앞에 데려다 놓는 힘이 되어야 한다. 화려함에 가려져 압도된 사람들과 저도 모르는 사이에 길들어 이면에 관심 갖지 않는 사람들. 어느 한쪽의 주체가 될 수 없다면 목격자가 되어야 한다. 누군가 문화 예술의 가치를 묻는다면 '기억하고 환원하는 삶'이라 답하겠다. 문화는 간접 경험을 실현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 전쟁, 난민, 빈곤, 불평등…, 귀 기울여 마땅한 문제를 인식하고 담론의 장을 펼친다. 이것이 바로 불편한 예술이 해야 하는 일. 이제 우리는 의식하고 저항하고 각성할 차례이다.
* 박영현. 2014. 권력화된 현대도시의 이면(裏面)에 관한 시각 표현 연구 : 도시공간의 재맥락화 방법을 중심으로. 석사학위논문, 이화여자대학교.
사랑과 전쟁은 서로 매우 다른 이념이지만 동전의 양면이기도 하다. 뱅크시는 전쟁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면서 독재와 인간 억압에 맞서 자유, 민주주의, 평화를 진작해야 마땅하다고 말하는 언론과 정치인들에게 이의를 제기한다. 그런 모순적인 수사는 탐욕이나 권력, 지배와 같은 전쟁의 음흉한 속내를 감춘다. 악과 혐오를 누르고 궁극적으로 승리해낼 수 있는 사랑과 평화의 힘을 상기시킨다.
_ 폭탄 사랑
골리앗을 죽인 소년 영웅 다윗.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이 어깨에 투석기를 짊어지고 서 있다면, 뱅크시의 다비드상은 스카프를 두르고 최루탄 연기에 휩싸여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성서 속 다비드는 작지만 강한 ‘승리의 인물’로서, 교황과 황제의 세력을 견제하고 도시의 독립을 지키는 자유 민권의 상징이었다. 도나텔로, 베로키오, 카스타뇨 등이 골리앗의 머리를 든 승리의 순간을 묘사했다면 미켈란젤로는 전투를 각오한 엄숙한 결의와 긴장감을 표현했다. 한편 뱅크시의 다비드는 어쩐지 슬픈 눈빛을 하고 있다. 아래로 살짝 떨어진 시선에서 단호함보다는 씁쓸함이 강하게 느껴진다. 인류 역사에 끝없이 반복되는 전쟁과 폭력의 굴레, 그 한가운데에서 사랑을 지키려는 투쟁이란 얼마나 고된 일인가.
그들(쥐)은 작고, 미움을 받고, 박해받으며 멸시받는다. 도시의 밑바닥인 하수구와 쓰레기 매립지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모든 문명을 무릎 꿇게 할 수 있고 지역을 자신의 식민지로 만들어 지배할 수 있다.
_ 런던
Disneyland의 안티 테제로서 만들어진 Dismaland. 경비원과 보안검색대, 허름하게 무너져 내리는 신데렐라의 성, 그래픽이 깨진 듯이 뒤틀린 인어공주, 사고로 뒤집힌 마차 밖으로 튕겨 나온 신데렐라를 쉴 틈 없이 취재하는 파파라치, 폭동 진압을 위한 경찰차, 난민 보트, 고금리 대출 코너 …. 현실은 꿈과 환상으로 가득한 공간이 아니라고 속삭인다. 풍자와 반문화가 즐비한 아나키즘의 축제 현장에서 울려퍼지는 경고, “잊지 마세요. 야망은 현실 안주만큼이나 위험합니다.”
발랄한 얼굴은 중무장한 폭동진압 경찰의 기관총과 완전한 대비를 이루며 관객을 무장해제 시키고 불안하게 하는 데 쓰인다. 폭동진압 경찰의 날개는 천사 같아 보일지도 모르지만 당장이라도 쏠 수 있는 기관총과 진압 장비에 비하면 작고 쓸모 없다. 갈수록 폭력이 흔해지고 체계화 되어 가는 분위기 속에서, 평화의 수호자와 위험의 이중성을 포착하며 우리로 하여금 권위와 권력을 쥐고 있는 이들을 회의하게 한다. 친근한 얼굴 뒤의 억압과 겁박을 생각하게 한다. _ 날고 있는 군인
뱅크시는 사회 지도층의 권위와 과도한 통제를 저항하고 우리에게 성찰을 요청한다. 당신이 의지하고 있는 지도자 혹은 종교, 혹은 신용카드는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고 있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을 모방하는 것, 혹은 과거로부터 온 관습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을 지시한다. 그는 끊임없이 공공영역, 거리와 시위의 현장에 나가 무명의-정체가 없는 예술가의 신분으로 그래피티를 한다. 한시적으로 존재하지만 강력한 메시지를 발언하는 그의 작업은 ‘예술가’가 아닌 ‘관객’의 자리를 만들어낸다. 예술계를 설득하는 작업이 아니라 대중을 설득하고자 하는 그의 태도는 관조적이고 수동적인 대중의 역할을 저항하라고 말한다. 관객의 권위를 회복하고 예술뿐만 아닌 삶의 풍경 전반으로 그의 예술이 유용하길 자처한다.
_ 진짜 뱅크시, 진짜 나
바코드 케이지를 탈출한 표범 한 마리가 다가온다. 상업 문명에서 바코드는 편리하고 효율적인 장치로 기능한다. 동시에, 사람들을 제도에 철저히 종속시키는 역할을 한다. 세상을 지배하는 규율을 벗어나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암시하는 것만 같았다. 언제든 뚫고 나와 자유를 되찾을 수 있다고. 더 나아가, 자본주의는 물론이고 동물권에 대한 성찰 역시 촉구한다. 이성을 지닌 인간은 먹이사슬 최상부에 군림하고 있지만 선뜻 인도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기심과 비인간성에 대한 반성이 함께 요구된다.